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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해석포함)
21/09/27 20:14:37 김정현 조회 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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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卷之一
○太古
天皇氏는 以木德으로 王하여 歲起攝提하여 無爲而化하니 兄弟十二人이 各一萬八千歲더라.
천황씨는 목덕으로 임금노릇을 하여 햇수를 섭제(天干의 寅)에서 시작하고 무위로써 교화하니 형제 열두 사람이 각각 일만 팔천 살을 살았더라.
 
地皇氏는 以火德으로 王하여 兄弟十一人이 亦各一萬八千歲더라. 人皇氏는 兄弟九人이 分長九州하여 凡一百五十世에 合四萬五千六百年이더라.
지황씨는 화덕으로 임금노릇을 하여 형제 열 한 사람이 또한 각각 일만 팔천 살을 살았더라. 인황씨는 형제 아홉 사람이 아홉 고을을 나누어 다스려서 무릇 일백 오십 대에 모두 합쳐 사만 오천 육백년이었다.
 
人皇氏 以後에 有曰 有巢氏하니 構木爲巢하고 食木實하니 至燧人氏하여 始鑽鐩하여 敎人火食하니 在書契以前하여 年代國都는 不可攷라.
인황씨 이후에 유소씨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무를 얽어 집으로 삼고 나무 열매를 먹었다. 수인씨에 이르러 비로소 불을 일으켜서 사람들에게 화식을 가르치니 글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이라 연대와 도읍은 상고할 수가 없다.
 
&太昊伏羲氏
太昊伏羲氏는 風姓이요 蛇身人首니 代燧人氏以王하여 始畫八卦하고 造書契하여 以代結繩之政하며 制嫁娶하여 以儷皮로 爲禮하고 結網罟하여 敎佃漁하고 養犧牲하여 以充庖廚故로 曰 庖羲라. /儷짝려
태호 복희씨는 성이 풍이고 뱀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이니 수인씨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처음으로 여덟 괘를 그리고 글자를 만들었으며 결승의 정치(끈을 묶어 기록을 하던 정치)를 대신하고 시집 장가드는 제도를 만들어 두 장의 가죽으로 예절을 차리고 그물을 엮어서 밭 갈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며 희생(제사에 제물로 쓸 짐승)을 길러서 푸줏간을 채우니 그런 까닭으로 포희라고도 한다.
 
有龍瑞거늘 以龍으로 紀官하여 號를 龍師라 하다. 木德으로 王하여 都於陳이더니 庖羲崩에 女媧氏立하니 亦風姓이라. 木德으로 王하여 始作笙簧하니라. 女媧氏沒에 有工共氏 大庭氏 栢皇氏 中史氏 歷陸氏 驪連氏 赫胥氏 尊廬氏 混沌氏 昊英氏 朱襄氏 葛天氏 陰康氏 無懷氏하여 風姓이 相承十五世하니라.
용이 나타나는 길조가 있어 용으로써 벼슬을 기록하여 이름하여 용 이름 벼슬이라고 하다. 목덕으로 임금노릇을 하여 진에 도읍하였다. 포희가 죽자 여와씨가 섰는데 또한 풍성이라. 목덕으로 임금노릇을 하여 처음으로 생황을 만들었다. 여와씨가 죽고 공공씨 대정씨 백황씨 중사씨 역륙씨 여련씨 혁서씨 존려씨 혼돈씨 호영씨 주양씨 갈천씨 음강씨 무회씨 등이 있어 풍성이 열다섯 대를 서로 이었다.
 
&炎帝神農氏
炎帝神農氏는 姜姓이요 人身牛首니 繼風姓而立하여 火德으로 王하니 斲木爲耜하고 揉木爲耒하여 始敎耕하며 作蜡祭하여 以赭鞭으로 鞭草木하고 嘗百草하여 始有醫藥하고 敎人日中爲市하여 交易而退하니라. 都於陳이더니 徙曲阜하여 傳帝承 帝臨 帝來 帝百 帝則 帝襄 帝楡하니 姜姓이 凡八世에 五百二十年이더라. /耜 보습 사, 蜡 납향(제사) 사, 赭 붉을 자
염제 신농씨는 성이 강씨요 사람의 몸뚱이에 소의 머리를 하였으니 풍씨 성의 임금을 이어서 임금이 되어 화덕으로 임금노릇을 하니 나무를 깎아서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다듬어서 쟁기를 만들어 처음으로 농사를 가르치며 여름철에 지내는 제사를 시작하여 붉은 채찍으로 초목을 치고 온갖 풀을 맛보아 처음으로 의약을 만들었다. 인일에 시장을 열어 물건을 서로 바꾸고 물러나게 가르쳤다. 진에 도읍하였다가 곡부로 옮겨 왕위를 제승, 제임, 제래, 제백, 제칙, 제양, 제유에게 전하니 강씨 성이 모두 여덟 대에 오백 이십년이었다.
 
&黃帝軒轅氏
黃帝軒轅氏는 公孫姓이요 又曰 姬姓이요 名은 軒轅이니 有熊國君 少典의 子也라 母가 見大電이 繞北斗樞星하고 感而生帝하니라 炎帝世衰에 諸侯가 相侵伐이거늘 軒轅이 乃習用干戈하여 以征不享하니 諸侯가 咸歸之라.
황제 헌원씨는 성이 공손 또는 희요, 이름은 헌원이니 유웅국 임금 소전의 아들이라. 어머니가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지도리를 둘러싼 것을 보고 감응하여 황제를 낳으니라. 염제 신농씨의 세상이 쇠퇴하고 제후가 서로 침노하고 정벌하거늘 헌원이 이에 창과 방패를 익숙하게 다루어서 정벌하여 (신농씨에게) 제사지내지 못하게 하니 제후들이 모두 (황제에게) 귀복하였다.
 
與炎帝로 戰于阪泉之野하여 克之하니라 蚩尤가 作亂하니 其人이 銅鐵額이요 能作大霧라 軒轅이 作指南車하여 與蚩尤로 戰於涿鹿之野하여 禽之하고 遂代炎帝하여 爲天子하니라. 土德으로 王하여 以雲으로 紀官하여 爲雲師하다 以風后로 爲相하고 力牧으로 爲將하고 受河圖하니라.
염제와 판천의 들판에서 전쟁을 하여 이기니라 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그 사람이 얼굴은 구리와 쇠요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헌원이 지남차를 만들어 치우와 탁록의 들판에서 전쟁을 하여 (치우를) 사로잡았다. 마침내 (황제가) 염제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니라. 흙의 덕성으로 왕 노릇을 하여 구름으로써 관직을 기록하여 운사라 하였다. 풍후로써 재상을 삼고 역목으로써 장수를 삼고 하도(황하에서 나온 그림)를 받았다.
 
見日月星辰之象하여 始占星官之書하고 命大撓하여 占斗建作甲子하고 容成으로 造曆하고 隸首로 作筭數하고 伶倫으로 造律呂하고 爲文章하여 以表貴賤하고 作舟車하여 以濟不通하고 畫埜分州하여 得百里之國萬區니라 遠夷之國이 莫不入貢이러라 帝崩하고 有子二十五人하니 其得姓者이 十四더라.
해와 달과 별들의 모양을 보고 비로소 별을 관장하는 관리의 글을 점치고 대요를 명하여 두건(북두칠성이 가리키는 십이 신)을 점치고 갑자를 짓고 용성에게 책력을 짓게 하고 예수에게 산수를 짓게 하며 영윤에게 음률을 짓게 하고 문장을 지어 귀천을 표하게 하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 통하지 않는 곳을 건너게 하였다. 들판을 구획하여 고을을 나누니 백리의 나라가 만 개나 되니라. 먼 오랑캐 나라가 들어와 조공을 바치지 않는 나라가 없더라. 황제가 죽고 아들 스물다섯이 있으니 그 성을 얻은 자가 열넷이더라.
 
&少昊金天氏
少昊金天氏는 昌意之子로 黃帝之孫也라 少昊之衰에 九黎가 亂德하니 民神이 雜糅하여 不可方物일새 顓頊이 受之하여 乃命南正重하여 司天以屬神하고 火正黎로 司地以屬民하여 使無相侵瀆하고 始作曆하여 以孟春으로 爲元하다.
/糅섞일 유
소호 금천씨는 창의의 아들로 황제의 손자다. 소호가 쇠퇴할 때에 구려가 덕을 어지럽히니 백성과 신이 뒤섞여서 가히 그 지방의 산물을 바치지 못하므로 전욱이 (왕위를) 받아 이에 남정중을 명하여 하늘을 맡아 귀신에 속하게 하고 화정려로 땅을 맡아 백성에게 속하게 하며 서로 침범하여 더럽히지 않도록 하고 비로소 책력을 지어 첫 봄으로써 (한해의) 으뜸으로 하였다.
 
&帝嚳 高辛氏
/嚳고할 곡,
帝嚳 高辛氏는 玄囂之孫이요 黃帝之曾孫也라 生而神靈하여 自言其名하고 代顓頊而立하여 居於亳하다. /囂시끄러울 효, 頊(삼갈 욱), 亳땅이름 박)
제곡 고신씨는 현효의 손자요 황제의 증손이라. 날 때부터 신령스러워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전욱을 대신하여 (황제의 자리에) 서서 박 땅에 살았다.
 
&帝堯 陶唐氏
帝堯陶唐氏는 伊祈姓이요 或曰名은 放勛이니 帝嚳의 子也라 其仁如天하고 其知如神하고 就之如日하고 望之如雲이더라. 以火德으로 王하여 都平陽하고 茅茨를 不剪하며 土階三等이더라 (勛공훈, 茨지붕일자
제요 도당씨는 이기가 성이요 혹 말하기를 이름이 방훈이라 하니 제곡의 아들이라. 그 인자함은 (만물을 키우는) 하늘과 같고 그 지혜는 (모르는 것이 없는) 귀신과 같아서 (백성들이) 그를 의지하기를 해와 같이 하고 우러르기를 구름과 같이 하더라. 불의 덕으로 임금 노릇을 하여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지붕을 인 띠풀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 계단이 세 계단이었다.
 
有草生庭하니 十五日以前에는 日生一葉하고 以後에는 日落一葉이다가 月이 小盡則一葉이 厭而不落하니 名曰蓂莢이라 觀之하여 以知旬朔이더라. /蓂달력 풀 명, 莢풀 열매 협
어떤 풀이 뜰에 났는데 열닷새 이전에는 날마다 한 잎씩 생겨나고 (열닷새) 이후에는 날마다 한 잎씩 떨어지다가 달이 작은 채로 끝나면 한 잎이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 않으니 이름하여 달력 풀이라고 했다. 이것을 보고 초하루와 열흘을 알았다.
 
治天下五十年에 不知天下가 治歟아 不治歟아 億兆가 願戴己歟아 不願戴己歟아 問左右하되 不知하고 問外朝하되 不知하고 問在野하되 不知라
세상 다스리기를 50년에 천하가 잘 다스려졌는지 잘 다스려지지 않았는지, 억조창생(수많은 백성들)이 나를 임금으로 받들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좌우에 물었으나 알지 못하고 조정 바깥에 물었으나 알지 못했으며 재야에 물었으나 알지 못했다.
 
乃微服으로 游於康衢하여 聞童謠하니 曰立我烝民이 莫非爾極이라 不識不知하고 順帝之則이라 하며 有老人이 含哺鼓腹하고 擊壤而歌 曰日出而作하고 日入而息이로다 鑿井而飮하고 耕田而食하니 帝力이 何有於我哉리오 하더라.
이에 미복으로 시가지에 나가 둘러보며 동요를 들으니 (동요에) 이르기를, “우리 수많은 백성을 일으켜 세운 것에 너의 지극함이 아님이 없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임금의 법을 따르게 된다.”라고 했다. 어떤 노인이 입에 음식을 잔뜩 물고 배를 두드리면서 땅을 치며 노래하기를, “해가 돋으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쉰다.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라고 하였다.
 
觀于華하니 華封人이 曰 噫라 請祝聖人하노라 使聖人으로 壽富多男子하노이다. 堯가 曰辭하노라. 多男子則多懼하고 富則多事하고 壽則多辱이니라.
화 땅에 가서 살펴보니 화의 봉인(수령)이 말하기를, “아, 성인(임금님)에게 축원하기를 청합니다. 성인께서 오래 살고 풍요로우며 아들이 많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요가 말하기를, “사양하겠습니다. 아들이 많으면 두려워할 일이 많고, 풍요로우면 일이 많고,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습니다.”라고 했다.
 
封人이 曰 天生萬民에 必授之職하나니 多男子而授之職이면 何懼之有이며 富則使人分之면 何事之有이며 天下가 有道이면 與物皆昌하고 天下가 無道이면 脩德就閑하고 千歲厭世거든 去而上僊하사 乘彼白雲하고 至于帝鄕이면 何辱之有리오 하더라.
(화)봉인이 말하기를, “하늘이 만백성을 낳아서 반드시 그 직분을 주었으니 아들이 많으면 그들에게 직분을 주면 무슨 두려움(근심)이 있을 것이며, 풍요로우면 사람들에게 (일을) 나누어 시키면 무슨 일이 있을 것이며, 세상에 도리가 행해지면 만물과 더불어 모두 번창하고 세상에 도리가 행해지지 않으면 덕을 닦아 한가롭게 지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세상이 싫어지면 버리고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이상향)에 이르면 무슨 욕된 일이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堯가 立七十二年에 有九年之水거늘 使鯀으로 治之하니 九載에 弗績하니라 堯가 老하여 倦于勤하니 四嶽이 擧舜하여 攝行天子事이더니 堯子丹朱가 不肖라 乃薦舜於天하니 堯가 崩하고 舜이 卽位하니라. (鯀물고기 곤, 사람이름 곤(우왕의 아버지),
요가 임금이 된 지 72년에 9년 동안의 홍수가 나자 곤을 시켜 그것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9년 동안 실적이 없었다. 요가 늙어서 부지런히 해야 할 일에 게을러지니 네 산(지방)에서 순을 천거하여 천자의 일을 맡아 처리하게 하더니 요의 아들 단주가 (아버지를) 닮지 못해 못나서 이에 하늘에 순을 (임금으로) 천거하니 요가 죽은 후에 순이 임금의 자리에 나아갔다.
 
&帝舜有虞氏
帝舜有虞氏는 姚姓이요 或曰 名은 重華이니 瞽瞍之子이요 顓頊의 六世孫也라. 父가 惑於後妾하여 愛小子象하고 常欲殺舜이거늘 舜이 盡孝悌之道하여 烝烝乂하여 不格姦하니라. (姚성 요, 瞍소경 수, 顓전단할 전, 頊삼갈 욱, 烝 찔증, 나아갈 증, 乂 벨 예, 다스릴 예
제순 유우씨는 요가 성이요 혹은 말하되 이름은 중화이니 고수의 아들이요 전욱의 6세손이라. 아버지가 뒤에 들어온 첩에게 미혹하여 작은 아들인 상을 사랑하고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거늘 순이 효도와 공경의 도리를 다하여 (여러 어려움에) 나아가 대처하고 나쁜 일에 이르지 아니하니라.
 
耕歷山하니 民皆讓畔하고 漁雷澤하니 人皆讓居하고 陶河濱하니 器不苦窳하고 所居에 成聚하여 二年에 成邑하고 三年에 成都하니 堯가 聞之聰明하고 擧於畎畮하사 妻以二女하시니 曰 娥皇女英이라 釐降於嬀汭하니라. (窳비뚤 유, 汭 물굽이 예)
역산에서 밭을 가니 백성이 모두 밭두둑을 양보하고 뢰택에서 고기를 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고기잡는) 자리를 양보하고 황하 가에서 질그릇을 구우니 그릇이 비뚤어지지 아니하고 (그가) 머물러 사는 곳에 무리가 모여들고 2년이 지나자 고을을 이루고 3년이 지나자 도시가 되니 요임금이 그것을 듣고 밭고랑(농부)에서 뽑아 올려 두 딸을 시집보내니 가로되 아황과 여영이라 (이로부터 요임금은 순이 살던) 규수와 예수의 합수지점에 내려와서 다스렸다.
 
遂相堯爲政하여 放驩兜하고 流共工하며 殛鯀하고 竄三苗하며 擧才子八元八凱하니라. 堯가 崩하니 舜이 避位河南이더니 天下朝覲 訟獄 謳歌者가 不歸堯之子而歸舜하거늘 遂卽位하여 以土德으로 王하고 命九官하고 咨十二牧하니 四海之內咸戴舜功이라. (驩기뻐할 환, 兜투구 두, 流 흐를 류, 유배보낼 류,
드디어 순이 요임금을 도와 정사를 돌보았는데 환두를 쫓아내고 공공을 유배하며 곤을 죽이고 삼묘를 귀양 보내며 재주 있는 사람 여덟과 능력 있는 사람 여덟을 뽑아 쓰니라. 요임금이 죽으니 순이 임금 자리를 피하여 황하 남쪽으로 갔더니 천하에서 조정에 참예하려는 사람과 옥사로 소송하려는 사람과 노래로 찬양하려는 사람들이 요임금의 아들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로 가거늘, 마침내 순이 임금 자리에 나아가 흙의 덕으로 임금노릇을 하고 아홉 개 관직을 임명하고 열두 개 지방관을 맡기니 온 세상이 모두 순임금의 공을 받들었다.
 
彈五絃之琴하고 歌南風之詩而天下가 治하니 其詩에 曰 南風之薰兮여 可以解吾民之慍兮로다 南風之時兮여 可以阜吾民之財兮로다 時에 景星이 出하고 卿雲이 興하니 百工이 相和而歌曰 卿雲爛兮여 禮漫漫兮로다 日月光華가 旦復旦兮로다.
(순임금이) 오현금을 켜고 남풍의 시를 노래하여 천하가 잘 다스려지니 그 시에 이르기를, “남풍의 향기로움이여 가히 우리 백성의 성냄을 풀겠구나. 남풍의 때맞음이여 가히 우리 백성의 재물을 크게 하리로다.” 그 때에 밝은 별이 나타나고 오색구름이 일어나니 백관이 서로 화합하여 노래하기를, “오색구름이 피어오름이여 예절이 넘쳐흐르도다. 해와 달이 밝게 빛나니 아침이 오고 또 아침이 밝아오도다.”라고 하였다.
 
舜의 子 商均이 不肖하거늘 乃薦禹於天이러니 舜이 南巡狩하여 崩於蒼梧之野하니 在位六十一載라. 禹가 卽位하니라.
순임금의 아들 상균이 (아버지를) 닮지 않아 못났거늘 이에 하늘에 우를 추천하였다. 순임금이 남방을 순수(제후의 땅을 돌아봄)하다가 창오의 들판에서 죽으니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61년이었다. (이어서) 우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夏后氏
夏后氏 禹는 姒姓이요, 或曰 名은 文命이니 鯀之子요, 顓頊之孫也라.
/姒언니 사, 顓전단할 전, 頊삼갈 욱
하후씨 우는 성이 사씨이고, 혹은 말하되 이름이 문명이니 곤의 아들이요 전욱의 손자라.
 
鯀이 陻洪水어늘 舜이 擧禹代之하니 勞身焦思하야 居外八年에 過家門不入하고 陸行乘車하며 水行乘船하고 泥行乘橇하며 山行乘木輦攆하사 開九州하고 通九道하며 陂九澤하고 度九山하여 告厥成功하니 舜이 嘉之하여 使率百官하여 行天子事하니라. /(陻막을 인, 橇썰매 취, 攆(木+輦)가마 련, 陂비탈피,못피,막을피
곤이 홍수를 막았는데 순이 우를 뽑아서 대신하게 하니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애타게 하여 밖에 있은 지 팔 년에 집의 문밖을 지나되 들어가지 아니하고 뭍을 다닐 때는 수레를 타며 물을 다닐 때는 배를 타고 진흙을 다닐 때는 썰매를 타며 산을 다닐 때는 가마를 타면서 아홉 고을을 열었고 아홉 (고을로 가는) 길을 통하게 했으며 아홉 (고을의) 못을 메웠고 아홉 (고을의) 산을 재어서 그 공 이룸을 고하니 순임금이 기뻐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천자의 일을 행하게 하니라.
 
舜이 崩하시니 禹가 避位於陽城이더니 天下之人이 不歸舜之子而歸禹거늘 乃踐位하사 水德으로 王하여 以寅月로 爲歲首하고 聲爲律하며 身爲度하고 左準繩이요 右規矩라 一饋에 十起라 以勞天下之民하다.
순임금이 죽으니 우가 (임금)자리를 피하여 양성으로 갔더니 천하 사람들이 순임금의 아들에게 가지 않고 우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임금의) 자리에 나아가서 물의 덕으로 왕 노릇을 하여 (간지의 세 번째) 인월로써 한 해의 처음으로 삼고 소리로 가락을 정하고 몸(의 길이)으로 척도를 정하고 왼쪽에는 저울과 먹줄이요 오른쪽에는 (원을 그리는)그림쇠와 (각을 그리는)곱자를 두었다. 식사를 한번 할 적에 열 번을 일어나며 천하의 백성을 위해 힘쓰더라.
 
出에 見罪人하고 下車問而泣曰 堯舜之人은 以堯舜之心으로 爲心이더니 寡人이 爲君에 百姓이 各自以其心으로 爲心하니 寡人이 痛之라 하다. 古有醴酪이더니 至禹時하여 儀狄이 作酒어늘 禹가 飮而甘之曰 後世에 必有以酒亡國者라 하고 遂疎儀狄하다. /酪술락
밖으로 나가다가 죄인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물어보고 울며 말하기를, “요순시절의 사람들은 요순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더니 과인이 임금이 되어서는 백성들이 각자 그들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니 과인이 그것을 통탄한다.”라고 하였다. 옛적에 단술이 있었더니 우임금 시절에 와서 의적이 술을 만들어 내거늘 우가 마시고 맛있어하며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술 때문에 나라를 망칠 자가 있을 것이라.”하고 마침내 의적을 멀리 하였다.
 
收九牧之金하여 鑄九鼎하니 三足이 象三德하여 以享上帝鬼神하고 會諸侯於塗山하니 執玉帛者가 萬國이라 禹가 濟江할새 黃龍이 負舟하니 舟中人이 懼거늘 禹가 仰天歎曰 吾가 受命於天하여 竭力以勞萬民하노라 生은 寄也요 死는 歸也라 하고 視龍을 猶蝘蜓하여 顔色을 不變하니 龍이 俛首低尾而逝하더라.
아홉 고을의 쇠를 거두어서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하니 세 발은 세 가지 덕을 상징하였다. 상제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도산에서 제후를 모이게 하니 옥홀과 비단옷을 입은 자가 만국이더라. 우임금이 강(장강)을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짊어지니 배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늘 우임금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말하기를, “하늘에서 명령을 받아 만백성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데 사는 것은 머무는 것이요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라.”하고 용을 보기를 마치 도마뱀 같이 하여 얼굴빛을 변치 않으니 용이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밑으로 내리고 가더라.
 
南巡至會稽山而崩하니 子啓賢하여 能繼禹道하니라 禹가 嘗薦益於天이더니 謳歌朝覲者가 不之益而之啓曰 吾君之子也라 하니 啓遂立하다. /覲뵐근
남쪽 지방을 순수하다가 회계산에 이르러 거기서 죽으니 아들 계가 어질어서 능히 우임금의 길을 이을 만하니라. 우임금이 일찍이 익을 하늘에 천거했더니 노래를 하는 사람과 조정에 알현하러 오는 자들이 익에게로 가지 않고 계에게로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계가 마침내 임금이 되었다.
 
有扈氏無道거늘 啓討之于甘하다. 啓崩하고 子太康이 立하여 盤遊弗返이거늘 有窮后羿가 立其弟仲康而專其政하니 羲和가 黨於羿거늘 胤侯가 承王命하여 征之하니라. /扈뒤따를호, 盤소반 반, 돌 반, 羿사람이름예,
유호씨가 무도하거늘 계가 감에서 그를 토벌하였다. 계가 죽고 아들 태강이 섰는데 돌아다니며 놀면서 돌아오지 않거늘 유궁후 예가 그(태강)의 동생 중강을 (왕으로) 세우고 그 정치를 전횡하니 희화가 예의 한 무리가 되거늘 윤후가 왕명을 받들어 그를 정벌하니라.
 
仲康이 崩하고 子相이 立하니 羿弑相하고 簒立이더니 嬖臣寒浞이 又殺羿自立하니라.
중강이 죽고 아들 상이 서니(왕이 되니) 예가 상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되더니 총애하는 신하 한착이 또 예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니라.
 
相之后는 有仍國君의 女也라 方娠하여 奔有仍而生少康이더니 其後에 少康이 有田一成하고 有衆一旅하여 因夏舊臣靡하여 擧兵滅浞而復禹之績하니라.
/靡쓰러질 미,
상의 왕비는 유잉국 임금의 딸이라. 그때 막 임신하여 유잉국으로 달아나 소강을 낳았다. 그 후에 소강이 십리의 밭을 지니고 오백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 나라 옛 신하 미로 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한착을 멸하고 우임금의 공적(夏나라)을 회복하니라.
 
自少康以來로 歷王杼 王槐 王芒 王泄 王不降 王扃 王厪하야 至王孔甲하니 好鬼神 事淫亂하야 夏德이 衰라. (杼북 저,
소강부터 그 이래로 왕저 왕괴 왕망 왕설 왕불항 왕경 왕근을 거쳐 왕 공갑에 이르니 그가 귀신을 좋아하고 음란한 행위를 일삼아 하나라의 어진 덕이 쇠퇴하게 되었다.
 
天降二龍하여 有雌雄하니 陶唐氏之後에 有劉累者하여 學擾龍하여 以事孔甲하니 賜之姓御龍氏더니 龍一雌가 死거늘 潛醢하여 以食孔甲이더니 復求之한데 累가 懼而逃하니라. /劉죽일 유, 累묶을 루, 擾길들일 요,
하늘에서 두 마리 용이 내려와 암수가 있었는데 도당씨(요임금) 후에 유루라는 자가 있어 용을 길들이는 법을 배워서 공갑을 섬겼더니 그에게 어룡씨라는 성을 주었다. 암컷 용 한 마리가 죽거늘 젓갈을 담가서 공갑에게 먹였는데 다시 (그 젓갈을) 구하므로 유루가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孔甲之後에 歷王臯 王發하여 至王履癸하니 號爲桀이라 貪虐하고 力能伸鐵鉤索이더라. (桀홰 걸, 索동아줄 삭)
공갑 이후에 왕고 왕발을 거쳐 왕 이계에 이르렀는데 이를 걸임금이라고 부른다. 그는 탐욕스럽고 사나웠으며 힘은 능히 쇠갈고리로 된 밧줄을 펼 수 있었다.
 
伐有施氏하니 有施以末喜로 女焉하니 有寵하여 所言을 皆從하여 爲瓊宮瑤臺하고 殫民財하여 肉山脯林하고 酒池可以運船하고 糟堤可以望十里하니 一鼓而牛飮者가 三千人이라. (殫다할탄
유시씨를 정벌하니 유시씨가 딸 말희를 바치니 (걸 임금이) 사랑하여 말하는 바를 모두 좇아서 옥으로 장식한 궁궐을 지어주고 백성들의 재물을 없애서 고기를 산과 숲 같이 쌓아두고 술을 못으로 만들어 배를 띄울 만하고 술지게미로 둑을 만들어 가히 (올라서면) 십리를 볼 수 있었다. 한번 북을 울리면 소처럼 머리 숙여 마시는 자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
 
末喜以爲樂하니 國人이 大崩이라 湯이 伐夏하니 桀이 走鳴條而死하니 夏爲天子一十七世에 凡四百五十八年이더라.
(걸왕이) 말희를 즐거움으로 삼으니 국민들(의 신망)이 크게 무너졌다. 탕이 하 나라를 쳐서 걸 임금이 명조(安邑)로 달아났다가 죽으니 하 나라는 천자가 열일곱 대이고 (치세가) 모두 458년이더라.
 
&殷 /殷성할 은, 나라 이름 은)
殷王成湯은 子姓이니 名은 履요 其先은 曰契이니 帝嚳의 子也니라 母簡狄은 有娀氏女이니 見玄鳥墜卵하고 呑之生契하여 爲唐虞司徒하여 封於商하고 賜姓이더니 (嚳고할 곡, 임금이름곡, 娀(나라 이름 융)
은왕 성탕은 성이 자씨이고 이름은 리이며 그 선조는 설이니 황제 곡의 아들이니라. (설의) 어머니 간적은 유융씨의 딸인데 검은 새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삼켜서 설을 낳았다. (설은) 요임금과 순임금 시절에 사도(교육을 맡은 관리)가 되어 상(지역)에 봉해지고 성을 하사받았다.
 
傳昭明 相土 昌若 曹圉 曰冥 曰振 曰微 曰報丁 報乙 報丙 主壬 主癸하니 主壬의 子天乙이 是爲湯이라 始都亳하여 使人以幣로 聘伊尹于莘하여 進之夏하니 桀이 不用이거늘 尹이 復歸湯하여 如是者가 五더라. /莘족도리풀 신, 땅이름 신,
소명과 상토와 창약과 조어와 가론 명과 가론 진과 가론 미와 가론 보정과 보을과 보병과 주임과 주계에게 전하니 주임의 아들 천을이 이 탕이 되는지라. 비로소 박에 도읍하여 사람을 시켜 예물을 갖추어 신 땅의 이윤을 초빙하여 하나라에 바치니 걸왕이 쓰지 않거늘 이윤이 탕에게 돌아왔는데 이렇게 하기를 다섯 번 하였다.
 
桀이 殺諫者關龍逄이거늘 湯이 使人哭之하니 桀이 怒하여 召湯囚夏臺더니 已而하여 得釋하니라. 湯이 出이라가 見有張網四面而祝之曰 從天降하고 從地出하며 從四方來者가 皆罹吾網하라 하고 (逄막을 방, 臺돈대 대, 罹걸릴 이)
걸이 간하는 신하 관룡방을 죽이거늘 탕이 사람을 시켜 그것을 곡하니 걸이 성내어 탕을 불러 하대에 가두었더니 한참 있다가 풀려나게 되었다. 탕이 밖으로 나가다가 그물을 사면에 펼치고, 왈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땅으로부터 나오며 사방으로부터 온 것이 모두 내 그물에 걸려라 하고 비는 사람을 보았다.
 
湯이 曰噫라 盡之矣라 하고 乃解其三面하고 改祝曰欲左어든 左하고 欲友어든 友하고 不用命者는 入吾網하라 하니 諸侯가 聞之하고 曰湯德이 至矣로다 及禽獸라 하다. 伊尹이 相湯伐桀하여 放之南巢하니 諸侯가 尊湯爲天子하여 金德으로 王하고 以丑月로 爲歲首하다.
탕이 말하기를, “아, 다 걸리겠구나”라 하고, 이에 그 (그물의) 삼면을 풀어버리고 고쳐 빌기를,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가고 목숨을 버릴 자는 내 그물에 들어오라”고 하니, 제후가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탕의 덕이 지극하구나. 새와 짐승에까지 미쳤도다.”라고 했다. 이윤이 탕을 도와 걸을 쳐서 남소로 추방하니 제후가 탕을 높여서 천자로 받들어 쇠의 덕으로 왕노릇을 하고 둘째 달을 한 해의 처음으로 하였다.
 
大旱七年이더니 太史가 占之曰當以人禱라 하거늘 湯이 曰 吾所爲請者는 民也라 若必以人禱면 吾請自當이라 하고 遂齋戒하여 剪爪斷髮하고 身嬰白茅하여 以身爲犧牲하여 禱于桑林之野할새 以六事로 自責曰政不節歟아 民이 失職歟아 宮室이 崇歟아 女謁이 盛歟아 苞苴가 行歟아 讒夫가 昌歟아 하여 言未已에 大雨가 方數千里더라. /嬰갓난애 영, 두를 영, 苞그령(풀)포,꾸러미포,쌀포, 苴삼저,깔저,
큰 가뭄이 칠 년이더니 태사가 점쳐서 말하기를 마땅히 사람을 제물로써 기도해야 한다고 하거늘 탕이 말하기를, “내가 청하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라 만약 반드시 사람을 제물로 기도해야 한다면 내가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청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목욕제계하여 손톱과 머리칼을 자르고 몸에는 흰 띠를 두르고 몸소 희생이 되어 상림의 들판에서 기도할새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여 말하기를, “정치가 절도가 없었는가, 백성이 직업을 잃었는가, 궁궐이 너무 높은가, 여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성했는가, 뇌물 꾸러미가 행해졌는가, 참소하는 사람이 창궐했는가,”라고 했는데, 말이 그치기도 전에 큰 비가 사방 수천 리에 내리더라.
 
湯이 崩하니 太子太丁이 早卒하고 次子外丙이 立二年에 崩하고 弟仲壬이 立四年에 崩하니 太丁之子太甲이 立하여 不明이거늘 伊尹이 放之桐宮이더니 居憂三年에 悔過自責이거늘 尹이 乃奉歸亳하여 脩德하니 諸侯가 歸之더라.
탕이 죽으니 태자 태정이 일찍 죽고 차자 외병이 선 지 2년에 죽고 동생 중임이 선 지 4년에 죽으니 태정의 아들 태갑이 서서 현명치 못하거늘 이윤이 동궁에 추방하였더니 근심하며 산지 3년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책망하거늘 이윤이 이에 받들어 박(도읍지)으로 돌아오게 하여 덕을 닦으니 제후가 그에게 돌아오더라.
 
自太甲으로 歷沃丁, 太庚, 小甲, 雍己하고 至太戊하여 亳有祥桑穀이 共生于朝하여 一日暮에 大拱하니 伊陟이 曰 妖不勝德하나니 君其脩德하소서 太戊가 修先王之政하니 三日而祥桑이 枯死하고 殷道가 復興하니 號稱中宗이더라.
/拱 두 손 맞잡을 공, 한 아름 공, 殷성할 은, 나라이름 은,
태갑으로부터 옥정과 태경과 소갑과 옹기를 지나고 태무에 이르러 박이라는 곳에 상서로운(요망한) 뽕나무와 곡식(또는 닥나무)이 함께 아침에 나서 하루가 지나 저물녘에 크게 한 아름만 해지니 이척(신하의 이름, 이윤의 아들)이 말하기를, “요망함은 덕을 이기지 못하니 임금님께서는 그 덕을 닦으소서.”하였다. 태무가 선왕(선대의 어진 임금)의 정치를 닦으니 사흘 만에 상서로운(요망한) 뽕나무가 말라죽고 은나라의 왕도가 다시 일어나니 이를 불러 중종이라 일컫더라.
 
自太戊로 歷仲丁, 外壬하고 至河亶甲하여 避水患하여 遷于相하고 至祖乙하여 居耿이더니 又圮于耿이라 歷祖辛, 沃甲, 祖丁, 南庚, 陽甲하고 至盤庚하여 自耿으로 復遷于亳하니 殷道가 復興이더라. /亶믿을 단, 耿빛날경, 盤소반 반)
태무로부터 중정과 외임을 지나 하단갑에 이르러 (황하에) 수몰되는 것을 피하여 상(황하 동쪽 지명)으로 옮기고, 조을에 이르러 경(용문의 지명)에 살더니 또 황하에 경이 무너지는지라, 조신과 옥갑과 조정과 남경과 양갑을 지나 반경에 이르러 경으로부터 다시 박으로 옮기니 은나라의 왕도가 다시 일어났다.
 
自盤庚으로 歷小辛, 小乙하고 至武丁하여 夢得良弼하니 曰 說이라 說이 爲胥靡하여 築于傅巖이더니 求得之하여 立爲相하니라 武丁이 祭湯할새 有飛雉升鼎而雊거늘 武丁이 懼而反己하니 殷道가 復興이라 號稱高宗이라 하다.
/胥서로 서, 靡쓰러질 미, 雊울 구,
반경으로부터 소신과 소을을 지나 무정에 이르러 꿈에 좋은 보필자를 얻으니 그가 부열(傅說)이라 부열이 서미(부역자)가 되어 부암에서 성벽을 쌓더니 (왕이) 구하여 그를 얻어서 재상으로 세우니라. 무정이 탕 임금을 제사지낼 때 꿩이 조그만 솥 위로 날면서 울거늘 무정이 (경계하라는 조짐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자기를 되돌아보니 은나라의 왕도가 다시 일어났다. 이를 불러 고종이라 일컬었다.
 
自武丁으로 歷祖庚, 祖甲, 廩辛, 庚丁하고 至武乙하니 無道하여 爲偶人하여 謂之天神이라 하고 與之博할새 令人으로 爲行이다가 天神이 不勝이면 乃僇辱之하고 爲革囊하여 盛血하고 仰射之하되 命曰射天이라 하더니 出獵이다가 爲暴雷에 震死하니라. /僇죽일 륙,
무정으로부터 조경과 조갑과 늠신과 경정을 지나 무을에 이르니 무도하여 인형을 만들어놓고 천신이라 일컫고 그와 더불어 내기를 하는데 사람을 시켜 하게 하다가 천신이 이기지 못하면 이에 모욕을 주어 죽이고,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피를 채워 놓고 쳐다보고 활을 쏘게 하되 이름 붙여 ‘하늘을 쏜다.’라고 하더니, 사냥하러 나갔다가 갑자기 치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
 
歷太丁[文丁], 帝乙하고 至帝辛하니 名이 受이고 號爲紂라. 資辯이 捷疾하고 手格猛獸하고 智足以拒諫하고 言足以飾非더라. 始爲象箸하니 箕子가 歎曰 彼爲象箸하니 必不盛以土簋하고 將爲玉盃요 玉盃象箸면 必不羹藜藿하고 衣短褐하며 而舍茅茨之下則인즉 錦衣九重과 高臺廣室하리니 稱此以求이면 天下가 不足矣라 하다. /簋(제기 이름 궤), 藜명아주 려, 藿콩잎 곽, 臺높은 집 대,
태정과 제을을 지나 제신에 이르니 그 이름이 수이고 (흔히) 부르기를 주라고 했다. 말솜씨가 재빠르고(상대방의 말에 대항하여 논리를 끌어다 대어 말을 해댐이 빠름) 맨손으로 맹수를 치며, 지혜는 간언(충고)을 막을 만하고 말은 그른 것을 (좋게) 꾸며낼 만하더라. 처음으로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니 기자가 탄식하여 이르기를, “저 임금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니 반드시 토기에 (음식을) 담아 먹지는 않을 것이고 장차 옥배에 (술을) 담을 것이요 옥배와 상아 젓가락을 쓰면 반드시 명아주와 콩잎으로 국을 끓이고 짧은 털옷을 입으며 띠풀로 인 집(초가)에서 지내지 않을 것인즉 (이렇게 되면) 비단옷에 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높고 넓은 궁궐에서 살 것이니 이것에 맞추어서 구한다면 천하(천하의 재물)가 부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紂가 伐有蘇氏하니 有蘇가 以妲己로 女焉이라 有寵하여 其言을 皆從이더라 厚賦稅하여 以實鹿臺之財하고 盈鉅橋之粟하며 廣沙丘苑臺하고 以酒爲池하고 懸肉爲林하여 爲長夜之飮하고 /妲(여자의 字 달)
주가 유소씨를 정벌하니 유소씨가 달기로 시집보내는지라 (달기를) 사랑하여 그 말을 모두 따르더라. 세금을 많게 하여 녹대의 재물을 채우고 거교에 곡식을 채우며 사구와 원대를 넓히며 술로 못을 삼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삼아 밤새도록 마시고
 
諸侯가 有畔者면 紂乃重刑辟하여 爲銅柱하고 以膏塗之하여 加於炭火之上하고 使有罪者로 緣之하여 足滑跌墜火中이면 與妲己로 觀之大樂하고 名曰炮烙之刑이라 하더라. /辟죄줄 벽, 跌넘어질 질, 炮구울 포, 烙지질 락)
제후가 배반하면 주가 중형으로 벌을 주어 구리 기둥을 마련하여 기름을 칠하고 숯불 위에 놓아 죄 지은 자로 하여금 거기에 올라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워 불 속에 떨어지면 달기와 더불어 그것을 보고 크게 즐거워하고 이름하여 포락지형이라고 하였다.
 
淫虐이 甚하니 庶兄微子가 數諫하되 不從이거늘 去之하고 比干이 諫하여 三日을 不去하니 紂가 怒曰吾聞聖人之心에 有七竅라 하고 剖而觀其心하니 箕子가 佯狂爲奴거늘 紂가 囚之하니라
음란하고 사나움이 심하니 서형 미자가 여러 번 간했지만 띠르지 않으니 (버리고) 가고, 비간이 간하여 사흘 동안 가지 않으니 주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 개가 있다.”하고 그 심장을 갈라 보니 기자가 거짓 미친 체하여 노예가 되거늘 주가 그를 잡아가두었다.
 
周侯昌及九侯顎侯가 爲紂三公이더니 紂가 殺九侯거늘 顎侯가 爭하다가 幷脯之하니 昌이 聞而歎息이더니 紂가 囚昌羑里거늘 昌之臣散宜生이 求美女珍寶하여 進하다 紂가 大悅하여 乃釋昌하니라 昌이 退而修德하니 諸侯가 多叛紂歸之더라 /顎 나라이름 악, 羑인도할 유, 감옥이름 유,
주나라 제후인 창과 구후 및 악후가 주의 삼공(太師, 太傅, 太保)이 되었는데, 주가 구후를 죽이거늘 악후가 (주와) 다투다가 함께 포가 되니 창이 그것을 듣고 탄식하더니 주가 창을 유리의 옥에다 가두거늘 창의 신하 산의생이 미녀와 진귀한 보물을 구하여 (주에게) 바쳤다. 주가 크게 기뻐하여 이에 창을 풀어 주니라 창이 물러나와 덕을 닦으니 제후들이 많이들 주를 배반하고 (창에게) 돌아오더라.
 
昌이 卒하고 子發이 立하여 率諸侯代紂하니 紂가 敗于牧野하니 衣寶玉하고 自焚死하니 殷亡하니라 箕子가 後에 朝周할새 過故殷墟다가 傷宮室이 毁壞하여 生禾黍하고 欲哭不可요 欲泣則爲近婦人이라 하여 /墟옛터 허,
창이 죽고 그 아들 발이 서서 제후를 거느리고 주를 대신하니 주가 목야에서 패하여 보물과 옥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스스로 불속에 들어가 타 죽으니 은나라가 망하니라. 기자가 뒤에 주나라에 알현할 때 옛날 은나라의 폐허를 지나다가 궁궐이 허물어져서 곡식과 기장이 자란 것을 보고 상심하여 소리 내어 울려고 해도 안될 일이요 소리 없이 울려고 해도 곧 옆에 부인이 가까이 있어서
 
乃作麥秀之歌하니 曰麥秀蔪蔪兮여 禾黍油油로다 彼狡童兮여 不與我好兮라 하니 殷民이 聞之하고 皆流涕더라 殷爲天子三十一世에 六百四十四年이더라.
/蔪우거질 점,
이에 ‘맥수가’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보리이삭이 우거졌구나. 곡식과 기장이 기름지도다. 저 교활한 어린애(紂王)여 나와 더불어 좋지 않았구나.”라고 하였다. 은나라 백성들이 이 노래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은나라가 천자 노릇을 한 것이 31대에 644년 동안이었다.
 
■周
周武王은 姬姓이니 名은 發이요 后稷의 十六世孫也라. 后稷의 名은 棄니 棄의 母는 曰姜嫄이라 爲帝嚳의 元妃하야 出野다가 見巨人跡하고 心欣然踐之더니 生棄거늘 /嫄사람이름 원, 嚳고할 곡,
주나라 무왕은 성이 희씨이니 이름은 발이요 후직의 16세손이라. 후직의 이름은 기니 기의 어머니는 강원이라. 제곡의 원비가 되어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자취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그것을 밟았더니 기를 낳게 되었다.
 
以爲不祥이라 하여 棄之隘巷이더니 馬牛가 避不踐하고 置之平林이더니 適會林中에 多人하여 遷之하여 徙置寒氷하니 鳥가 覆翼之거늘 以爲神하여 遂收之하니라. /隘좁을 애, 覆뒤집힐 복, 덮을 복, 巷거리항
(이것을) 상서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좁은 골목에 그를 버렸더니 말과 소가 피하여 밟지 아니하고 평평한 수풀에 두었더니 마침 수풀 속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 그를 옮겨서 차가운 얼음 위에 두었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보호하거늘 신기하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그를 거두어 기르니라.
 
兒時에 屹如巨人之志하여 其游戱에 好種樹더니 及成人에 能相地之宜하여 敎民稼穡하고 興於陶唐과 虞夏之際하여 爲農師하여 封於邰하고 別其姓하여 號를 后稷이라 하다. /邰나라이름 태,
아이일 적에 우뚝 거인의 뜻과 같이 높아서 그 노는 것이 나무 심기를 좋아하더니 성인이 되기에 이르러 능히 땅의 마땅함을 살펴서 백성에게 농사짓기를 가르치고 도당(요임금)과 우(순임금)와 하나라(우임금) 때에 흥하여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을 맡아 태나라에 봉해지고 그 성을 따로 하여 후직이라 불렀다.
 
卒하고 子不窟이 立이더니 夏后氏政衰에 不窟이 失其官하고 奔戎狄之間하더니 不窟이 卒하고 子鞠이 立이더니 鞠이 卒하고 子公劉이 立에 復修后稷之業하여 務耕種하니 百姓이 懷之거늘 遷于豳하다. /鞠공국, 劉죽일 류, 豳나라이름빈)
(후직이) 죽고 아들 불굴이 섰더니 하후씨의 정사가 쇠퇴하니 불굴이 그 관직을 잃고 서북쪽 오랑캐 사이로 달아나 살더니 불굴이 죽고 아들 국이 섰다. 국이 죽고 그 아들 공류가 서서 다시 후직의 일을 맡게 되어 밭 갈고 씨 뿌리는 데 힘쓰니 백성들이 그를 품거늘 빈(섬서의 고을) 땅에 옮겨와서 살았다.
 
自公劉로 歷慶節, 皇僕, 參弗, 毁隃, 公非, 高圉, 亞圉, 公叔鉏하고 至古公亶父하여 獯鬻이 侵之거늘 去豳하고 渡漆沮 踰梁山하여 邑於岐山之下하여 居焉하니 豳人이 曰 仁人也라 不可失也라 하고 扶老携幼以從하니 他旁國이 皆歸之더라. /隃넘을유, 鉏호미서, 亶믿을 단, 父아비부, 사내보, 獯흉노훈, 鬻죽죽, 오랑캐육, 旁두루방, 옆방)
공유로부터 경절, 황복, 삼불, 훼유, 공비, 고어, 아어, 공숙서를 지나 고공단보에 이르러서 훈육(흉노족)이 침입하거늘 빈 고을을 떠나 칠저를 건너 양산을 넘어서 기산 아래에 고을을 이루어 사니 빈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공단보는) 어진 사람이다. 잃어버릴 수 없다.”하고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따라오니 다른 옆의 나라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더라.
 
古公의 長子는 太伯이고 次는 虞仲이며 其妃는 太姜이니 生少子季歷이더니 季歷이 娶太任하여 生昌하여 有聖德이거늘 太伯과 虞仲은 知古公이 欲立季歷하여 以傳昌하고 乃如荊蠻하여 斷髮文身하여 以讓季歷하니라. /荊가시나무형
고공단보의 장자는 태백이고 다음은 우중이며 그 아내는 태강이니 작은 아들 계력을 낳았다. 계력이 태임에게 장가들어 창을 낳아서 성스러운 덕이 있거늘 태백과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서 창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하는 뜻을 알고 이에 남쪽 오랑캐가 사는 미개척지로 가서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여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니라.
 
古公이 卒하고 公季가 立하더니 公季가 卒하고 昌이 立에 爲西伯하니라. 西伯이 修德하니 諸侯가 歸之더라. 虞芮爭田不能決하여 乃如周러니 入界할새 見耕者가 皆遜畔하며 民俗이 皆讓長이거늘 /芮풀 뾰족뾰족 날 예,
고공이 죽고 공계가 섰더니 공계가 죽고 창이 서서 서백(서쪽 제후의 우두머리)이 되었다. 서백이 덕을 닦으니 제후들이 귀순하더라. 우와 예가 땅을 다투어 결정을 보지 못하여 이에 주나라에 갔더니 (주나라) 경계에 들어가니 밭가는 사람이 모두 밭두둑을 양보하며 백성의 풍속이 모두 (나이 든) 어른에게 양보하거늘
 
二人이 慙하여 相謂曰吾所爭은 周人所恥라 하고 乃不見西伯而還하여 俱讓其田不取하니 漢南에 歸西伯者四十國이 皆以爲受命之君이라 하여 三分天下에 有其二하니라.
(우와 예) 두 사람이 부끄러워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다투는 바는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 할 것이라.” 하고 이에 서백을 (찾아) 보지 않고 돌아가서 함께 그 밭을 양보하여 취하지 아니하니, 한수 남쪽에 서백에게 귀속된 것이 마흔 개 나라인데 모두 (서백의) 명령을 받는 임금이 되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둘을 가졌다고 하더라.
 
有呂尙者하니 東海上人이라 窮困年老하여 漁釣至周이러니 西伯이 將獵할새 卜之曰 非龍 非彲 非熊 非羆 非虎 非貔이요 所獲은 覇王之輔이라 하더니 果遇呂尙於渭水之陽하여 與語大悅曰 自吾先君太公으로 曰當有聖人이 適周하여 周因以興이라 하더니 /彲이무기리, 羆큰곰비, 貔비휴비,
여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동햇가의 사람이라. 가난하고 나이가 많아 고기를 낚으며 주나라에 이르렀더니, 서백(문왕)이 장차 사냥을 나가려 할 때 점을 치니 이르되,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고 곰도 아니고 큰 곰도 아니고 범도 아니고 비휴(범과 비슷한 맹수)도 아니며, 잡을 것은 패왕을 도울 것이라 하더니, 과연 여상을 위수 북쪽에서 만나 이야기를 해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아버지 임금께서 이르시되 마땅히 성인이 있어 주나라에 와서 이로 인해 주나라가 흥할 것이라 하시더니
 
子眞是耶 曰吾太公이 望子이 久矣라 하여 故로 號曰 太公望이라 하고 載與俱歸하여 立爲師하고 謂之師尙父라 하다. 西伯이 卒하고 子發이 立하니 是爲武王이라. 率修西伯緖業十三年에 諸侯不期而會者八百이 皆曰 紂를 可伐矣라 하거늘 王이 不可라 하니 引歸러니 紂이 不悛이거늘 王이 乃伐之하다.
그대가 참으로 그인가. 가로되 우리 태공(아버지)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라 하고 그리하여 부르기를 태공망이라 하며 (수레에) 싣고 함께 돌아가서 스승으로 세워서 이르기를 사상보라 하였다. 서백이 죽고 아들 발이 서니 이가 무왕이 되었다. 서백이 물려준 왕업을 좇아 닦은 지 13년에 제후들이 기약하지 않고 모인 사람이 팔백 명이라. 모두 말하기를 주(紂)임금을 쳐야한다고 하거늘 왕이 안 된다고 하니 (제후들이) 끌고 돌아갔더니 주(紂)임금이 고치지 않거늘 왕이 이에 정벌하였다.
 
伯夷 叔齊 叩馬而諫하니 左右가 欲兵之거늘 太公이 曰 義人也라 하고 扶而去之하니라 王이 旣滅殷爲天子에 追尊古公爲太王하고 公季爲王季하고 西伯爲文王하고 火德으로 王하여 以子月로 爲歲首하다. /叩두드릴 고,
백이와 숙제가 말을 두드리며 간하니 좌우(신하)가 죽이려하거늘 태공이 말하기를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하고 부축해 돌려보내니라. 왕(무왕)이 이미 은나라를 멸하고 천자가 되어 고공단보를 추존하여 태왕으로 하고 공계를 왕계로 하고 서백을 문왕으로 하고 불의 덕으로 왕 노릇을 하여 자월(간지로 첫째 달)로 한 해의 처음으로 하였다.
 
天下가 宗周하되 而伯夷 叔齊 恥之하여 義不食周粟이라 하고 隱於首陽山하여 作歌曰 登彼西山兮여 採其薇矣로다 以暴易暴兮여 不知其非矣로다 神農虞夏이 忽焉沒兮여 我安適歸矣오 于嗟殂兮여 命之衰矣라 하고 遂餓而死하니라.
천하가 주나라를 근본으로 떠받들되 백이와 숙제가 이것을 부끄러워하여 의리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으려 하고 수양산에 숨어살면서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저 서쪽 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캐는구나.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으니 어느 것이 그른지 알 수 없구나. 신농씨와 순임금과 하나라는 홀연히 사라짐이여. 나는 어디로 돌아가리오. 아아, 죽음에 이르렀구나. 목숨이 다하였도다. 하고 마침내 굶어 죽었다.
 
武王이 崩하고 太子 誦이 立하니 是爲成王이라 成王이 幼하니 周公이 位冢宰攝政이더니 管叔 蔡叔이 流言曰 公將不利於孺子라 하고 與武庚으로 作亂하니 武庚者는 武王의 所立紂子祿父이니 爲殷後者也라 周公이 東征하여 誅武庚 管叔하고 放蔡叔이더니 王이 長에 周公이 歸政하니라. /攝잡을 섭, 孺젖먹이유, 庚천간 경,
무왕이 죽고 태자 송이 서니 이가 성왕이 되니라. 성왕이 어리니 주공이 총재의 자리를 맡아 섭정하더니, 관숙과 채숙이 근거 없는 말을 퍼트려 이르기를 주공은 장차 젖먹이에게 이롭지 않다고 하고 무경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니, 무경이라는 사람은 무왕이 세운 紂왕의 아들 녹보이니 은나라의 후사를 위한 사람이라.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하여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하였더니 성왕이 자라니 주공이 정사를 돌려 주니라.
 
初에 武王이 作鎬京하고 謂之宗周이라 하니 是爲西都요 將營洛邑이다가 未果러니 王이 欲如武王之志하실새 召公이 遂相宅하고 周公이 至洛하여 築王城하시니 是爲東都이라 以洛爲天下中하니 四方入貢에 道里均也라.
처음에 무왕이 호경을 짓고 주나라의 서울이라 이르니 이것이 서도(서쪽 서울)가 되고 장차 낙읍을 경영하다가 이루지 못했더니 왕(성왕)이 무왕의 뜻과 같이 하고자 했는데, 소공이 마침내 집(궁궐) 지을 데를 보고 주공이 낙읍에 이르러 왕성을 쌓으니 이것이 동도(동쪽 서울)라 낙읍으로 천하의 중심을 삼으니 사방에서 조공을 들임에 길의 거리(길이)가 비슷하더라.
 
王은 居西都而朝會諸侯於東都하고 周公召公이 相成王爲左右하여 自陝以西는 召公이 主之하고 自陝以東은 周公이 主之하다. /陝고을이름섬,
왕(성왕)은 서도에 머물며 (이따금) 동도에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고 주공과 소공이 도와서 성왕의 좌우가 되어 섬서(山西省)의 서쪽으로는 소공이 주관하고 섬서의 동쪽으로는 주공이 주관하였다.
 
交趾南에 有越裳하여 重三譯而來하여 獻白雉曰 吾는 受命國之黃耈러니 天無烈風淫雨하고 海不揚波三年矣라 意者中國에 有聖人乎인저 周公이 歸之王하고 薦于宗廟하다.
교지(베트남)의 남쪽에 월상(부족국가 이름)이 있어서 세 번 통역을 거듭하여 와서 흰 꿩을 드려 이르기를, “내가 나라의 황구(제일 늙은 사람)에게서 명을 받으니 하늘에 사나운 바람과 어지러운 비가 없고 바다에 물결이 일지 아니한지 3년이라 뜻하건대 중국에 성인이 있을 진저.”하거늘, 주공이 성왕께로 보내서 (흰 꿩을) 종묘에 바치게 하였다.
 
使者가 迷失路거늘 周公이 錫以軿車五乘하니 皆爲指南之制더라 使者가 載之하고 由扶南林邑海際하여 期年而至國 故로 指南車嘗爲先導하여 示服遠人而征四方하다. /軿가벼운 수레 병,
사신이 (돌아갈 때) 헤매어 길을 잃거늘 주공이 가벼운 수레 다섯 대를 주니, 모두 남쪽을 가리키는 장치를 한 것이더라. 사신이 그것(지남철)을 싣고 부남과 임읍을 거쳐 바닷가에 이르러 일 년 만에 그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지남차가 일찍이 선도하여 먼 곳 사람을 복속시키고 사방을 정복할 것을 보여주었다.
 
成王이 崩하고 子康王釗立하니 成康之際에 天下安寧하여 刑錯四十餘年不用이더라 康王이 崩하여 子昭王暇立하니 昭王이 南巡狩하여 至楚더니 以膠舟로 載之하여 溺不返하니라. /釗사람이름쇠,
성왕이 죽고 아들 강왕 쇠가 즉위하니 성왕과 강왕의 시대에는 천하가 평안하여 형벌을 두어서 40여년을 쓰지 않았더라. 강왕이 죽고 아들 소왕 가가 즉위하니 소왕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초 지방에 이르렀더니 아교로 붙여 만든 배를 타고 물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였다.
 
子穆王滿이 立하니 有造父者하여 以善御로 幸於王하여 得八駿馬하여 遊行天下하여 將皆有車轍馬迹이더라 王이 西巡하여 樂而忘返이러니 徐子가 乘時作亂이거늘 造父가 御王長驅하여 歸救亂하고 命楚하여 討徐誅之하다. /父아비 부, 사람이름보,
아들 목왕 만이 즉위하니 조보라는 사람이 말을 잘 몰아서 왕에게 총애를 받더니 여덟 준마를 얻어 천하를 돌아다녀서 장차 수레바퀴 자국과 말발굽 자취를 온 천하에 남기려 하더라. 왕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즐기며 돌아오기를 잊었더니 서나라 제후가 때를 타서 반란을 일으키거늘 조보가 임금의 수레를 밤낮으로 몰아 달려서 돌아와 난을 구하고 초나라를 명하여 서 나라를 쳐서 죽이게 하였다.
 
王이 將征犬戎이거늘 祭公謀父가 諫曰 先王이 耀德하고 不觀兵이라 하되 王이 不聽하고 征之하여 得四白狼四白鹿以歸하니 自是로 荒服이 不至하고 諸侯가 不穆하더라.
왕이 장차 견융(오랑캐)을 정벌하려 하거늘 제나라 공작 모보가 간하여 말하기를, “선왕은 덕이 빛났으나 군대를 관병하지 않았습니다.”라 하되, 왕이 듣지 않고 정벌하여 네 마리 흰 이리와 네 마리 흰 사슴을 얻어서 돌아오니 이로부터 먼 변방의 복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제후들이 화목하지 않게 되었다.
 
穆王이 崩하고 子共王繄扈가 立하여 崩하고 子懿王囏이 立하여 崩하고 弟孝王辟方이 立하여 崩하고 子夷王燮이 立하여 下堂而見諸侯하니 楚始僭稱王하다. /繄(창전대예) 囏고생살이간,
목왕이 죽고 아들 공왕 예호가 즉위하여 죽고, 아들 의왕 간이 즉위하여 죽고, 아우 효왕 벽방이 즉위하여 죽고, 아들 이왕 섭이 즉위하여 당에서 내려가 제후들을 만나니 초나라가 처음 참람되이 왕이라고 일컬었다.
 
夷王이 崩하고 子厲王胡가 立하니 無道하여 暴虐侈傲하고 得衛巫하여 監國人之謗者하여 以告則殺之하니 道路以目이라 王이 喜曰 吾能弭謗矣라 하니 或이 曰 是는 障也라 防民之口는 甚於防川하니 水壅而潰면 傷人이 必多라 하되 王이 弗聽이라. /厲갈 려, 弭(활고자 미)그칠미
이왕이 죽고 아들 여왕 호가 즉위하니 무도하여 포학 사치 거만하고 위무라는 자를 얻어 국민 중에 비방하는 사람을 감시하여 보고하면 곧 죽이니 길에 눈이 있듯이 하더라.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능히 비방을 그치게 하였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막는 것이라.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심하니 물을 막는 둑이 무너지면 사람을 상하는 것이 반드시 많으리라” 하되 왕이 듣지 않았다.
 
於是에 國人이 相與畔하니 王이 出奔彘하고 二相周召이 共理國事하여 號曰共和者가 十四年而王이 崩于彘하다 子宣王靖이 立하여 任賢使能할새 有召穆公 方叔 尹吉甫 仲山甫等이 爲政於內外하여 王化가 復行하니 周室이 中興焉이더라. /靖편안할 정,
이에 나라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배반하니 왕이 체 땅으로 달아나고 두 재상 주공과 소공이(주공 단과 소공 석이 아님) 함께 국사를 다스려서 이름하여 공화라고 부른 것이 14년이 되어 왕이 체에서 죽었다. 아들 선왕 정이 즉위하여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시켰는데 소목공과 방숙과 윤길보와 중산보 등이 안팎에서 정사를 돌보아서 왕의 교화가 다시 행해지니 주나라 왕실이 중흥하였다.
 
崩하고 子幽王宮涅이 立하다 初에 夏后之世에 有二龍이 降于庭하여 曰 予는 褒之二君이라 하니 卜藏其漦하고 歷夏殷莫敢發이더니 周人이 發之하니 漦化爲黿이라 童女가 遇之而孕하여 生女棄之더니 /涅개흙열,앙금흙날, 漦흐를시, 침시, 黿자라 원, 褒(기릴 포)
(선왕이) 죽고 아들 유왕 궁열이 즉위하다. 처음에 하후 시절에 두 마리 용이 뜰에 내려와 말하기를, “나는 포 땅의 두 임금이라” 하니, 점을 쳐서 그 침을 감추었는데 하나라 은나라를 지날 때는 감히 드러나지 못하다가 주나라 사람이 그것을 드러내니 침이 변하여 자라가 된지라 어린 여자가 그것을 만나 임신하여 딸을 낳아 버렸더니
 
宣王時에 有童謠하니 曰 檿弧箕服이 實亡周國이라 하더니 適有鬻是器者어늘 宣王이 使人執之하니 其人이 逃라가 於道에 見棄女하고 哀其夜號而收之하여 逸於褒이더니 至是하여 褒人이 有罪어늘 入是女於王하니 是爲褒姒라 王이 嬖之하다. /檿산뽕나무염, 服옷복, 화살집복, 姒언니사, 嬖사랑할 폐)
선왕 때에 동요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산뽕나무 활과 대나무 화살통이 실제로 주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하더니 마침 이 기구(활과 화살 통)를 파는 자가 있어 선왕이 사람을 시켜 잡으려 하니 그 사람이 도망하다가 길에서 버려진 여자를 보고 밤에 울고 다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거두어 포 땅으로 달아났더니 이에 이르러 포 사람이 죄가 있어 왕에게 그 여인을 들여보내니 이가 포사라. 왕이 그녀를 사랑했다.
 
褒姒이 不好笑하니 王이 欲其笑萬方하되 故不笑라 王이 與諸侯로 約하되 有寇至則擧烽火하여 召其兵來援이러니 乃無故擧火하니 諸侯가 悉至而無寇라 褒姒이 大笑하니 /烽봉화 봉
포사가 웃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왕이 그녀를 웃기려고 갖가지 방법을 쓰되 그녀는 일부러 웃지 않더라. 왕이 제후와 더불어 약속하되 외적이 이르면 봉화를 올려 군사를 불러 원병이 오기로 했는데, 이에 까닭 없이 봉화를 올리니 제후들이 모두 이르렀지만 외적이 침입치 않은지라 포사가 크게 웃더니
 
王이 乃廢申后及其子宜臼하고 以褒姒로 爲后하고 其子伯服으로 爲太子하니 宜臼가 奔申이더니 王이 求殺之라가 弗得하고 伐申하니 申侯가 召犬戎寇宗周거늘 王이 擧烽火하여 徵兵하되 不至하니 犬戎이 弑王驪山下하다. /驪가라말려, 鄧(나라 이름 등)
왕이 신후와 그 아들 의구를 폐하고 포사로 왕후를 삼고 그 아들 백복으로 태자를 삼으니 의구가 신나라(鄧州)로 달아나더니 왕이 그를 죽이기를 요구하다가 되지 않자 신나라를 정벌하니 신나라 임금이 오랑캐를 불러 주군의 나라인 주나라를 침범하거늘 왕이 봉화를 올려 군사를 불렀지만 오지 아니하니 오랑캐가 여산(華州) 아래에서 왕을 죽였다.
 
諸侯가 立宜臼하니 是爲平王이라 以西都가 逼於戎으로 徙居東都王城하다. 時에 周室이 衰微하고 諸侯가 强幷弱하여 齊楚秦晉이 始大하니라. 平王之四十九年은 卽魯隱公之元年이라 其後에 孔子가 修春秋始此하니라.
제후들이 의구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평왕이 되니라. 서쪽의 도읍이 오랑캐와 가까워서 (도읍을) 옮겨 동쪽 도읍의 왕성에 살았다. 그때에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여 힘이 약해지고 제후들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병탄하여 제나라와 초나라와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처음으로 커지니라. 평왕 49년은 곧 노나라 은공 원년이라 그 후에 공자가 춘추를 여기에서부터 (기록하기) 시작하니라.
 
平王이 崩하고 太子之子 桓王林이 立이더니 崩하고 子莊王佗가 立이더니 崩하고 子釐王胡齊가 立하니 齊桓公이 始覇하다. 釐王이 崩하고 子惠王閬이 立이더니 崩하고 子襄王鄭이 立하니 晉文公이 始覇하니라. /佗다를타, 閬솟을 대문랑
평왕이 죽고 태자의 아들 환왕 림이 섰더니 죽고 아들 장왕 타가 섰더니 죽고 아들 리왕 호제가 서니 제나라 환공이 비로소 패자(覇者)가 되었다. 리왕이 죽고 아들 혜왕 랑이 섰더니 죽고 아들 양왕 정이 서니 진나라 문공이 비로소 패자가 되니라.
 
襄王이 崩하고 子頃王壬臣이 立이더니 崩하고 子匡王班이 立이더니 崩하고 弟定王瑜가 立하니 楚莊王이 使人으로 問鼎輕重이거늘 王孫滿이 郤之하다. 定王이 崩하고 子簡王이 立하니 吳始僭稱王하다. 簡王이 崩하고 子靈王泄心이 立하니 孔子가 生於其時하니라. /頃밭고랑 경, 瑜아름다운옥유, 泄샐설
양왕이 죽고 아들 경왕 임신이 섰더니 죽고 아들 광왕 반이 섰더니 죽고 아우 정왕 유가 서니 초장왕이 사람을 시켜 (주나라 왕실) 솥의 가볍고 무거움을 묻거늘 왕손만이 이를 물리치다. 정왕이 죽고 아들 간왕이 서니 오나라가 비로소 참람하게 왕이라 일컬었다. 간왕이 죽고 아들 영왕 설심이 서니 공자가 이때에 태어나니라.
 
靈王이 崩하고 子景王貴가 立이더니 崩하고 子悼王猛이 立이더니 庶弟子朝가 弑之거늘 晉人이 討子朝而立敬王丏하니 孔子卒于其時하니라. 敬王이 崩하고 子元王仁이 立이더니 崩하고 子貞定王介가 立이더니 崩하고 子哀王去疾이 立이더니 弟思王叔帶가 襲弑之而自立이더니 少弟考王嵬가 又攻殺思王而自立하니라. /丏가릴 면, 介끼일 개, 嵬높을 외,
영왕이 죽고 아들 경왕 귀가 섰더니 죽고 아들 도왕 맹이 섰더니 서제 자조가 그를 죽이거늘 진나라 사람이 자조를 토벌하고 경왕 면을 세우니 공자가 이 때에 죽으니라. 경왕이 죽고 아들 원왕 인이 섰더니 죽고 아들 정정왕 개가 섰더니 죽고 아들 애왕 거질이 섰더니 아우 사왕 숙대가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니 작은 아우 고왕 외가 또 사왕을 쳐서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니라.
 
崩하고 子威烈王午가 立하니 晉趙氏魏氏韓氏始侯하다. 周自東遷以來로 及是二十世而愈微하고 諸侯가 用兵爭强하여 號爲戰國이라 其後에 司馬氏作資治通鑑하고 朱子가 修綱目始此하니라.
(고왕이) 죽고 아들 위열왕 오가 서니 조나라의 조씨와 위씨와 한씨가 (진나라를 나누어) 비로소 제후가 되었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옮겨온 이래로 20대에 미치니 더욱 쇠미해지고 제후들이 군대를 써서 강성함을 다투니 이를 전국시대라 불렀다. 뒤에 (송나라)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짓고 주자가 (통감)강목을 편찬할 때 여기에서 시작하니라.
 
威烈王이 崩하고 子安王驕가 立하니 齊田氏始侯하다. 安王이 崩하고 子烈王喜立하더니 崩하고 弟顯王扁이 立하니 諸侯가 皆僭稱王하다. 顯王이 崩하고 子愼靚王定이 立이더니 崩하고 子赧王延이 立하여 /扁넓적할 편, 靚단장할 정, 赧얼굴 붉힐 난,
위열왕이 죽고 아들 안왕 교가 서니 제나라의 전씨가 비로소 제후가 되었다. 안왕이 죽고 아들 열왕 희가 섰더니 죽고 아우 현왕 편이 서니 제후가 모두 참람하게 왕이라고 칭했다. 현왕이 죽고 아들 신정왕 정이 섰더니 죽고 아들 난왕 연이 섰다.
 
五十九年에 與諸侯로 約從攻秦이더니 秦昭王이 攻周하니 赧王이 入秦하여 頓首受罪하고 盡獻其邑하니 秦이 受獻而歸赧王於周以卒하니 周爲天子三十七世에 凡八百六十七年이더라. /昭밝을소, 頓조아릴 돈,
(난왕) 59년에 제후와 더불어 합종책을 맺고 진나라를 공격했더니 진나라 소왕이 주나라를 공격하였다. 난왕이 진나라에 (잡혀)들어가 머리를 조아리고 죄책을 받고 그 다스리던 고을을 모두 바치니 진나라가 그것을 받고 난왕을 주나라로 돌려보내어 (돌아와서) 죽었다. 주나라가 천자로 군림한 것이 38대에 모두 867년이 되었다.
 
■春秋戰國
춘추전국 (주나라 평왕 이후를 춘추, 주 위열왕 이후를 전국이라고 함)
 
吳는 姬姓이니 泰伯 仲雍之所封也라 十九世에 至壽夢하여 始稱王하니라 壽夢四子에 幼曰季札이라 札이 賢하니 欲使三子로 相繼立하여 以及札이러니 札이 義不可라 한데 封延陵하고 號曰延陵季子라 하다. /雍누그러질옹, 札패찰,
오나라는 성이 희씨이니 태백과 (그 아우) 중옹을 봉한 곳이다. 19대에 수몽에 이르러 비로소 왕이라 칭했다. 수몽의 네 아들 중에 어린 막내가 계찰인데, 계찰이 어지니 세 아들로 하여금 서로 이어 즉위하고 계찰에 미치게 하고자 하더니, 계찰이 옳지 않다고 하니 연릉에 봉하고 연릉계자라고 불렀다.
 
聘上國할새 過徐하더니 徐君이 愛其寶劒이거늘 季子가 心知之러니 使還에 徐君이 已沒이라 遂解劒하여 懸其墓而去하다. 壽夢後四君而至闔廬하여 擧伍員하여 謀國事하니라. /聘찾아갈 빙, 闔문짝합, 廬오두막 려, 伍성오,
(계찰이) 상국에 사신으로 갈 때 서나라를 지나가더니 서나라 임금이 그의 보검을 사랑하거늘 계찰이 마음속으로 그것을 알고, 사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서나라 임금이 이미 죽었으므로, 마침내 칼을 풀어 그의 무덤에 매달아 놓고 갔다. 수몽 뒤에 네 임금을 지나고 합려에 이르러 오원을 기용하여 국사를 꾀하게 하였다.
 
員의 字는 子胥이니 楚人伍奢之子라 奢가 誅而奔吳하여 以吳兵으로 入郢하고 吳가 伐越하다가 闔廬가 傷而死하고 子夫差가 立에 子胥가 復事之하니라.
/郢땅이름영,
원의 자는 자서이니 초나라 사람 오사의 (둘째) 아들이라. (오사가) 죽임을 당하고 (오원이) 오나라로 도망해 와서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영(초나라 도읍)에 쳐들어갔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치다가 합려가 부상을 당해 죽고 아들 부차가 즉위함에 오자서가 다시 그를 섬겼다.
 
夫差이 志復讎하여 朝夕에 臥薪中하고 出入에 使人呼曰 夫差야 而忘越人之殺而父耶하더니 周敬王二十六年에 夫差가 敗越于夫椒하니 越王句踐이 以餘兵으로 棲會稽山하여 請爲臣 妻爲妾하니 子胥가 言不可하되 太宰伯嚭受越賂하고 說夫差赦越하니 /椒산초나무 초, 嚭클비
부차가 복수하기를 뜻하여 아침저녁에 섶나무 가운데 눕고 나가고 들어올 때 사람들로 하여금 “부차야 월나라 사람이 네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하였다. 주나라 경왕 26년에 부차가 월나라를 부초에서 패퇴시키니 월왕 구천이 남은 군사로 회계산에 머무르며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부차의) 첩이 되기를 청하니 오자서가 안 된다고 말했지만 태재 백비가 월나라 뇌물을 받아먹고 부차에게 월나라를 용서하라고 설득하였다.
 
句踐이 反國하여 懸膽於坐하고 臥卽仰膽嘗之曰女가 忘會稽之恥耶하고 擧國政하여 屬大夫種而與范蠡로 共治兵事하여 謀吳이더라 太宰嚭譖하니 子胥가 恥謀不用하여 怨望이라 /范풀이름 범, 성범, 蠡좀먹을여, 譖참소할 참
구천이 나라에 돌아와서 쓸개를 자리에 걸어놓고 누우면 곧 우러러 쓸개를 맛보다가 말하기를 “네가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라고 하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대부 종과 범여에게 맡겨 함께 군사 일을 다스리게 하여 오나라를 도모하고자 하더라. 태재 비가 참소하니 오자서는 자신의 꾀가 쓰이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원망하였다.
 
夫差가 乃賜子胥屬鏤之劒한데 子胥가 告其家人曰 必樹吾墓檟이라가 檟可材也거든 抉吾目하여 懸東門하여 以觀越兵之滅吳라 하고 乃自剄하니 夫差取其尸하여 盛以鴟夷하여 投之江하니 吳人이 憐之하여 立祠江上하고 命曰胥山이라 하다 /鏤새길루, 檟개오동나무가, 鴟올빼미치,
부차가 이에 자서에게 (자결하라고) 촉루라는 칼을 주니 자서가 그 가인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내 묘 옆에 개오동나무를 심었다가 가히 재목으로 쓸 만하거든 내 눈을 도려내서 (성의) 동문에 매달아서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하고 스스로 목을 베니 부차가 그 시체를 취하여 말가죽 주머니(鴟夷)에 담아서 강에 던졌다. 오나라 사람이 가엽게 생각하여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그 산을 서산이라고 명명하였다.
 
越이 十年生聚하고 十年敎訓하여 周元王四年에 越이 伐吳하니 吳가 三戰三北거늘 夫差上姑蘇하여 亦請成於越하니 范蠡가 不可라 한데 夫差曰 吾가 無以見子胥라하고 爲幎冒하고 乃死라 /蘇소생할소, 幎덮을멱, 冒덮을모,
월나라가 십년 동안 백성을 살리고 재물을 모으며, 십년 동안 가르쳐서 주나라 원왕 4년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치니 오나라가 세 번 싸워 세 번을 지거늘 부차가 고소산에 올라가 또한 월나라에 화친하기를 청하니 범여가 안 된다고 하였다. 부차가 “나는 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 라고 하고 (명주) 얼굴 덮개를 하고 죽었다.
 
越旣滅吳에 范蠡가 去之할새 遺大夫種書曰 越王의 爲人이 長頸烏喙라 可與共患難이요 不可與共安樂이니 子何不去오 種이 稱疾不朝이러니 或이 讒種且作亂하니 賜劒死라 하니라 /蠡(좀먹을 려{여})
월나라가 이미 오나라를 멸하니 범여가 떠나가면서 대부 종에게 글을 써서 주기를, “월왕은 생김새가 목이 길고 까마귀 부리처럼 생겼으므로 가히 함께 환난을 겪을 수는 있으나 함께 안락함을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니 그대는 어찌하여 가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대부 종이 병들었다고 핑계하고 조회에 나가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종을 참소하고 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니 칼을 주어 죽게 했다.
 
范蠡가 裝其輕寶珠玉하고 與私從으로 乘舟江湖하고 浮海出齊하여 變姓名하여 自謂鴟夷子皮라 하고 父子가 治産하여 至數千萬하니 齊人이 聞其賢하고 以爲相하니 蠡가 喟然曰居家에 致千金하고 居官에 致卿相하니 此는 布衣之極也라 久受尊名이 不祥이라 하고
범려가 가벼운 보배와 주옥을 챙겨서 자기 종과 함께 강과 호수에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제나라로 탈출하여 성명을 바꾸어 스스로 치이자피(말가죽에 담길 죄인)라 하고 부자가 치산하여 수천만금에 이르니 제나라 사람들이 그 어짊을 듣고 재상으로 삼았다. 범여가 한숨 쉬며 말하기를, “집안에 있으면 천금을 모으고 벼슬길에 있으면 경상에 이르니 이것은 일반 백성으로서 극치라 오래 높은 이름을 누리는 것이 상서롭지 않다.”라고 하였다.
 
乃歸相印하고 盡散其財하고 懷重寶間行止於陶하여 自謂陶朱公이라 하고 貲累鉅萬이러니 魯人猗頓이 往問術焉하니 蠡가 曰畜五牸하라 乃大畜牛羊於猗氏하여 十年間에 貲擬王公故로 天下가 言富者에 稱陶朱猗頓이더라. /猗(아름다울 의)아! 擬비길 의, 牸(암컷 자)암소자
이에 재상의 도장을 돌려주고 그 재물을 다 흩어버리고 귀중한 보물만을 품고 샛길로 도 지방에 이르러 스스로 도주공이라 말하고 억만금의 재물을 모았더니 노나라 사람 의돈이 찾아가서 그 (재물 모으는) 방법을 물으니 범여가 말하기를, “다섯 마리 암소를 기르라.”하고 이에 의씨(의돈)에게 크게 소와 양을 기르게 하여 십년 사이에 재물이 왕공에게 비길 만한 고로 온 천하가 부자를 말할 때는 도주와 의돈을 일컬었다.
 
蔡는 姬姓이니 蔡仲之所封也라 周公이 放蔡叔於郭鄰이더니 其子胡가 率德改行이거늘 復封于蔡더니 後世에 至春秋之末하여 爲楚惠王의 所滅하니라.
채나라는 성이 희이니 채중의 봉한 바라. 주공이 채숙을 곽린에 추방하였더니 그 아들 호가 덕을 좇아 행동을 바꾸거늘 다시 채에 봉하였더니 후세에 춘추시대 말엽에 이르러 초나라 혜왕에게 멸망당하였다.
 
曹는 姬姓이니 武王이 弟曹叔振鐸之所封也라 其後世에 至春秋中하여 爲宋所滅하니라
조나라는 성이 희이니 무왕이 아우 조숙 진택의 봉한 바라. 그 후세에 춘추시대 중엽에 이르러 송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宋은 子姓이니 商紂의 庶兄微子啓之所封也라 後世에 至春秋하여 有襄公玆父者가 欲覇諸侯하여 與楚戰할 새 公子目夷請及其未陣擊之하니 公이 曰君子는 不困人於阨이라 하고 遂爲楚所敗하니 世笑以爲宋襄之仁이라 하더라 /阨좁을 액
송나라는 성이 자이니 상나라 주왕의 서형인 미자 계의 봉한 바라. 후세에 춘추시대에 이르러 양공 자부라는 사람이 있어 제후들에게 패권을 갖고자 하여 초나라와 전쟁을 할 새 공자 목이가 그들(초나라)이 진을 치기 전에 칠 것을 청하니 양공이 말하기를, “군자는 액운에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라 하고, 마침내 초나라에게 패한 바 되니 세상 사람들이 비웃어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라고 하더라.
 
其後에 有景公者하여 熒惑이 嘗以其時로 守心하니 心은 宋之分野라 公이 憂之더니 司星子韋曰可移於相이라 한데 公曰相은 吾之股肱이니라 曰可移於民이니이다 公曰 君者는 待民이니라 曰可移於歲니이다 公이 曰歲饑民困이면 吾誰爲君이리오 子韋曰天高聽卑하나니 君有君人之言이 三하니 宜有動하리이다 候之하니 果徙一度이더라 /熒빛날 형, 肱팔뚝 굉,
그 후에 경공이라는 사람이 있어 형혹(재앙을 예시하는 혜성)이 일찍 그 때 심방(방위)에 나타났다. 심방은 송나라 지역이라 경공이 근심하더니 천문을 맡은 자위가 말하기를, “(재앙을) 재상에게 옮길까요.”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 “재상은 나의 팔다리이니라.”라고 했다. 자위가 말하기를, “(재앙을) 백성에게 옮길까요.”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 “임금이란 사람은 백성에게 의지하니라.”라고 했다. 자위가 말하기를, “한 해에 옮길까요.”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 “한 해가 흉년이 들고 백성이 괴로우면 내가 누구의 임금이 되리요.” 라고 했다. 자위가 말하기를, “하늘이 높아도 낮은 것을 듣나니 임금에게 임금과 신하가 주고받은 세 마디 말이 있으니 반드시 (하늘이) 감동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금 기다리니 과연 (혜성이) 일도를 옮겨갔다.
 
歷數世至康王偃하여 有雀이 生鸇거늘 占之하니 曰必覇天下라 하니 偃이 喜하여 敗齊, 楚, 魏하여 與爲敵國하고 偃이 淫虐하니 天下가 號之曰桀宋이라 하더니 赧王時에 齊湣王이 與楚, 魏로 共伐宋하여 滅之하고 而分其地하니라
/鸇새매전, 湣임금이름 민, 赧(얼굴 붉힐 난)
여러 해가 지나 강왕 언에 이르러 참새가 새매를 낳거늘 점을 쳐 보니 이르되 ‘반드시 천하의 패권을 잡으리라’ 하니 언이 기뻐하여 제나라와 초나라와 위나라를 깨뜨리어 그들과 원수의 나라가 되고, 언이 음란하고 포학하여 천하 사람들이 송나라 걸왕이라 하더니 주나라 난왕 때에 제나라 민왕이 초나라와 위나라와 암께 송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었다.
 
魯는 姬姓이니 周公의 子伯禽之所封也이라 周公이 誨成王할새 王이 有過則撻伯禽이러니 伯禽이 就封할새 公이 戒之曰 我는 文王之子요 武王之弟요 今王之叔父이라 然이나 我는 一沐에 三握髮하고 一飯에 三吐哺하여 起以待士하되 猶恐失天下賢人하니 汝가 之魯어든 愼無以國驕人하라
노나라는 성이 희이니 주공의 아들 백금에게 봉한 바라. 주공이 성왕을 가르칠 때 성왕에게 잘못이 있으면 백금을 때리더니 백금이 봉토로 나아갈 때 주공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문왕의 아들이요 무왕의 아우요, 지금 왕의 숙부라. 그러나 나는 한번 머리감을 때 (손님을 맞고자) 세 번 머리칼을 쥐고, 한 끼 밥을 먹을 때 (손님을 맞느라고) 세 번 먹던 것을 토하여 일어나 선비를 대접하되 오히려 천하의 현인을 잃을까 두려워하였으니, 네가 노나라에 가거든 조심하여 나라로써 사람에게 교만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
 
太公은 封於齊하여 五月而報政하니 周公이 曰何疾也오 曰吾가 簡其君臣禮하야 從其俗이라 하고 伯禽은 至魯하여 三年而報政하니 周公이 曰何遲也오 曰變其俗하며 革其禮하여 喪三年而後에 除之니이다 周公이 曰後世에 其北面事齊乎인저 夫政은 不簡不易면 民不能近하고 平易면 近民하여 民必歸之니라
(강)태공은 제나라에 봉하여 다섯 달 만에 정사를 보고하니 주공이 말하기를 ‘어찌 이리 빠른가?’ 하니 (태공이) 말하기를 ‘군신의 예절을 간단히 하고 그 풍속을 따랐다.’고 하였다. 백금은 노나라에 이르러 삼년 만에 정사를 보고하니 주공이 말하기를 ‘어찌 이리 늦은가?’ 하니 (백금이) 말하기를 ‘그 풍속을 바꾸고 그 예절을 고쳐서 삼년상을 치른 후에 그치게 하였습니다.’ 하니 주공이 말하기를, ‘후세에 북면하여(신하가 되어) 제나라를 섬기겠구나. 대체로 정치란 간소하고 쉽지 않으면 백성이 가까이 할 수가 없고, 평탄하고 쉬우면 백성을 가까이하여 백성이 반드시 의지하게 되는 것이니라.’ 라고 했다.
 
周公이 問太公하되 何以治齊오 曰尊賢而尙功이라 周公이 曰後世에 必有簒弑之臣이러라 太公이 問周公하되 何以治魯오 曰尊賢而親親하라 太公이 曰後世에 寢弱矣이라 하더라 伯禽十三世而至隱公하야 爲春秋之始하니라 隱公之弟는 曰桓公이요 桓公之子는 曰莊公이라 /簒빼앗을 찬,
주공이 (강)태공에게 묻기를 ‘어떻게 제나라를 다스립니까.’ 하니, (강태공이) 말하기를 ‘어진 이를 존중하고 공로를 숭상합니다.’ 라고 하니, 주공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찬역의 신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강)태공이 주공에게 묻기를 ‘어떻게 노나라를 다스립니까.’ 하니 주공이 말하기를 ‘어진 이를 존중하고 어버이를 친하게 합니다.’ 하니 (강)태공이 말하기를 ‘후세에 점점 약하여 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백금의 십삼 대 후에 은공에 이르렀고 춘추시대가 시작되었다. 은공의 아우는 환공이고 환공의 아들이 장공이다.
 
莊公이 有庶弟三人하니 曰慶父니 其後에 爲孟孫氏하고 曰叔牙니 其後에 爲叔孫氏하고 曰季友니 其後에 爲季孫氏하니 是謂三桓이라 世執國命하더니 歷閔公 僖公 文公 宣公 成公 襄公하여 至昭公하여 伐季氏러니 三家가 共攻之하니 公이 奔乾侯以卒하고 弟定公이 立하고 /僖기쁠 희, 赧(얼굴 붉힐 난) 侯과녁 후,
장공에게 서제 3인이 있었는데 첫째가 경보이니 그 후손이 맹손씨가 되고, 둘째가 숙아이니 그 후손이 숙손씨가 되고 셋째가 계우니 그 후손이 계손씨가 되니 이들을 일러 삼환이라 하니라. 대대로 나라의 명령을 휘어잡더니 민공 희공 문공 선공 성공 양공을 거쳐 소공에 이르러 계씨를 쳤더니 세 가문이 함께 (왕실을) 공격하니 소공이 건후로 달아나 거기서 죽고 아우 정공이 즉위하였다.
 
以孔子로 爲中都宰하니 一年에 四方이 皆則之라 由中都爲司空하고 進爲大司寇하야 相定公 會齊侯於夾谷할새 孔子가 曰有文事者는 必有武備하나니 請具左右司馬以從이라 하더니 旣會에 齊有司이 請奏四方之樂하니 於是에 旗旄劒戟이 鼓譟而進이어날 孔子가 趨而進曰吾兩君이 爲好에 夷狄之樂을 何爲於此오 하니 齊景公이 心怍하여 麾之하고 齊有司가 請奏宮中之樂하니 優倡侏儒가 戱而前이거늘 /夾낄협, 侏난쟁이주, 儒선비유,난쟁이 유, 怍(부끄러워할 작), 麾(대장기 휘)부르다
공자로써 중도의 수령을 삼으니 일 년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공자가) 중도의 수령을 거쳐 사공이 되고 나아가 대사구가 되어 정공을 도왔다. (정공이) 제나라 군주와 협곡에서 회담을 할 때 공자가 아뢰기를 ‘글을 일삼는 사람은 반드시 무비를 갖추나니 좌우 사마와 함께 따르기를 바랍니다.’라 하더니, 이미 회담이 시작 되어 제나라 관리가 사방의 음악을 연주하기를 청하니 이에 깃발과 창검(을 앞세운 군대)이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오거늘, 공자가 달려 나가 말하기를, ‘우리 두 임금이 우호를 맺으려는데 오랑캐의 음악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연주하는가.’하니 제나라 경공이 마음에 부끄러워 불러들이니 제나라 관리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기를 청하니 배우와 광대들이 앞에 나와 놀이를 벌리거늘
 
孔子가 趨而進曰匹夫가 熒惑諸侯者는 罪當誅하니 請命有司加法焉하여 首足異處라 하니 景公이 懼하여 歸語其臣曰魯는 以君子之道로 輔其君이거늘 而子는 獨以夷狄之道로 敎寡人이라 하고 於是에 齊人이 乃歸所侵魯鄆 汶陽 龜陰之地하여 以謝魯하다 孔子가 言於定公하여 將墮三都하여 以强公室하니 叔孫氏는 先墮郈하고 季氏는 墮費하되 孟氏之臣은 不肯墮成이거늘 圍之弗克하다 /熒등불형, 현혹할 형, 鄆(고을 이름 운) 汶내이름문, 郈(고을 이름 후)
공자가 달려 나가 말하기를, ‘필부가 제후를 현혹시키는 자는 그 죄가 참수에 해당하니 청컨대 유사(맡은 관리)에게 명하여 법(형벌)을 가하여 머리와 발이 다른 곳에 있게 하시라.’하니 경공이 두려워하여 돌아와 그 신하에게 말하기를 ‘노나라는 군자의 도로써 그 임금을 돕거늘 그대들은 홀로 오랑캐의 도로써 과인을 가르치는구나.’ 하고 이에 제나라 사람이 빼앗은 운과 문양과 구음의 땅을 돌려주고 노나라에 사과하였다. 공자가 정공에게 말하여 장차 세 도시를 무너뜨려 (군주의) 공실을 부강하게 하려하니 숙손씨는 먼저 운 고을을 무너뜨리고 (군주에게) 드리고, 계씨는 비 고을을 무너뜨려 드렸지만, 맹손씨의 신하는 성 고을을 무너뜨리기를 싫어하거늘 (정공이) 포위하였지만 이기기 못했다.
 
孔子가 由大司寇하여 攝行相事七日에 而誅亂政大夫少正卯하시니 居三月에 魯가 大治라 齊人이 聞之하고 懼하여 乃歸女樂於魯하니 季桓子가 受之하고 不聽政하며 郊又不致膰俎於大夫거늘 孔子가 遂去魯하시니라 /攝당길섭, 잡을섭, 膰제사고기번
공자가 대사구가 되어서 재상의 일을 맡아 행한 지 칠일에 정사를 어지럽히는 소정묘를 목 베니 석 달이 지나자 노나라가 잘 다스려지더라. 제나라 사람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에 여자 기악단을 노나라에 보내니 계환자가 그것을 받고 정사를 듣지 아니하며 교외 제사의 고기를 대부에게 보내지 않거늘 공자가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定公이 卒하고 子哀公이 立하여 欲以越로 伐三桓이다가 不克하고 歷悼公 元公하여 至繆公하니 知尊子思而不能用하고 歷共公 康公하여 至平公하여 嘗欲見孟子而不果하고 歷文公 至頃公하여 爲楚考烈王의 所滅하니 魯가 自周公으로 至頃公에 凡三十四世더라 /繆(얽을 무)사당치레목
정공이 죽고 아들 애공이 즉위하여 월로써 삼환을 치려고 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도공과 원공을 지나 목공에 이르니 자사를 존중할 줄은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하고 공공과 강공을 지나 평공에 이르러 일찍이 맹자를 만나보려 하다가 결국 하지 못하고 문공을 지나 경공에 이르러 초나라 고열왕에게 멸망되니 노나라가 주공으로부터 경공에 이르기까지 무룻 34대더라.
 
孔子의 名은 丘요 字는 仲尼이니 其先은 宋人也라 有正考父者가 佐宋하여 三命에 滋益恭하니 其鼎銘에 云하되 一命而僂하고 再命而傴하며 三命而俯하여 循墻而走하니 亦莫余敢侮라 饘於是하며 粥於是하여 以糊予口라 하더라.
/滋번성할자, 僂구부릴루, 傴구부릴구, 俯구부릴구, 饘죽전,
공자의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이니 그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라. 정고부라는 사람이 있어 송나라 (정치) 를 도왔는데 (사, 대부, 경으로 삼는) 세 번 명령에 더욱 공손하였다. 그 솥의 명문에 이르기를 ‘(사를 삼는) 한 번 명령에 구부리고 (대부를 삼는) 두 번 명령에 (더욱) 구부리며 (경을 삼는) 세 번 명령에 (더더욱) 구부리다가 담장을 따라서 달아나니 또한 나를 감히 모욕할 리 없는지라. 이에 된 죽을 쑤며 이에 죽을 써서 내 입에 풀칠한다.’ 하더라.
 
孔氏가 滅於宋하고 其後에 適魯하여 有叔梁紇하니 與顔氏女로 禱於尼丘山而生孔子하니라 爲兒嬉戱에 常陳俎豆設禮容하고 長爲季氏史하여 料量平하고 嘗爲司樴吏하여 畜蕃息하고 適周하여 問禮於老子하되 反而弟子가 稍益進이더라 /紇거친 명주 흘, 嬉즐길 희, 樴말뚝 직,
공씨가 송나라에서 멸망하고 그 후대에 노나라로 가서 숙량흘이 있어 안씨 여자와 더불어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낳으니라. 아이 적에 놀이를 좋아하여 항상 조두(제기)를 벌여 놓고 예를 드리는 놀이를 하더니 자라서 계씨의 서기가 되어 계산이 공평하였다. 일찍이 가축을 담당하는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가축이 잘 번식하였고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하여 물었는데 도리어 제자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다.
 
適齊하니 齊景公이 將待以季孟之間하고 孔子가 反魯하니 定公이 用之不終이라 適衛하고 將適陳할새 過匡하니 匡人이 嘗爲陽虎의 所暴이더니 孔子가 貌類陽虎라 止之더니 旣免에 反于衛라 醜靈公所爲하여 去之하고 過曹適宋하여 與弟子로 習禮大樹下더니 桓魋伐拔其樹하고 /魋사람이름 퇴,
제나라에 가니 제나라 경공이 장차 (노나라) 계씨와 맹씨의 사이로써 대접하였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니 정공이 끝까지 그를 쓰지 못하는지라 위나라로 가서 장차 진나라로 가려고 하여 광이라는 곳을 지나가니 광의 사람들이 일찍이 양호(노나라 계손씨의 가신)에게 피해를 당했는데 공자가 얼굴이 양호와 비슷한지라 그를 멈추게 하더니 이윽고 면하여 위나라로 돌아왔으나 위나라 영공의 하는 짓(영공이 부인 남자와 한 차에 타고 그 뒤에 공자를 태운 일)을 더럽다고 생각하여 떠나서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더불어 큰 나무 아래에서 예를 연습하더니 환퇴(송나라 왕족)가 그 나무를 베어 뽑아버렸다.
 
適鄭하니 鄭人曰 東門에 有人하니 其顙은 似堯하고 其項은 類皐陶하고 其肩은 類子産하고 自要[腰]以下는 不及禹三寸하여 累累然若喪家之狗라 하고 適陳又適衛하여 將西見趙簡子더니 至河하여 聞竇鳴犢舜華의 殺死하고 臨河歎曰 美哉라 水ㅣ 洋洋乎여 丘之不濟此는 命也라 하고 /竇구멍 두,累(묶을 누{루},
정나라에 가니 정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동쪽 문에 사람이 있는데 그 얼굴은 요임금과 비슷하고 그 목은 고요(순임금의 신하)와 비슷하고 그 어깨는 자산(정나라 재상 공손교)과 비슷하고 허리부터 아래는 요임금보다 세 치가 미치지 못하여 초라한 모습이 상갓집 개와 같다.”라고 했다. 진나라에 가고 또 위나라에 가서 장차 조나라 간자(조나라 지배자)를 만나려 했더니 황하에 이르러 두명독과 순화 (조나라 어진 대부)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황하 가에 다다라 탄식하기를, “아름답구나, 넘실넘실 저 물이여. 내가 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로구나.”라고 하였다.
 
反于衛하여 適陳하고 適蔡如葉이라가 反于蔡러시니 楚가 使人聘之하니 陳蔡大夫가 謀曰孔子가 用於楚則陳蔡危矣라 하여 相與發徒하여 圍之於野하니 孔子가 曰詩云匪兕匪虎거늘 率彼曠野라 하니 吾道가 非耶아 吾가 何爲於此오 子貢이 曰夫子道가 至大하시니 天下가 莫能容이니이다. /兕(외뿔들소 시)
(공자께서) 위나라에 돌아왔다가 진나라에 갔고 채나라에 가서 (초나라의) 섭 고을에 갔다가 (다시) 채나라에 돌아오시니 초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초빙하니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모의하여 말하기를, “공자가 초나라에 쓰이게 되면 진나라와 채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하여 서로 더불어 무리를 보내어 들판에서 (공자 일행을) 둘러싸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시에 이르길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저 광야를 휩쓴다.’ 하니 나의 도가 잘못되었는가,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라고 하시니, 자공이 이르길,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시니 천하가 능히 용납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顔淵이 曰不容何病이리요 然後에 見君子이라 하더니 楚昭王이 興師迎之하여 乃得至楚하시니 將封以書社地七百里러니 令尹子西가 不可더라 孔子가 反于衛더시니 季康子가 迎歸魯하고 哀公이 問政하되 終不能用이라 乃序書하여 上自唐虞로 下至秦繆하고 刪古詩三千하여 爲三百十一編하사 皆絃歌之하니 禮樂이 自此可述이더라 /繆얽을무, 임금이름목, 絃악기줄현
안연이 말하기를, “용납되지 않는 것을 어찌 걱정하리요. 그런 다음에 군자를 만나 뵈리라.” 하더니 초나라 소왕이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맞이하여 이에 초나라에 이르니 장차 칠백 리의 땅을 적은 문서로써 봉하려 하더니 영윤(재상) 자서가 안 된다고 하였다. 공자가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계강자(노나라의 권세가)가 맞이하여 노나라로 돌아오게 하고 (노나라) 애공이 정사를 물었지만 끝내 능히 등용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서경>의 차례를 정하여 위로 당우(요순)로부터 아래로 진나라 목공에 이르렀다. 옛 시 삼천을 정리하여 삼백 열 한편을 만들어 모두 악기에 부쳐 노래하게 하니 예악이 이로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다.
 
晩而喜易하여 序彖象繫辭說卦文言하고 讀易에 韋編이 三絶하고 因魯史記하여 作春秋한대 自隱至哀十二公하여 絶筆於獲麟하시니 筆則筆 削則削하되 游夏之徒가 不能贊一辭하고 弟子三千人에 身通六藝者가 七十二人이라 年七十三而卒하시니라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단, 상, 계사, 설괘, 문언의 차례를 짓고, 주역을 읽어서 (목간을 이은)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졌다. 노나라 사기를 바탕으로 <춘추>를 썼는데 은공에서부터 애공까지 열두 임금이고 기린을 잡았다는 것에서 붓을 꺾었다. (춘추의 기록에서) 쓸 만하면 쓰고 깎을 만하면 깎았는데 (제자) 자유와 자하의 무리가 한마디도 도울 수가 없었다. 제자는 삼천 명에 몸에 육예(禮樂射御書數)를 통한 사람이 칠십 이 명이었다. 나이 일흔 세 살에 죽으니라.
 
子鯉의 字는 伯魚이니 早卒하고 孫伋의 字는 子思이니 作中庸하고 孟子는 其門人也라 名軻이니 魯孟孫氏之後이라 生於鄒하여 幼被慈母의 三遷之敎하고 長受業子思之門人하여 道旣通에 游齊梁不用하고 退與萬章之徒로 難疑答問하여 作七篇하니라 /庸쓸용,
(공자의) 아들 리의 자는 백어이니 일찍 죽었고 손자 급의 자는 자사이니 <중용>을 지었다. 맹자는 그의 문인인데 이름은 가이고 노나라 맹손씨의 후손이다. 추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 사랑하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 거처를 세 번 옮기는 가르침을 받았고 자라서는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을 받아 도가 다 통한 후에 제나라와 양(趙)나라에 갔지만 쓰이지 못하고 물러나 제자 만장의 무리와 더불어 의문을 따지고 물음에 대답하여 <맹자> 일곱 편을 지었다
 
老子者는 楚苦縣人也이라 李는 姓이요 名은 耳니 字는 伯陽이요 又曰字는 聃이라 爲周守藏史더니 見周衰하고 去至關하니 關令尹喜曰 子將隱矣러니 爲我著書하라 하니 乃著道德五千餘言而去하니라 其後에 有鄭人列禦寇와 蒙人莊周하여 亦爲老子之學할새 莊周가 著書하여 侮孔子而誚諸子焉하니라 /聃귓바퀴 없을 담,
노자라는 사람은 초나라 고현 사람이라. 이는 성이고 이름은 이니 자는 백양이고 또 말하는 자는 담이라. 주나라 수장실의 서기가 되었더니 주나라가 쇠퇴함을 보고 떠나서 관에 이르니 관령 윤희가 말하되 “선생님은 장차 숨으리니 저를 위해 책을 지어주십시오.”라 하니, 이에 도덕경 오천여자를 지어주고 가니라. 그 후에 정나라 사람 열어구와 몽현 사람 장주가 있어 또한 노자의 학문을 배웠는데 장주가 책을 지어 공자를 업신여기고 여러 선생을 꾸짖었다.
 
衛는 姬姓이니 武王의 母弟 康叔封之所封也라 後世에 至春秋하여 有靈公夫人南子之亂하여 子蒯聵欲殺南子라가 不果하고 出奔이러니 公이 卒에 立蒯聵之子輒이러니 蒯聵이 入에 輒이 拒之어늘 子路가 與其難이더니 太子之臣이 以戈로 擊子路하여 斷纓하니 子路가 曰君子는 死라도 冠不免이라 하고 結纓而死하니 衛人이 醢子路한데 孔子가 聞之하고 命覆醢하시다. /衛지킬위, 蒯땅 이름괴, 聵배냇귀머거리외, 醢젓담을 해,
위나라는 성이 희씨이니 무왕의 아우인 강숙 봉에게 봉한 나라다. 후세 춘추시대에 이르러 영공의 부인 남자의 난이 있어 아들 괴외가 남자를 죽이려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나라 밖으로 달아났더니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첩을 왕으로 세웠다. 괴외가 입국하려 하니 첩이 막았다. 자로가 그 난에 참여하여 태자의 신하가 창으로 자로를 쳐서 갓끈이 끊어지니 자로가 말하기를,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지 않는다.”라고 하고 갓끈을 매고 죽으니 위나라 사람이 자로를 젓 담았다. 공자가 듣고 젓갈을 엎으라고 명했다.
 
戰國時에 子思가 居於衛더니 言苟變의 可將한대 衛侯가 曰變이 嘗爲吏더니 賦於民하여 食人二鷄子故로 不用하나이다 子思가 曰 聖人用人이 猶匠之用木하여 取其所長하고 棄其所短故로 杞梓連抱而有數尺之朽라도 良工은 弗棄하니 今君이 處戰國之世而以二卵으로 棄干城之將하시니 此는 不可使聞於隣國也라 하시다 /杞구기자나무기,맷버들기 梓(가래나무 재)
전국시대에 자사가 위나라에 머물더니 구변이 가히 장수로 씀 직하다고 말한대 위후가 말하기를 “구변이 일찍이 벼슬아치가 되어 백성에게 세금을 매겨 남의 계란 두 개를 먹었으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자사가 말하기를, “성스런 임금은 사람을 쓰는 것이 장인이 재목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 좋은 것은 취하고 그 나쁜 것은 버리기 때문에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가래나무에 몇 자 썩은 곳이 있어도 뛰어난 장인은 버리지 않으니 지금 주군께서 전국시대에 처하여 계란 두 개로 나라를 지킬 장수를 버리시니 이는 이웃나라에 들리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衛侯가 言計非是而羣臣和者가 如出一口하니 子思가 曰 君之國事가 將日非矣라 君이 出言에 自以爲是而卿大夫이 莫敢矯其非하고 卿大夫가 出言에 自以爲是而士庶人이 莫敢矯其非하니 詩에 曰具曰予聖이라 하니 誰知烏之雌雄고하니이다 周之諸侯에 惟衛最後亡하여 至秦幷天下爲帝더니 二世가 始廢君角하여 爲庶人하다
위후가 꾀를 말해 (자사가) 옳다고 아니하니 여러 신하 중에 화합하는 자들이 한 입에서 나오듯이 하니 자사가 말하기를, “임금님의 국사가 장차 날로 잘못 됩니다. 임금이 말을 하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경과 대부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경과 대부가 말을 하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선비와 서민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니 <시경>에 가로되 ‘모두 말하기를 내가 성인이라 하니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겠는가.’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주나라의 제후 중에 오직 위나라가 가장 뒤에 망했는데 진나라가 천하를 아울러 황제가 됨에 이르렀더니 이세가 비로소 (위나라의) 임금 각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鄭은 姬姓이니 周宣王의 庶弟桓公友之所封也라 桓公의 子 武公이 與其子莊公으로 並爲周司徒러니 數世에 至聲公하여 相子産하니 子産者는 公族國氏니 名은 僑이라 孔子過鄭하실새 與子産으로 如兄弟云이더라 穆襄以來로 鄭이 無歲不被晋楚之兵이더니 子産이 受之하되 以禮自固하니 雖晋楚之暴이라도 不能加焉이더라 鄭이 至周威烈王時하여 君乙이 爲韓哀侯에 所滅하고 韓이 徙都之하다.
정나라는 희가 성이고 주나라 선왕의 서제 환공 우의 봉한 바이라. 환공의 아들 무공이 그 아들 장공과 함께 주나라 사도가 되었더니 여러 세대 후에 성공에 이르러 자산을 재상으로 삼으니 자산이라는 사람은 왕족 국씨이니 이름은 교이다. 공자가 정나라를 지날 때 자산과 더불어 형제와 같다고 이르더라. 목공과 양공 이래로 정나라가 해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의 침입을 입지 않음이 없더니 자산이 이를 당하고도 예의로써 스스로 견고하니 비록 진나라와 초나라의 사나움으로도 능히 군대를 가하여 침략하지 못하더라. 정나라가 주나라 위열왕 때에 이르러 군을이 한나라 애후에게 멸망당하고 한나라가 옮겨서 도읍했다.
 
晉은 姬姓이니 成王의 弟 唐叔 虞之所封也라 成王이 幼하여 與叔虞로 戱할새 削桐葉爲圭 曰 以此封君하리라 하니 史佚이 請擇日한대 王이 曰吾與戱耳라 한대 佚이 曰天子는 無戱言이라 하여 遂封唐이러니 後世에 至文公하여 覇諸侯하니라 /佚편안할 일,
진나라는 성이 희이니 성왕의 아우 당숙 우에게 봉한 바라. 성왕이 어려서 숙우로 더불어 놀 때 오동잎을 찢어서 홀(笏)로 삼아 이르기를, “이것으로 너를 봉하리라.” 하니 사관 일이 날짜를 택하기를 청하니 성왕이 말하기를, “내가 더불어 장난한 것이라.” 하니 (사관) 일이 말하기를, “천자는 장난의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당(고을 이름)에 봉하니, 후세에 문공에 이르러 제후의 패자가 되니라.
 
文公의 名은 重耳니 獻公之次子也라 獻公이 嬖於驪姬하여 殺太子申生 而伐重耳於蒲하니 重耳出奔하여 十九年而後에 反國하니라 嘗餒於曹할새 介子推가 割股以食之러니 及歸에 賞從亡者 狐偃 趙衰 顚頡 魏犨 而不及子推하니
/驪검은 말 려, 蒲 부들 포,介 끼일 개.頡 곧은 목 힐, 犨 소 헐떡거릴 주,
문공의 이름은 중이이니 헌공의 둘째 아들이라. 헌공이 여희를 사랑하여 태자 신생을 죽이고 중이를 포(땅)에서 공격하니 중이가 (국경을) 나가 달아나서 십구 년 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조 땅에서 굶주릴 때 개자추가 넓적다리 살을 베어 (주군을) 먹이더니 귀국하기에 이르러 망명에 따라다녔던 사람들인 호언, 조쇠, 전힐, 위주에게 상을 주었으나 개자추에게는 (상을) 주지 못했다.
 
子推之從者가 縣[懸]書宮門曰 有龍矯矯거늘 頃失其所로다 五蛇從之하여 周流天下로되 龍饑乏食이거늘 一蛇刲股로다 龍返於淵하여 安其壤土하니 四蛇入穴하야 皆有處處하되 一蛇無穴하여 號于中野라 하니 公이 曰 噫라 寡人之過也라 하고 使人으로 求之하되 不得하고 隱綿上山中이거늘 焚其山한데 子推가 死焉이거늘 後人이 爲之寒食하고 文公이 環綿上田하여 封之하고 號曰介山이라 하다. /矯바로잡을교, 矯矯:날래고 사나운 모양, 頃요사이 경, 기울경, 刲찌를규,
개자추의 종자가 글을 써서 궁궐 문에 매달아 이르기를, “용이 날래고 사납더니 그 때 있을 곳을 잃었도다. 다섯 뱀이 그를 따라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용이 굶주리고 먹을 것이 없거늘 한 뱀이 넓적다리를 찔렀더라. 용이 연못에 돌아와 그 땅을 편안히 하니 네 뱀은 굴에 들고 모두 있을 곳을 가졌는데 한 뱀은 굴이 없어 들판에서 울부짖네.”라고 했다. 문공이 이르길, “아, 과인의 잘못이다.”라 하고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개자추는) 면상산에 숨었는데 그 산을 불 지르니 자추가 (나오지 않고) 타 죽거늘 뒷사람들이 그를 위해 찬밥을 먹었다. 문공이 면상의 밭을 둘러 봉하여 개산이라고 불렀다.
 
文公이 卒하고 其後에 遂世爲覇하여 歷襄公 靈公 成公 景公 厲公하고 至悼公하여 霸業이 復盛이더니 又歷 平公 昭公 頃公하여 公室이 益弱而六卿에 范氏 知氏 中行氏 趙氏 魏氏 韓氏 皆大하고 歷定公 至出公하여 知氏與趙魏韓氏로 分范中行氏하여 公이 怒하더니 四卿이 反攻公하니 公이 出奔而死하고
문공이 죽고 그 뒤에 드디어 대대로 (제후 중에) 패권을 쥐어 양공, 영공, 성공, 경공, 여공을 지나 도공에 이르러 패업이 다시 융성하더니 또 평공 소공 경공을 거쳐 공실이 더욱 약해지고 여섯 경(공의 아래 벼슬)인 범씨, 지씨, 중행씨, 조씨, 위씨, 한씨가 모두 (힘이) 커지고, 정공을 거쳐 출공에 이르러 지씨가 조와 위와 한씨와 더불어 범씨와 중행씨를 나누니, 공이 노하더니 네 경이 도리어 공을 공격하여 공이 달아나서 죽었다.
 
哀公이 立하니 趙 魏 韓氏 又滅知氏而分之하다 幽公이 立하니 晉은 獨有絳 曲沃하고 餘는 皆入趙 魏 韓氏하여 號爲三晉이더니 烈公이 立하니 三卿이 以周威烈王命으로 爲侯하고 又歷孝公 至靜公하여 魏武侯 韓哀侯 趙敬侯가 共廢靜公하여 爲家人而 分其地하니 晉이 絶不祀하니라 /絳진홍색강, 曲沃:땅이름,
애공이 서니 조씨와 위씨와 한씨가 또 지씨를 멸하여 그 땅을 나누었다. 유공이 서니 진나라는 오직 강 땅과 곡옥 땅을 가지고 나머지는 모두 조씨와 위씨와 한씨에게 편입되어 이들을 삼진이라고 불렀다. 열공이 서니 세 경이 주나라 위열왕의 명으로 제후가 되었고, 또 효공을 지나 정공에 이르러 위나라 무후와 한나라 애후와 조나라 경후가 함께 정공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그 땅을 나누니 진나라는 (종사가) 끊어지고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다.
 
陳은 嬀姓이니 虞舜之後 胡公滿之所封也라 周武王이 求而封之러니 後世에 至春秋하여 有公子完者가 出奔而仕于齊러니 陳은 後爲楚惠王의 所滅而完之後가 遂大于齊하여 爲田氏하니라 /嬀성규, 出奔;逃亡하여 달아남
진나라는 성이 규이니 순임금의 후손 호공 만에게 봉한 바이라. 주나라 무왕이 구하여 그를 봉하였더니 후세 춘추시대에 이르러 공자 완이라는 이가 있어 달아나 제나라에서 벼슬을 살더니 진나라는 뒤에 초나라 혜왕에게 멸망되었고 완의 후손이 마침내 제나라에서 커져서 전씨가 되었다.
 
齊는 姜姓이니 太公望呂尙之所封也라 後世에 至桓公하여 覇諸侯하니 五覇에 桓公이 爲始니라 名은 小白이니 兄襄公이 無道거늘 羣弟가 恐禍及하여 子糾는 奔魯할새 管仲이 傅之하고 小白은 奔莒할새 鮑叔이 傅之러니 /糾꼴규, 管 대롱관, 莒제후이름거, 감자거, 鮑절인어물포,전복포)
제나라는 강씨 성이니 태공망 여상의 봉한 바라. 후세에 환공에 이르러 제후들에게 패권을 행사하니 패권을 잡은 다섯 중에 환공이 처음이 되었다. (환공의) 이름은 소백이니 형 양공이 무도하거늘 여러 아우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공자 규는 노나라로 달아날새 관중이 돕고 소백은 거나라로 달아날새 포숙이 도왔다.
 
襄公이 爲弟無知의 所弑하고 無知도 亦爲人의 所殺하니 齊人이 召小白於莒而魯亦發兵하여 送糾할새 管仲이 嘗遮於道하고 射小白中帶鉤더니 小白이 先至齊而立하니 鮑叔牙가 薦管仲爲政한데 公이 置怨而用之하니라 (A爲B所C A가 B에게 C를 당하다, 帶鉤 허리띠 고리,
양공이 아우 무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무지도 또한 어떤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니 제나라 사람이 거나라에서 소백을 부르고 노나라 역시 군대를 출동시켜 (공자) 규를 보낼새 관중이 일찍 길을 막고 소백을 쏘아 띠고리를 맞추더니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이르러 즉위하니 포숙아가 관중을 천거하여 정치를 하게 하니 환공이 원망을 접어 버리고 그를 썼다.
 
仲의 字는 夷吾이니 嘗與鮑叔으로 賈할새 分利에 多自與하되 鮑叔이 不以爲貪하니 知仲의 貧也오 嘗謀事할새 窮困하되 鮑叔이 不以爲愚하니 知時有利不利也오 嘗三戰三走하되 鮑叔이 不以爲怯하니 知仲이 有老母也이라 仲이 曰生我者는 父母也오 知我者는 鮑子也라 하더라 /怯 겁낼 겁
관중의 자는 이오이니 일찍이 포숙과 더불어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나누는데 자기에게 많이 주었지만 포숙이 그를 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관중의 가난을 알았기 때문이요, 일찍이 일을 꾀할 때 어려움을 당했지만 포숙이 그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때가 유리할 때가 있고 불리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 일찍이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도망쳤으나 포숙이 그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관중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 관중이 말하기를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고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라고 했다.
 
桓公이 九合諸侯하고 一匡天下는 皆仲之謀이라 一則仲父요 二則仲父라 하고 仲이 病이거늘 桓公이 問羣臣에 誰可相할새 易牙이 何如오 仲이 曰 殺子以食君하니 非人情이라 不可近이니이다 開方이 何如오 曰倍[背]親以適君하니 非人情이라 不可近이라 하니 盖開方은 故衛太子來奔者也오 /盖덮을개, 대개개,
환공이 제후들을 아홉 번 합치고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은 것은 모두 관중의 계획이라. 하나도 작은 아버지요 둘도 작은 아버지라고 했다. 관중이 병들거늘 환공이 여러 신하에 누가 재상을 할 만한지 물어 “역아가 어떠하오.” 하니 관중이 말하기를, “자식을 죽여 임금에게 먹게 하니 사람의 정이 아니라 가까이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환공이) “개방이 어떠하오.” 하니 관중이 말하기를, “부모를 배신하고 임금에게로 왔으니 인정이 아니라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라 하니 대개 개방은 옛날 위나라 태자로 도망 온 자이라.
 
豎刀가 何如오 曰自宮而適君하니 非人情이라 不可近이라 하더라 仲이 死에 公이 不用仲言하고 卒近之더니 三子가 專權하고 公이 內寵如夫人者六이 皆有子이러니 公이 薨에 五公子가 爭立相攻하여 公尸在床하되 無殯殮者가 六十七日에 尸蟲이 出於戶이더라 /豎더벅머리 수, 殯염할 빈, 殮염할 렴,
(환공이) “수도가 어떠하오.” (관중이) 말하기를, “궁형을 받고 임금에게 왔으니 인정이 아니라 가까이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관중이 죽자 환공이 관중의 말을 쓰지 아니하고 마침내 그들을 가까이하더니 세 사람이 권력을 오로지 장악하고 환공이 부인과 같이 사랑한 여자가 여섯이라 모두 아들이 있더니 환공이 죽자 다섯 공자가 서로 왕이 되려고 싸워서 환공의 시체는 침상에 둔 채 염을 하지 못한 지가 67일에 시체에 벌레가 문빢으로 기어나왔다.
 
自桓公으로 八世에 至景公하니 有晏子者가 事之하니 名은 嬰이요 字는 平仲이니 以節儉力行으로 重於齊하여 一狐裘三十年하고 豚肩이 不掩豆하되 齊國之士의 待以擧火者가 七十餘家이더라 /嬰갓난아이 영, 待以擧火진휼미에 의지하여 밥을 짓다)
환공으로부터 여덟 대에 경공에 이르니 안자라는 사람이 있어 경공을 섬기니 이름은 영이요 자는 평중이니 절약하고 검소하며 힘써 행함으로 제나라에 중용되어 여우가죽옷 한 벌로 30년을 입고 돼지 어깨살이 (너무 작아서) 제기를 가리지 못했지만 제나라 선비들이 진휼미에 힘입어 밥을 지은 자가 70여 집이었다.
 
晏子가 出할새 其御之妻가 從門間하여 窺其夫가 擁大盖策駟馬하고 意氣揚揚自得이러니 旣而歸하니 妻가 請去曰 晏子는 身相齊國하고 名顯諸侯하되 觀其志하니 常有以自下거늘 子는 爲人僕御하여 自以爲足하니 妾이 是以求去也하노라 御者이 乃自抑損하니 晏子가 怪而問之한데 以實對거늘 薦爲大夫하니라 /僕종복, 마부 복, 以爲 -라고 여기다,
안자가 외출할 때 그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그 남편을 엿보니 큰 덮개를 안고 네 말을 채찍질하고 의기양양하여 스스로 만족해하거늘, 이윽고 (그 남편이) 돌아오니 아내가 떠나기를 청하여 말하되 “안자는 몸이 제나라의 재상이고 이름이 제후에게 드러났지만 그 뜻을 보니 항상 스스로 낮춤이 있거늘 그대는 남의 마부가 되어 스스로 만족해하니 내가 이 때문에 떠나려고 하노라.” 하니 마부가 이에 의기소침하니 안자가 괴이하여 물었더니 사실로써 대답하거늘 (안자가) 그를 천거하여 대부로 삼았다.
 
公이 使晏子로 之晉이러니 與叔向으로 私語할새 以爲齊政이 必歸陳氏라 하더니 如其言하여 景公後五世에 至康公하여 田和가 受周安王命하여 爲侯하고 遷康公海濱以死하니 姜氏遂絶不祀하니라 /叔向:진나라 대부 羊舌盻(흘겨볼혜),
경공이 안자로 하여금 진나라에 가게 하였더니 숙향(양설혜)과 사사로이 말하기를, “제나라 정사가 반드시 진씨에게 돌아가리라” 하더니 그 말과 같이 되어 경공이 죽은 지 다섯 대 후 강공에 이르러 전화(陳나라 후손)가 주나라 안왕의 명을 받아 제후가 되고 강공을 바닷가에 옮겨 죽게 하니 강씨가 마침내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다.
 
田氏齊者는 本嬀姓이니 故陳厲公佗의 子完之後라 完이 奔齊하여 爲陳氏러니 後又以陳氏로 爲田氏하다 完이 事齊桓公하여 爲工正이다가 卒하니 諡를 敬仲이라 五世에 至釐子乞(기)하여 事齊景公爲大夫하여 其收賦稅於民할새 以小斗受之하고 其粟을 予民할새 以大斗로 行陰德於民하되 而公이 弗禁하여 由此로 得齊衆하고 乞이 專政이더니 卒하고 /嬀성 규, 厲갈 려, 佗다를 타, 乞빌 걸, 줄 기.
전씨의 제나라는 본디 성이 규이니 옛날 진나라 여공 타의 아들 완의 후예라. 완이 제나라로 달아나서 진씨가 되었더니 후에 또 진시로써 전씨가 되었다. 완이 제나라 환공을 섬겨 공정이 되었다가 죽으니 시호를 경중이라 하였다. 다섯 대째인 이자(釐子, 또는 僖子) 기에 이르러 제나라 경공을 섬겨 대부가 되었더니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는데 작은 말로써 받고 그 곡식을 백성에게 줄 때에는 큰 말로 하여 백성에게 음덕을 행하되 경공이 금하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 민중의 마음을 얻고 기가 정사를 전담하다가 죽었다.
 
子成子恒이 弑簡公하고 立平公하니 封邑이 大於公所食이더라 恒이 卒하고 襄子盤이 立하여 與韓趙魏로 通使하니 盖三家는 且有晉하고 而田氏는 且有齊也하니라 歷莊子白하고 至太公和하여 遂以周安王命으로 爲侯러니 卒하고 子桓公午가 立이다가 卒하고 子威王因齊立하여 初不治하니 諸侯가 皆來伐이더라
아들 성자 항이 (제나라) 간공을 죽이고 평공을 세웠더니 봉읍이 평공의 식읍보다 크더라. 항이 죽고 양자 반이 서서 한나라와 조나라와 위나라와 더불어 사신을 통하니 대개 이 세 집안(한, 조, 위)은 또한 진나라를 차지하였고 전씨는 또한 제나라를 차지한 것이라. 장자 백을 거쳐 태공 화에 이르러 마침내 주나라 안왕의 명으로 제후가 되고 죽었다. 아들 환공 오가 섰다가 죽고 아들 위왕 인제가 서서 처음 다스리지 못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정벌하더라.
 
八年에 楚가 大發兵加齊거늘 齊使淳于髡으로 請救于趙할새 齎金百斤과 車馬十駟하니 髡이 仰天大笑거늘 王이 曰 先生이 少之乎아 髡이 曰臣見道傍에 有禳田者가 操一豚蹄酒一壺하고 祝曰 甌窶는 滿篝하고 汙邪는 滿車하여 五穀이 蕃熟하여 穰穰滿家라 하니 臣見其所持者가 夾하고 所欲者가 奢故로 笑之하나이다 王이 乃益黃金千鎰과 白璧十雙과 車馬百駟하니 髡이 乃行하니라 /髡머리 깎을 곤, 齎가져갈재, 禳제사양, 甌사발구, 窶가난할구, 높고좁을루, 甌窶:높고좁은밭, 篝광주리구, 汙더러울오, 낮을 오, 구부릴 우, 邪간사할사, 기울사, 汙邪:낮은밭, 穰풍족할양, 璧둥근옥, 夾낄협, 좁을협.
8년에 초나라가 크게 군사를 보내서 제나라를 치거늘 제나라가 순우곤을 시켜 조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데 황금 백 근과 수레와 말 40대를 가져가게 하니 순우곤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거늘 왕이 말하기를 ‘선생은 그것이 적다고 생각하시오?’ 하니 곤이 말하기를 신이 보니 길가에서 밭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돼지 발굽 한 개와 술 한 병을 가지고 축원하기를 ‘높고 좁은 밭에는 광주리에 가득하게 낮은 밭에는 수레에 가득하게 하여 다섯 가지 곡식이 번성하고 익어서 풍족하여 집에 가득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니, 신이 보건대 차린 것은 적고 바라는 바는 많은 고로 그것을 웃었습니다. 왕이 이에 황금 천 일과 희고 둥근 옥 열 쌍과 수레와 말 백 대를 더해주니 곤이 이에 출발했다.
 
時에 齊國이 幾不振이러니 王이 乃召卽墨大夫하여 語之曰 自子之居卽墨也로 毁言이 日至나 然이나 吾가 使人視卽墨하니 田野가 闢하고 人民이 給하며 官이 無事하고 東方이 寧하니 是는 子가 不事吾左右하여 以求助也라 하고 封之萬家하고 /給줄급, 넉넉할급.
그 때에 제나라가 거의 떨치지 못하더니 왕이 이에 즉묵의 대부를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즉묵에 있은 뒤로부터 헐뜯는 말이 날마다 이르렀지만 그러나 내가 사람을 시켜 즉묵을 살펴보니 밭과 들이 개간되었고 백성들이 넉넉하며 관리가 일이 없고 동쪽 지방이 편안하니 이는 그대가 나의 좌우를 섬겨서 도움을 구하지 아니한 것이라.” 하고 그에게 (식읍) 만호를 봉하고
 
召阿大夫하여 語之曰 自子之守阿로 譽言이 日至나 然이나 吾가 使人視阿하니 田野가 不闢하고 人民이 貧餒하고 趙가 攻甄하되 子가 不救하고 衛取薛陵하되 子가 不知하니 是는 子가 厚幣事吾左右하여 以求譽也라 하고 是日에 烹阿大夫와 與嘗譽者하니 群臣이 聳懼하야 莫敢飾詐하니 齊가 大治하고 諸侯가 不敢復致兵이더라 /聳(솟을용).두려워하다
아(지방 이름)대부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아를 지킨 뒤로부터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이르렀지만 그러나 내가 사람을 시켜 아를 살펴보니 밭과 들이 개간되지 않고 백성들이 가난하고 주렸으며 조나라가 견 땅을 공격하였으나 그대가 구하지 않았고 위나라가 설릉을 취했으되 그대가 모른 체하니 이는 그대가 후한 예물로 내 좌우를 섬겨서 칭찬을 구한 때문이라.” 하고 그날에 아대부와 일찍이 그를 칭찬한 자를 삶아 죽이니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꾸며서 속이지 못하니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지고 제후들이 감히 다시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威王이 與魏惠王으로 會田[佃]於郊할새 惠王이 曰 齊에 有寶乎아 王이 曰 無有로다 惠王이 曰 寡人國은 雖小나 猶有徑寸之珠의 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라 하니 威王이 曰 寡人之寶는 與王異니라 吾臣에 有檀子者하여 使守南城이면 楚人이 不敢爲寇하고 泗上十二諸侯가 皆來朝하고 有盼子者하여 使守高唐이면 趙人이 不敢東漁於河하고 有黔夫者하여 使守徐州則燕人은 祭北門하며 趙人은 祭西門하고 有種首者하여 使備盜賊이면 道不拾遺하니 此四臣者는 將照千里하리니 豈特十二乘哉아 하니 惠王이 有慙色이더라 /徑지름길경, 盼눈예쁠반, 黔 검을검,
(제나라) 위왕이 위나라 혜왕과 더불어 성 밖에서 모여 사냥할 때 혜왕이 말하기를, “제나라에도 보물이 있습니까?” 위왕이 말하기를, “없습니다.” 혜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나라가 비록 작으나 오히려 지금 한 치의 구슬로 수레 앞 뒤 각각 열두 채를 비추는 것이 10개나 있습니다.” 하니, 위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보물은 왕과 다르니 내 신하 중에 단자라는 사람이 있어 남쪽 성을 지키게 하면 초나라 사람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사수 가의 열 두 제후가 모두 와서 뵙습니다. 반자라는 사람이 있어 고당을 지키게 하면 조나라 사람이 감히 동쪽으로 황하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고, 검부라는 사람이 있어 서주를 지키게 하면 연나라 사람은 북문에서 제사를 지내고 조나라 사람은 서문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종수라는 사람이 있어 도둑에 대비케 하면 (사람들이) 길에 버린 것을 줍지 아니하니 이 네 신하는 장차 천리를 비추리니 어찌 특별히 열두 채뿐이리오.” 하니 혜왕이 부끄러운 기색이 있더라.
 
威王이 卒하고 子宣王이 立에 喜文學游說之士하여 騶衍 淳于髡 田騈 愼到之徒七十六人이 皆爲上大夫하니 是以로 齊稷下에 學士가 盛하여 且數百人이나 然이나 孟子는 至而不能用하니라 /騶말먹일추, 騈나란히할병,
위왕이 죽고 아들 선왕이 즉위하여 글 잘하고 유세 잘하는 선비를 좋아하여 추연 순우곤 전병 신도의 무리 일흔 여섯 명이 모두 상대부가 되니 이로써 제나라 조정에 학사가 번성하여 또한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그러나 맹자는 그 중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능히 쓰이지 못했다.
 
魏伐韓하니 韓이 請救於齊거늘 齊使田忌로 爲將하여 以救韓할새 魏將龐涓이 嘗與孫臏으로 同學兵法이더니 涓이 爲魏將軍하여 自以所能이 不及이라 하여 以法으로 斷其兩足而黥之더니 齊使가 至魏라가 竊載以歸하니라 至是에 臏이 爲齊軍師하여 直走魏都하니 涓이 去韓而歸거늘 臏이 使齊師入魏地者로 爲十萬竈하고 明日에 爲五萬竈하고 又明日에 爲二萬竈하니 /涓시내 연, 臏정강이 뼈 빈, 黥묵형할 경, 竈부엌 조,
위나라가 한나라를 치니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거늘 제나라에서 전기로 하여금 장군으로 삼아 한나라를 구원하였는데 위나라 장수 방연이 일찍이 손빈과 더불어 한가지로 병법을 배우더니 방연이 위나라 장군이 되어 스스로 능한 것이 (손빈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법으로써 그의 두 다리를 자르고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했더니 제나라 사신이 위나라에 갔다가 (손빈을) 훔쳐서 싣고 돌아오니라 이에 이르러 손빈이 제나라 군사가 되어 곧바로 위나라 도읍으로 달려가니 방연이 한나라를 버리고 돌아가거늘 손빈이 위나라 땅에 들어간 제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십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다음날에는 오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또 다음날에는 이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니
 
涓이 大喜曰我固知齊軍怯이로다 入吾地三日에 士卒亡者가 過半矣라 하고 乃倍日幷行逐之하니 臏이 度(탁)其行이 莫[暮]當至馬陵하고 道陜而旁多阻하여 可伏兵하고 乃斫大樹하여 白而書曰 龐涓이 死此樹下라 하고 令齊師善射者萬弩로 夾道而伏하고 期暮見火擧而發이더니 涓이 果夜至斫木下하여 見白書하고 以火燭之하니 萬弩俱發하고 魏師가 大亂相失이거늘 涓이 自刎曰遂成豎子之名이라 하다 齊大破魏師하고 虜太子申하다 /陜좁을 협, 阻험할 조,
방연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본디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임을 알았다. 우리 땅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도망한 사졸이 반이 넘는구나.” 하고 이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서 그들을 쫓으니 손빈이 헤아려보니 그들이 쫓아옴이 저녁이면 마땅히 마릉에 이를 것이라 하고 길은 좁고 길옆에 장애물이 많아 가히 복병을 숨길 만하다 하고 이에 큰 나무를 찍어서 희게 만들고 거기에 쓰기를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으리라 하고 제나라 군사 중에 활을 잘 쏘는 자로 하여금 만 개의 쇠뇌로 양쪽 길가에 숨게 하고 저녁에 불빛이 오르는 것을 보면 쇠뇌를 쏘라고 기약하였더니 방연이 과연 밤에 나무를 찍은 아래에 이르러 흰 데다 쓴 글을 보고 불을 켜서 밝히니 만 개의 쇠뇌가 함께 발사되어 위나라 군사들이 크게 혼란에 빠져 서로를 분간하지 못하였다. 방연이 스스로 목을 찌르며 말하기를, “마침내 더벅머리 녀석의 이름을 이루게 하였구나.” 하였다. 제나라가 크게 위나라 군사를 깨트리고 태자 신을 사로잡았다.
 
宣王이 卒하고 湣王이 立하니 靖郭君田嬰者는 宣王之庶弟也이라 封於薛이러니 有子하니 曰文이라 食客이 數千人이요 名聲이 聞於諸侯하고 號爲孟嘗君이라 秦昭王이 聞其賢하고 乃先納質於齊하여 以求見이러니 至則止하여 囚하고 欲殺之거늘 孟嘗君이 使人으로 抵昭王幸姬하여 以求解하니 姬曰願得君의 狐白裘하노라 盖孟嘗君이 嘗以獻昭王하고 無他裘矣러니 /湣시호 민, 불쌍히 여길 민, 靖편안할 정, 薛고을이름 설,
선왕이 죽고 민왕이 즉위하니 정곽군 전영이라는 자는 선왕의 서제라 설 고을에 봉하였더니 아들이 있어 이르길 문이라 식객이 수천인이요 명성이 제후들에게 들리고 호를 맹상군이라고 하였다. 진나라 소왕이 그 어짊을 듣고 이에 먼저 인질을 제나라에 들게 하고 그로써 (맹상군을) 보기를 구하였더니 (맹상군이) 이른 즉 머물게 하여 가두고 죽이고자 하거늘 맹상군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왕의 총애하는 후궁에게 가서 풀어주기를 구하니 그 후궁이 말하기를 그대의 흰 여우 가죽옷을 갖기 원하노라 하니 대개 맹상군이 일찍이 소왕에게 바치고 다른 (흰 여우) 가죽옷이 없더니
 
客에 有能爲狗盜者하여 入秦藏中하여 取裘以獻姬하니 姬爲言得釋이라 卽馳去할새 變姓名하고 夜半에 至函谷關하니 關法에 鷄鳴이라야 方出客이라 恐秦王이 後悔追之러니 客에 有能爲鷄鳴者하니 鷄盡鳴이라 遂發傳出이러니 食頃에 追者가 果至而不及하니라 孟嘗君이 歸怨秦하여 與韓魏로 伐之하여 入函谷關하니 秦이 割城以和하다. 孟嘗君이 相齊러니 或이 毁之於王하니 乃出奔하니라.
식객 중에 개구멍 도둑질을 잘 하는 사람이 있어 진나라 창고 속에 들어가 (흰 여우) 가죽옷을 취하여 (진소왕의) 후궁에게 바치니 후궁이 그를 위하여 말을 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곧 달려서 달아났는데 성명을 바꾸고 한밤중에 함곡관에 이르니 관의 법에 닭이 울어야 바야흐로 (관문을 열어) 행인을 내보는데 진왕이 후회하여 쫓아올까 두려워하더니 식객 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있어 (그가 닭 울음소리를 내자) 닭들이 모두 우는지라 드디어 봉전(통행증)을 펴 보이고 (관문을) 나왔더니 한식경(밥 먹을 동안)에 추격하는 사람이 과연 이르렀지만 (그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맹상군이 돌어와 진나라를 원망하고 한나라 위나라와 더불어 진나라를 쳐서 함곡관을 들어가니 진나라가 성을 나누어서 화친했다. 맹상군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더니 어떤 사람이 왕에게 헐뜯으니 이에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湣王이 滅宋而驕하니 燕昭王이 以齊嘗破燕之故로 與諸侯로 合謀而攻齊하여 燕軍이 入臨淄하니 湣王이 走莒라 楚將淖齒救齊라가 反殺湣王而與燕으로 共分齊之侵地하니 王孫賈가 從湣王於莒다가 而失王處러니 其母가 曰 汝가 朝出而晩來則吾는 倚門而望하고 汝가 暮出而不還則吾는 倚閭而望이러니 汝가 今事王이다가 王이 走거늘 汝가 不知處하고 汝尙何歸오 賈가 乃攻淖齒殺之하고 求湣王子法章而立之하여 保莒以抗燕할새 /淄검은 빛 치, 莒감자 거, 나라이름 거, 淖진흙 뇨,
민왕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교만해지니 연나라 소왕이 일찍이 제나라가 연나라를 깨트린 연고로써 제후들과 더불어 모의를 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연나라 군사가 임치에 들어오니 민왕이 거로 달아났다. 초나라 장수 뇨치가 제나라를 구원하러 왔다가 도리어 민왕을 죽이고 연나라와 더불어 제나라에서 침략한 땅을 함께 나누었다. 왕손고가 민왕을 따라 거에 왔다가 왕의 거처를 잃어버렸더니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면 나는 문에 기대서 기다리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이문(마을 어귀의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데, 너는 지금 왕을 섬기다가 왕이 달아나거늘 네가 그 거처를 알지 못하니 네가 오히려 어디로 돌아가리오.” 하니, 왕손고가 이에 뇨치를 공격하여 죽이고 민왕의 아들 법장을 찾아서 그를 (왕으로) 세우고 거를 지켜서 연나라에 대항하였다.
 
時에 齊城에 惟莒卽墨이 不下이라 卽墨人이 推田單爲將軍하니 身操版鍤하여 與士卒分功하며 妻妾을 編於行伍하고 收城中하여 得牛千餘하여 爲絳繒衣하고 畵五采龍文하며 束兵刃其角하고 灌脂束葦於尾하고 燒其端하여 鑿城數十穴하고 夜縱牛할새 壯士가 隨其後하니 牛尾熱하여 怒奔燕軍하니 所觸에 盡死傷하고 而城中이 鼓譟從之하니 聲震天地라 燕軍이 敗走하니 七十餘城이 皆復爲齊거늘 迎襄王於莒하니 封單爲安平君하다 /絳진홍색강, 繒비단증,
그 때 제나라 성 중에 오직 거와 즉묵만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즉묵의 백성들이 전단을 장군으로 추대하니 (전단이) 몸소 널 가래를 잡고 사졸과 공을 함께 나누며 처첩을 대열에 편입하고 성중에서 소 천여 마리를 거두어 얻어서 붉은 비단 옷을 입히고 오색으로 용무늬를 그려서 칼날을 그 뿔에다 묶고 꼬리에 갈대를 묶어 기름에 적셔 그 끝에 불을 붙이고 성 밑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어 밤에 소를 풀어놓고 장사가 그 뒤를 따르니 소의 꼬리가 뜨거워 성내어 연나라 군사에게 달려드니 부딪힌 것은 모두 죽거나 다치고 그리고 성안의 군사들이 북치고 고함지르며 그 뒤를 좇으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지라 연나라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니 칠십여 성이 모두 다시 제나라 것이 되거늘 거에서 양왕을 맞이하여 전단을 안평군에 봉하였다.
 
單이 攻狄三月不克하니 魯仲連이 曰將軍이 在卽墨에 曰無可往矣요 宗廟가 亡矣라 하여 將軍은 有死之心하고 士卒은 無生之氣하여 莫不揮泣하고 奮臂欲戰이러니 今에 將軍이 東有夜邑之奉하고 西有淄上之娛하여 黃金을 橫帶하고 騁乎淄澠之間하여 有生之樂하고 無死之心하니 故로 不勝也니라 單이 明日에 厲氣巡城하고 立於矢石之所하여 援枹鼓之하니 狄人이 乃下라 襄王이 旣立에 而孟嘗君이 中立爲諸侯하고 無所屬하니 王이 畏之하야 與連和하다 /狄북쪽오랑캐 적, 枹북채부, 졸참나무포, 揮(휘두를 휘) 澠(고을 이름 민{면},{강 이름 승})
전단이 북쪽 오랑캐를 석 달 동안 공격하여도 이기지 못하니 노중련이 말하기를 “장군이 즉묵에서 이르되 ‘갈 만한 데도 없고 종묘도 망했다’고 하여 장군은 죽을 마음만 있고 사졸은 살 기운이 없어 눈물을 뿌리고 팔을 휘둘러 싸우고자 하지 않을 수 없더니 지금에 장군은 동으로 야읍의 봉양이 있고 서쪽으로 치수가의 즐거움이 있어 황금을 가로 차고 치수와 승수 사이를 달려서 사는 즐거움만 있고 죽을 마음이 없으니 그래서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전단이 밝은 날에 기색을 엄숙히 하여 성을 순시하고 화살과 돌이 날라 오는 곳에 서서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리니 북쪽 오랑캐가 이에 항복했다. 양왕이 이미 즉위하자 맹상군이 가운데 서서 제후가 되고 속한 바가 없으니 왕이 두려워하여 더불어 화친했다.
 
初에 馮驩이 聞孟嘗君이 好客하고 而來見할새 置傳舍러니 十日에 彈劒作歌曰長鋏아 歸來乎여 食無魚이로다 遷之幸舍하니 食有魚矣어늘 又歌曰長鋏아 歸來乎여 出無輿이로다 遷之代舍하니 出有輿矣어늘 又歌曰長鋏아 歸來乎여 無以爲家로다 孟嘗君이 聞之하고 不悅이러니 時에 邑入이 不足以奉客하여 使人으로 出錢於薛하니 貸者가 多不能與息이라 孟嘗君이 乃進驩하여 請責之러니 驩이 往하여 不能與者는 取其卷燒之러니 孟嘗君이 怒한대 驩이 曰令薛民으로 親君이라 하더니 孟嘗君이 竟爲薛公하여 終於薛하니라 /驩기뻐할 환, 鋏가위 협, 칼 협, 卷두루마리 권,
처음에 풍환이 맹상군이 손님을 좋아함을 듣고 와서 보이니 전사(하등객관)에 머물게 하더니 열흘이 지나서 칼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큰 칼이여 돌아가자 밥상에 고기가 없구나.”라고 했다. 그를 행사(중등객관)로 옮기니 밥상에 고기가 있거늘 또 노래하기를, “큰 칼이여 돌아가자 나갈 때 수레가 없구나.” 했다. 대사(상등객관)로 옮기니 나갈 때 수레가 있거늘 또 노래하기를, “큰 칼이여 돌아가자 집을 꾸릴 게 없구나.” 했다. 맹상군이 듣고 기뻐하지 않더니 그 때 고을의 수입이 손님을 봉양하기 부족하여 사람을 시켜 돈을 설(고을)에서 내게 하니 (돈을) 빌린 사람이 이식을 많이 주지 못하는 지라 맹상군이 풍환을 나아가게 하여 그를 꾸짖게 했더니 풍환이 가서 돈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그 채권을 거두어 불살랐다. 맹상군이 성을 내니 풍환이 말하기를 설의 백성이 주군을 친하게 했다고 하더니 맹상군이 마침내 설공이 되어 설 고을에서 생을 마쳤다.
 
襄王이 卒하고 子建이 立하니 母君王后가 賢하여 事秦謹하고 與諸侯로 信이더니 君王后가 卒에 賓客이 多受秦金하고 爲反間하여 勸王朝秦하고 不修攻戰之備하고 不助五國攻秦이더니 秦王政이 旣滅五國하고 兵入臨淄하니 王建이 遂降이거늘 遷于共하여 處之松柏之間而死하고 以齊爲郡하니 齊人이 歌之曰松邪아 柏邪아 住建共者가 客邪아 하더라
양왕이 죽고 아들 건이 즉위하니 어머니 군왕후가 어질어서 진나라를 조심해서 섬기고 제후들과도 신의가 있더니 군왕후가 죽자 빈객이 진나라의 황금을 많이 받고 반간(간첩이 되어 이간질함)이 되어 왕을 권하여 진나라에 조회하게 하고 공격할 준비를 하지 않으며 다섯 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돕지 않더니 진나라 왕 정(나중의 진시황)이 이미 다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가 임치에 침입하니 임금 건이 마침내 항복하거늘 공(고을)에 옮겼다가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머물게 하여 죽으니 제나라를 진나라의 군으로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소나무인가 잣나무인가 건(왕)을 공(고을)에 머물게 한 자가 빈객인가.”라고 했다.
 
趙之先은 本與秦同姓하니 祖於蜚廉하여 有子季勝이러니 其後에 有造父者가 事周穆王하여 以功으로 封趙城하니 由是로 爲趙氏하니라 春秋時에 有趙夙者하니 事晉이러니 夙이 生成子衰(최)하고 衰生宣子盾하니 人이 曰 趙衰는 冬日之日이요 趙盾은 夏日之日이라 하니 冬日은 可愛하고 夏日은 可畏이러라 /蜚바퀴 비, 날 비, 盾방패 순, 사람이름 돈, 衰쇠할 쇠,상옷 최
조나라의 선조는 본디 진나라와 같은 겨레인데 비렴을 조상으로 하여 아들 계승이 있더니 그 뒤에 조보라는 사람이 있어 주나라 목왕을 섬겨서 공로로 조성에 봉해졌더니 이로 말미암아 조씨가 되었다. 춘추 때에 조숙이라는 사람이 있어 진나라를 섬겼는데 숙이 성자 조쇠를 낳았고 조쇠가 선자 조돈을 낳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쇠는 겨울날의 해요 조돈은 여름날의 해라 하니 겨울날의 해는 사랑함 직하지마는 여름날의 해는 두려워할 것이라.
 
盾이 生朔이러니 大夫屠岸賈가 滅朔之族할새 朔이 有遺腹子武하니 賈가 索之不得이거늘 朔의 客程嬰 公孫杵臼가 相與謀曰 立孤與死가 孰難고 嬰이 曰 死는 易하고 立孤는 難耳라 하니 杵臼가 曰 子爲其難하라 하고 杵臼가 取他兒하여 匿山中하고 嬰이 出하여 謬曰與我千金이면 吾가 告趙氏孤處이라 하니
조돈이 조삭을 낳았다. 대부 도안가가 조삭의 집안을 멸할 때에 조삭에게 유복자 무가 있었으니 도안가가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조삭의 문객인 정영과 공손저구가 서로 모의하여 이르기를 고아를 세우는 것과 죽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어려운가? 정영이 말하기를, “죽는 것은 쉽고 고아를 세우는 것은 어렵다.”고 하니 공손저구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려운 것을 하라.”고 했다. 공손저구가 다른 아이를 취하여 산중에 숨었는데, 정영이 나가서 속여 말하기를, “나에게 천금을 주면 조씨의 고아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賈가 喜하여 乃使人으로 隨嬰하여 殺杵臼及兒 而趙氏眞孤는 在러니 嬰이 後에 與武로 滅賈하고 竟立武而自殺以下하여 報宣孟及杵臼하니라 武가 卒하니 號를 文子라 하다 文子가 生景叔하고 景叔이 生簡子鞅하니라 簡子가 有臣하니 曰周舍라 死커늘 簡子가 每聽朝에 不悅曰 千羊之皮不如一狐之腋하니 諸大夫가 朝에 徒聞唯唯하고 不聞周舍之鄂鄂也라 하더라 /宣孟:趙盾의 諡號, 鞅가슴걸이 앙, 唯唯 예예, 鄂땅이름 악, 곧은 말 할 악, 鄂鄂직언하는 모양
도안가가 기뻐하여 이에 사람을 시켜 정영을 따라가서 공손저구와 아이를 죽이게 하니 조씨의 진짜 고아는 살아남았다. 정영이 뒷날에 조무와 더불어 도안가를 멸하고 마침내 조무를 (주군으로) 세우고 자살하여 죽어서 선자의 맏이(趙朔)와 공손저구에게 보답하니라. 조무가 죽으니 시호를 문자라 했다. 문자가 경숙을 낳고 경숙이 간자 앙을 낳았다. 조간자에게 신하가 있었는데 주사라고 했다. 그가 죽거늘 조간자가 매양 조회를 할 때에 기뻐하지 않고 말하기를, “천 마리 양 가죽이 한 마리 여우 겨드랑이 가죽만 못하니 여러 대부들이 조회에서 한갓 예예라고만 하고 주사처럼 바른 말 하는 것을 듣지 못하겠구나.”라고 했다.
 
簡子의 長子는 曰伯魯요 幼는 無恤이니 書訓戒之辭於二簡하여 以授二子 曰謹識之하라 하고 三年而問之한데 伯魯는 不能擧其辭하고 求其簡하니 已失之矣오 無恤은 誦其辭甚習하고 求其簡하니 出諸懷中而奏之어늘 於是에 立無恤爲後하다. /魯노둔할 노,
간자의 장자는 백노요 어린 동생은 무휼이니 두 개의 대쪽에다 훈계의 말을 써 두 아들에게 주고 이르되 조심해서 기억하라고 하고 삼년 뒤에 물으니 백노는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대쪽을 보자 하니 이미 잃어버렸더라. 무휼은 그 말을 아주 익숙하게 외었고 그 대쪽을 보자 하니 품속에서 내어서 드리니 이에 무휼을 세워 후사로 삼으니라.
 
簡子가 使尹鐸으로 爲晉陽이러니 請曰以爲繭絲乎잇가 以爲保障乎잇가 簡子가 曰保障哉고저 尹鐸이 損其戶數하다 簡子가 謂無恤曰晉國에 有難이거든 必以晉陽爲歸하라 簡子가 卒하고 無恤이 立하니 是爲襄子라 智伯이 求地於韓魏하니 皆與하되 求於趙하니 不與거늘 /尹다스릴 윤, 성 윤, 繭고치 견,
간자가 윤탁을 시켜 진양을 다스리게 하더니 (윤탁이) 청하기를 누에고치처럼 세금을 내놓게 할까요? 지키고 막아서 울타리로 삼을까요? 하니 간자가 울타리로 삼고자 한다고 했다. 윤탁이 (장부상) 그 호수를 줄여서 세금을 가볍게 했다. 간자가 무휼에게 이르기를 진나라에 난리가 나면 반드시 진양에 돌아가도록 해라고 했다. 간자가 죽고 무휼이 서니 이가 양자라 지백이 한나라와 위나라에게 땅을 요구하니 모두 주었지만 조나라에게 요구하니 땅을 주지 않았다.
 
率韓魏之甲하고 以攻趙하니 襄子가 出走晉陽이거늘 三家가 圍而灌之하니 城不浸者가 三版이요 沉竈産䵷하되 民無叛意더라 襄子가 陰與韓魏로 約하고 共敗智伯하여 滅智氏而分其地하다 襄子가 漆智伯之頭하여 以爲飮器더니 智伯之臣豫讓이 欲爲之報仇하여 /竈부엌 조, 䵷개구리 와, 仇원수 구
한나라와 위나라의 무장병을 거느리고 조나라를 공격하니 양자가 진양으로 달아나거늘 세 집안(지백과 한, 위)이 둘러싸고 물을 대니 성에서 잠기지 않은 곳이 3판(판은 석자 넓이)이요 부엌이 잠겨 올챙이가 생겼지만 백성이 배반할 뜻이 없더라. 양자가 남몰래 한나라와 위나라와 약속하고 함께 지백을 패퇴시켜서 지씨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었다. 양자가 지백의 해골에 옻칠을 하여 마시는 그릇으로 삼았더니 지백의 신하 예양이 원수를 갚고자 하여
 
乃詐爲刑人하여 挾匕首하고 入襄子宮中하여 塗厠이러니 襄子가 如厠이라가 心動索之하여 獲讓하여 問曰 子不嘗事范中行氏乎아 智伯이 滅之하되 子가 不爲報仇하고 反委質於智伯이러니 智伯이 死에 子獨何爲報讐之深也오 曰范中行氏는 衆人遇我하니 我故衆人報之하고 智伯은 國士遇我하니 我故國士報之하노라 /塗진흙 도, 칠할 도, 厠뒷간 측, 范풀이름 범, 讐원수 수,
이에 거짓 형벌 받은 사람이 되어 비수를 끼고 양자의 궁중에 들어가서 뒷간에 붙어 숨었더니 양자가 뒷간에 갔다가 심장이 뛰어 수색하여 예양을 잡았다. 묻기를,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그를 멸하니 그대가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지백에게 예물을 맡기고 (신하가 되더니) 지백이 죽으니 그대가 홀로 어찌하여 원수 갚기를 심히 하는가?” 하였다. (예양이) 말하기를, “범씨와 중행씨는 뭇사람으로 나를 대우하였으니 내가 그런 고로 뭇사람으로 갚았고 지백은 나를 국사로 대우하였으니 내가 그런 고로 국사로 갚는 것이라.”고 하였다.
 
襄子가 曰智伯이 死無後거늘 而此人이 欲爲報仇하니 眞義士也라 舍之하라 謹避而已니라 하더니 讓이 又漆身爲癩하고 呑炭爲啞하여 行乞於市하니 其妻는 不識也로되 其友가 識之하다 曰以子之才로 臣事趙孟이면 必得近幸하리니 子乃爲所欲爲顧不易邪아 何乃自苦如此오
양자가 말하기를, “지백이 죽고 뒤가 없거늘 이 사람이 그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하니 참으로 의사로다. 풀어주라 내가 조심하여 피하면 그만이라.”고 하였다. 예양이 또 몸에 옻을 칠하여 문둥이가 되고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 시장에서 구걸하니 그 아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벗이 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로 조씨 어른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 반드시 가까이 총애를 받을 것이니 그대가 이에 하고자 하는 바를 함이 생각건대 쉽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이에 스스로 이같이 고생스럽게 하는가?”라고 했다.
 
讓이 曰不可하다 旣委質爲臣하고 又求殺之면 是는 二心也라 凡吾所爲者는 極難耳나 然이나 所以爲此者는 將以愧天下後世에 爲人臣懷二心者也이라 하더라 襄子가 出할새 讓이 伏於橋下이더니 襄子의 馬가 驚이거늘 索之하여 得讓하니 遂殺之하다
예양이 말하기를, “안 된다. 이미 예물을 드리고 신하가 되어서 또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이것은 두 마음이라. 무릇 내가 하려고 하는 바는 지극히 어려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바는 장차 천하와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양자가 밖으로 나갈 때 예양이 다리 아래에 숨었더니 양자의 말이 놀라거늘 수색하여 예양을 잡았다. 마침내 그를 죽였다.
 
襄子가 立伯魯之孫浣하니 是爲獻子라 獻子가 生烈侯籍이러니 以周威烈王命으로 爲侯하다 歷武侯 敬侯 成侯하고 至肅侯하니 秦人이 恐喝諸侯하여 求割地거늘 有洛陽蘇秦이 游說秦惠王하되 不用이거늘 乃往說燕文侯하여 與趙從親하니 燕이 資之以至趙거늘 /浣 씻을 완,
양자가 백노의 손자 완을 세우니 이가 헌자라. 헌자가 열후 적을 낳으니 주나라 위열왕의 명으로 제후가 되었다. 무후와 경후와 성후를 지나 숙후에 이르니 진나라 사람이 제후들을 공갈하여 땅을 쪼개 주기를 요구하거늘 낙양 사람 소진이 진나라 혜왕을 설득하였으나 (그의 말을) 쓰지 않으니 이에 가서 연나라 문후를 설득하여 조나라와 합종책으로 친하니 연나라가 그에게 재물을 주어 조나라로 가게 했다.
 
說肅侯曰諸侯之卒이 十倍於秦하니 幷力西向이면 秦을 必破矣리니 爲大王計커니 莫若六國이 從親하여 以擯秦이라 하니 肅侯가 乃資之하여 以約諸侯하니 蘇秦이 以鄙諺으로 說諸侯曰寧爲鷄口언정 無爲牛後라 하니 於是에 六國이 從合하다 /倍 곱 배, 鄙더러울 비,
(조나라) 숙후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제후들의 군사가 진나라보다 열 배나 되니 힘을 모아 서쪽(진나라)으로 향하면 진나라를 반드시 깨트릴 것이라. 대왕을 위해 꾀하노니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친하여 진나라를 막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고 하니 숙후가 이에 재물을 주어 제후들에게 약속을 하니 소진이 속담으로 제후들을 설득하기를, “차라리 닭의 주둥이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말라.”라고 하니 이에 여섯 나라가 서로 연합하였다.
 
蘇秦者는 師鬼谷先生이더니 初出遊라가 困而歸하니 妻不下機하고 嫂不爲炊더니 至是에 爲從約長하여 幷相六國하여 行過洛陽할새 車騎輜重이 擬於王者하니 昆弟妻嫂가 側目不敢仰視하고 俯伏侍取食이거늘 蘇秦이 笑曰何前倨而後恭也오 嫂가 曰 見季子의 位高金多也라 하니 /輜짐수레 치, 倨거만할 거
소진이란 자는 귀곡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처음으로 나와 돌아다니다가 곤란하여 (집으로) 돌아가니 아내는 베틀에서 나려오지 않고 형수는 밥을 지어주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여섯 나라의) 종약장이 되어 아울러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어 낙양을 지나가는데 차마와 짐수레가 임금 행차와 비슷하니 형제와 아내 형수가 곁눈으로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엎드려 모시고 밥을 먹거늘 소진이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전에는 거만하더니 뒤에는 공손합니까?” 하니, 형수가 말하기를, “계자(소진의 자)의 자리가 높고 금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秦이 喟然歎曰此一人之身이 富貴則親戚이 畏懼之하고 貧賤則輕易之거든 況衆人乎아 使我로 有洛陽負郭田二頃이면 豈能佩六國相印乎아 하고 於是에 散千金하여 以賜宗族朋友하다 旣定從約하고 歸趙하니 肅侯가 封爲武安君이러니 其後에 秦이 使犀首로 欺趙하여 欲敗從할새 約齊魏伐趙하니 蘇秦이 恐하여 去趙而從約이 解더라 /喟한숨 위,
소진이 한숨 쉬며 탄식하기를, “이 한 사람의 몸이 부귀하면 친척이 두려워하고 빈천하면 가벼이 여기거늘 하물며 뭇사람들이랴. 나로 하여금 낙양 성곽에 등진 밭 두 이랑이 있었다면 어찌 능히 여섯 나라 재상의 도장을 찰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이에 천금을 흩어서 종족과 벗들에게 주었다. 이미 합종의 약속을 정한 뒤에 조나라로 돌아가니 숙후가 그를 무안군에 봉했다. 그 후에 진나라가 서수를 시켜 조나라를 속이고 합종책을 깨트리려 할 새 제나라와 위나라와 약속하고 조나라를 치니 소진이 두려워하여 조나라를 떠나자 합종의 맹약이 풀어졌다.
 
肅侯의 子 武靈王이 立하여 始胡服하고 招騎射略胡地하며 滅中山하고 欲南襲秦이다가 不果하고 傳子惠文王하니 惠文이 嘗得楚和氏璧이러니 秦昭王이 請以十五城으로 易之어늘 欲不與이나 畏秦强하고 欲與이나 恐見欺러니 藺相如가 願奉璧往이다가 城不入則臣請完璧以歸하리이다 旣至 秦王이 無意償城이거늘 相如가 乃紿取璧하고 怒髮이 指冠하야 卻立柱下曰 臣頭가 與璧俱碎이라 하고 遣從者하여 懷璧間行先歸하고 身待命於秦하니 秦昭王이 賢而歸之하다 /藺골풀 린, 갚을 상, 紿속일 태,
숙후의 아들 무령왕이 서서 처음으로 오랑캐 옷을 입고 말 타고 활 쏘는 군사를 불러 오랑캐 땅을 빼앗으며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진나라를 습격하려다가 그러지 못했다. 아들 혜문왕에게 (왕위를) 전하니 혜문왕이 일찍이 초나라 화씨의 둥근 옥을 얻었는데 진나라 소왕이 열다섯 개 성으로 바꾸기를 청하니 주고 싶지 않았지만 진나라의 강함이 두렵고 주려고 하나 속임을 당할까 두려웠다. 인상여가 진나라에 둥근 옥을 받들고 가기를 원하여 성을 주지 않으면 곧 신이 둥근 옥을 완전히 하여 돌아오겠다고 청하였다. 이미 (진나라에) 이르니 진나라 왕이 성으로 갚아줄 뜻이 없거늘 인상여가 이에 속여서 둥근 옥을 취하고 성낸 머리털이 곤두서서 갓을 찌르니 물러나 기둥 아래 서서 말하기를, “신의 머리가 둥근 옥과 함께 부서질 것이라.” 하고 따르는 자를 보내어 둥근 옥을 품고 샛길로 먼저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진나라의 명령을 기다리니 진나라 소왕이 그를 현명하다고 여겨 돌아가게 하였다.
 
秦王이 約趙王會澠池할새 相如가 從이더니 及飮酒에 秦王이 請趙王鼓瑟하니 趙王이 鼓之어늘 相如가 請秦王擊缶하여 爲秦聲하니 秦王이 不肯이거늘 相如가 曰 五步之內에 臣이 得以頸血로 濺大王하리이다 左右가 欲刃之러니 相如가 叱之하니 皆靡라 秦王이 爲一擊缶하니 秦이 終不能有加於趙하고 趙亦盛爲之備하니 秦不敢動이더라 /缶장군 부, 濺흩뿌릴 천, 叱꾸짖을 질, 靡쓰러질 미, 복종할 미, 澠고을 이름 민(면), 강 이름 승.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과 민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상여가 따라 갔더니 술을 마시기에 이르러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에게 비파를 연주하라고 청하니 조나라 왕이 연주하거늘 상여가 진나라 왕에게 장군을 쳐서 진나라 소리를 들려주기를 청하니 진나라 왕이 기뻐하지 않거늘 상여가 말하기를, “ 다섯 걸음 안에 신이 (대왕의) 목의 피를 얻어서 대왕께 뿌리겠습니다.”라고 하니 (진나라 왕의) 좌우 신하들이 그를 찌르려 했다. 상여가 그들을 꾸짖자 모두 그만 두었다. 진나라 왕이 장군을 한번 두드리니 (그 사이에) 진나라가 끝내 조나라에 (군사를) 투입하지 못했고, 조나라 또한 성대하게 그에 대한 대비를 하여서 진나라 (군사)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趙王이 歸하여 以相如로 爲上卿하니 在廉頗右라 頗가 曰 我는 爲趙將하여 有攻城野戰之功하고 相如는 素賤人이라 徒以口舌로 居我上하니 吾가 羞爲之下이라 我見相如면 必辱之하리라 相如가 聞之하고 每朝에 稱疾하여 不欲與爭列하고 出이라가 望見이면 輒引車避匿하니 其舍人이 皆以爲恥한데 相如가 曰 夫以秦之威으로 相如廷叱之하여 辱其群臣하니 相如가 雖駑나 獨畏廉將軍哉아 顧念强秦이 不加於趙者는 徒以吾兩人在也라 今兩虎가 共鬪면 其勢不俱生하리니 吾所以爲此者는 先國家之急而後私仇也라 하니 頗가 聞之하고 肉袒負荊하고 詣門謝罪하여 遂爲刎頸之交하다 /袒웃통 벗을 단,
조나라 왕이 돌아와서 인상여로 상경을 삼으니 염파의 위였다. 염파가 말하기를, “나는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운 공이 있는데 인상여는 본디 천한 사람으로 한갓 입과 혀로 나보다 위에 있으니 나는 그의 아래가 된 것을 부끄러워한다. 내가 인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욕보일 것이다.”라고 했다. 인상여가 그 말을 듣고 매양 아침(조회)이면 아프다고 일컫고 반열을 다투려고 하지 않고 나가다가 멀리서 보면 문득 수레를 끌어 피하여 숨으니 그 집사가 모두 부끄럽게 여겼다. 인상여가 말하기를, “무릇 진나라의 위엄으로도 나는 그 조정에서 꾸짖어 여러 신하들을 욕보였는데 내가 비록 노둔하지만 홀로 염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돌아보아 생각건대 강한 진나라가 조나라에 군대를 투입시키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 이제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그 형세가 모두 살지는 못할 것이니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나라의 급함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하는 것이라 하니 염파가 그 말을 듣고 웃통을 벗어 살을 내놓고 가시나무 매를 지고 그 문전에 이르러 사죄하고 드디어 목을 내놓는 친구가 되었다.
 
惠文王 子 孝成王이 立이더니 秦이 伐韓하니 韓上黨이 降於趙어늘 秦이 攻趙하니 廉頗가 軍長平하고 堅壁不出하니 秦人이 行千金爲反間曰 秦은 獨畏馬服君趙奢之子括이 爲將耳라 하니 王이 使括로 代頗하니 相如가 曰 王이 以名使括하시니 若膠柱鼓瑟耳라 括이 徒能讀父書하고 不知合變也이니이다 王이 不聽이러라
혜문왕의 아들 효성왕이 서더니 진나라가 한나라를 쳤고 한나라 상당 고을이 조나라에 항복하였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니 염파가 장평에 진을 치고 성벽을 견고히 하여 나가지 않으니 진나라 사람이 천금을 풀어서 반간계(이간질)를 행하여 말하기를, “진나라는 오직 마복군 조사의 아들 괄이 장군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조나라) 왕이 조괄을 시켜 염파를 대신하게 하니 인상여가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이름만 듣고 조괄을 시키시니 마치 기러기발을 붙여놓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한갓 아비의 책을 잘 읽었을 뿐이고 변화에 조합함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括이 少學兵法할새 以天下가 莫能當이라 하여 與父奢로 言之에 奢가 不能難이나 然이나 不謂善也라 括母가 問故한대 奢曰 兵은 死地也라 而括이 易言之하니 趙若將括이면 必破趙軍이라 하더니 及括이 將行에 其母가 上書言括을 不可使라 하더니 括이 至軍하여 果爲秦將白起의 所射殺하고 卒四十萬이 皆降이러니 坑於長平하다 趙相平原君公子勝의 食客이 常數千人이러니 客有公孫龍者하니 能爲堅白同異之辯이러라 /爲-所;누구에게 어찌한 바 되다,
조괄이 어려서 병법을 배웠는데 천하에 능히 당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아비 조사와 더불어 말했는데, 조사가 능히 흠잡지 못하나 그러나 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괄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으니 조사가 말하기를 “전쟁이란 죽는 상황이다. 괄이 쉽게 그것을 말하니 조나라에서 만일 괄을 장수로 삼으면 반드시 조나라 군사를 깨트릴 것이다.”라고 했다. 조괄이 장차 장군이 되어 가기에 이르자 그 어머니가 상서하여 괄을 시킬 만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괄이 군에 도착하여 과연 진나라 장군 백기에서 사살 당하고 군사 사십만이 모두 항복했더니 장평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조나라 재상 평원군 공자 승의 식객이 항상 수천 명이었는데 손님 중에 공손룡이라는 사람이 있어 굳은 것과 흰 것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변론을 잘했다.
 
秦이 攻趙邯鄲하니 平原君이 求救於楚할새 擇門下에 文武備具者二十人하여 與俱하되 得十九人이러니 毛遂가 自薦이거늘 平原君이 曰 士의 處世若錐處囊中하여 其末이 立見하나니 今先生이 處門下三年에 未有聞이라 하니 遂가 曰 使遂로 得處囊中이러면 乃脫穎而出이요 非特末見而已니이다 平原君이 乃以備數하니 十九人이 目笑之러니 至楚하여 定從不決이거늘 毛遂가 按劍歷階升曰 從之利害는 兩言而決耳거늘 今日出而言하여 日中不決은 何也오 楚王이 怒叱曰 胡不下오 吾與而君으로 言하니 汝는 何爲者오 /邯땅이름 한, 鄲조나라 서울 단, 囊주머니 낭, 穎이삭 영, 자우 영, 뾰족한 끝 영, 特수컷 특, 빼어날 특, 按누를 안, 어루만질 안,
진나라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니 평원군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문하에서 문무를 겸비한 스무 명을 골라서 함께 하려고 열아홉 명을 얻었다. 모수가 스스로 천거하거늘 평원군이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처함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처함과 같아서 그 끝이 서서 보이거늘 지금 선생이 문하에 처한 지 삼년이되 들은 바가 없다.”고 하니 모수가 말하기를, “모수로 하여금 주머니 속에 처하게 했으면 이에 자루가지 나왔을 것이요 특별히 끝만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평원군이 이에 숫자를 채웠다. 열아홉 명이 눈으로 웃더니 초나라에 이르러 합종책을 정함에 결정하지 못하거늘 모수가 칼을 어루만지며 계단을 지나 올라가서 말하기를, “합종책의 이해는 두 마디 말로 결정하겠거늘 이제 해가 떠서 말을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와도 결정을 못하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하니, 초나라 왕이 성내어 꾸짖기를, “어찌 내려가지 않는고? 내가 너의 주군과 말하는데 너는 무엇 하는 자이냐?”라고 했다.
 
毛遂가 按劍而前曰 王所以叱遂者는 以楚國之衆也이나 今十步之內에 不得恃楚國之衆也요 王之命이 懸於遂手하니이다 以楚之强으로 天下가 莫能當이거늘 白起는 少竪子耳라 一戰而擧鄢郢하고 再戰而燒夷陵하여 三戰而辱王之先人하니 此는 百世之怨이요 趙之所羞이라 合從은 爲楚요 非爲趙也라 하니 王이 曰 唯唯이라 誠若先生之言이로다 謹奉社稷以從하리라 遂가 曰 取鷄狗馬之血來하라 捧銅盤하여 跪進曰 王當歃血以定從하소서 次者는 吾君이요 次者는 遂이라 하고 左手로 持盤하고 右手로 招十九人하여 歃血於堂下 曰 公等은 碌碌하니 所謂因人成事者也라 하더라 平原君이 定從하고 歸하여 曰 毛先生이 一至楚에 使趙로 重於九鼎大呂라 하고 以遂로 爲上客하다 /竪더벅머리 수(豎의 속자), 鄢고을 이름 언, 郢땅 이름 영, 呂음률 려) 碌(돌 모양 록)
모수가 칼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왕께서 모수를 꾸짖는 까닭은 초나라의 (많은) 무리 때문입니다마는 지금 열 걸음 안에는 초나라의 무리를 믿을 수 없는 것이요 왕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초나라의 강함은 천하가 당할 수 없거늘 백기는 어린 더벅머리인데 한번 싸워 언과 영을 점령했고 두 번 싸워 이릉을 불태웠으며 세 번 싸워 왕의 아버지를 욕보였으니 이는 백세의 원통함이요 조나라도 수치스러워하는 바입니다. 합종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렇소, 그렇소. 참으로 선생의 말과 같소이다. 삼가 사직을 받들어 따르겠소.”라고 했다. 모수가 말하기를, “닭과 개와 말의 피를 취하여 가지고 오라.” 하고 구리 쟁반을 받들어 꿇어앉아 드리며 말하기를, “왕께서 마땅히 피를 (입에)발라 합종책을 정하시고 다음은 우리 주군이요 다음은 접니다.” 하고 왼손으로 쟁반을 받들고 오른 손으로 열아홉 사람을 불러 당 아래에서 피를 바르게 하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녹록하니 이른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룬 사람이라.” 하더라. 평원군이 합종책을 정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모 선생이 한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로 하여금 구정(우임금이 지은 솥) 대려(주나라 종묘의 큰 종) 보다 무겁게 하였다.” 하고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楚將春申君이 救趙할새 會에 魏信陵君이 亦來救趙하여 大破秦軍邯鄲下하다 孝成王의 子 悼襄王이 立하다 思復用廉頗爲將이러니 時에 頗가 奔在魏라 遣人視頗할새 頗之仇郭開與使者金하여 令毁之하니 頗가 見使者하고 一飯에 斗米 肉十斤하고 披甲上馬하여 以示可用이러니 使者還曰 廉將軍이 尙善飯이나 然이나 與臣坐頃之에 三遺矢矣러이다 王이 以爲老하여 遂不召러니 楚人이 迎頗於魏하니 頗가 爲楚將無功하고 曰我가 思用趙人이라 하더니 尋卒하다 趙가 得李牧爲將에 先居北邊하여 破匈奴러니 悼襄子의 子 幽繆王遷이 立하니 秦王政이 遣兵攻趙할새 牧이 爲大將하여 敗之하니 秦이 縱反間하여 言牧이 將反이라 하니 遷이 誅之러니 秦兵이 至하여 虜遷하다 趙之亡에 大夫가 立趙嘉爲王하여 王于代러니 秦이 進攻破代하고 遂滅趙爲郡하다 /繆얽을무, 화목할목,
초나라 장수 춘신군이 조나라를 구원하니 마침 위나라 신릉군이 또한 와서 조나라를 구원하여 진나라 군사를 한단 근처에서 크게 깨트렸다. 효성왕의 아들 도양왕이 서서 다시 염파를 장군으로 쓰려고 생각했더니 그 때에 염파가 위나라에 달아나 있었다. 사람을 보내 염파를 만나게 했는데 염파의 원수 곽개가 사자에게 금을 주어 그를 헐뜯게 하니 염파가 그 사자를 보고 한 끼에 한 말 밥과 고기 열 근을 먹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가히 쓸 수 있음을 보여주더니 사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염장군이 아직 밥을 잘 먹지만 그러나 저와 앉았을 때에 세 번을 오줌 누러 갔습니다.”고 하니 왕이 (염파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부르지 않았다. 초나라 사람이 염파를 위나라에서 맞이하니 염파가 초나라 장수가 되어 공을 세우지 못하고 말하기를, “나는 조나라 사람이 쓰기를 생각한다.”고 하더니 이윽고 죽었다. 조나라가 이목을 얻어 장군으로 삼으니 먼저 북쪽 변경에서 머물며 흉노를 쳐부수었다. 도양왕의 아들 유목왕 천이 서니 진나라 왕 정이 군대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했다. 이목이 대장이 되어 패퇴시키니 진나라가 반간계를 풀어서 이목이 장차 반역할 것이라고 말하자 (유목왕) 천이 그를 죽였고, 진나라 군대가 이르러 천을 사로잡았다. 조나라가 망하자 대부(귀족)들이 조가를 세워 왕으로 삼아 대에서 왕노릇하게 하였더니 진나라가 나아가 공격하여 대를 깨트리고 마침내 조나라를 멸하여 군으로 삼았다.
 
魏之先은 本與周同姓하니 文王의 子畢公高之後也라 國絶하고 有苗裔하니 曰畢萬이라 事晋하여 邑于魏러니 數世에 有絳하고 絳後四世에 有桓子者하니 與韓趙로 共滅智氏而分之하다 桓子之孫曰文侯斯者가 以周威烈王命으로 爲侯하여 以卜子夏田子方으로 爲師하고 過段干木之閭에 必式하니 四方賢士가 多歸之더라 文侯之子 擊이 遇子方于道하여 下車伏謁하되 子方이 不爲禮하니 擊이 怒曰富貴者가 驕人乎아 貧賤者가 驕人乎아 子方이 曰 亦貧賤者驕人이니 富貴者가 安敢驕人이리오 國君이 驕人이면 失其國하고 大夫가 驕人이면 失其家하되 夫士는 貧賤者라 言不用行不合則納履而去하나니 安往而不得貧賤哉리오 擊이 謝之하다. /絳진홍 강,
위나라의 선조는 본디 주나라와 더불어 성이 같으니 문왕의 아들 필공 고의 후손이라. 나라는 끊어지고 후손은 있었는데 필만이라고 했다. 진나라를 섬기다가 위의 안읍에 도읍하였더니 여러 대 후에 강이 나고 강의 네 대 후에 환자라는 이가 있으니 한나라와 조나라와 함께 지씨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었다. 환자의 손자에 문후 사라는 사람이 있어 주나라 위열왕의 명으로써 제후가 되어 복자하와 전자방으로써 스승을 삼고 단간목의 집을 지날 때 반드시 수레에서 예를 표하니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많이 모였다. 문후의 아들 격이 전자방을 길에서 만나서 수레에서 내려 엎드려 뵈었으나 자방이 예를 표하지 아니하니 격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부귀한 자가 사람들에게 교만합니까? 빈천한 자가 사람들에게 교만합니까?” 하니, 전자방이 말하기를, “또한 빈천한 자가 사람들에게 교만할 것이니 부귀한 자가 어찌 감히 사람들에게 교만하리오. 나라 임금이 사람들에게 교만하면 그 나라를 잃게 되고 대부가 사람들에게 교만하면 그 가문을 잃을 것이지만 대체로 저 선비는 빈천한 자라 제 말을 쓰지 아니하고 그 행동이 맞지 아니하면 곧 신발을 챙겨 가 버리니 어디 간들 빈천을 얻지 못하리오.” 했다. 격이 사례했다.
 
文侯가 謂李克曰 先生이 嘗敎寡人하되 家貧에 思賢妻하고 國亂에 思良相이라 하더니 今所相이 非魏成則翟璜이니 二子가 何如오 克이 曰居視其所親하고 富視其所與하고 達視其所擧하며 窮視其所不爲하고 貧視其所不取하나니 五者에 足以定之矣리이다 卜子夏田子方段干木은 成의 所擧也라 乃相成하다 有衛人吳起者가 初仕魯할새 魯欲使起로 擊齊而起娶齊女하니 疑之러니 起殺妻以求將하여 大破齊師하니 或이 曰起는 殘忍薄行人也라 하니 起恐得罪하여 亡歸魏하니 文侯가 以爲將하여 拔秦五城하다 起與士卒로 同衣食하고 卒有病疽거늘 起吮之하니 卒母가 聞之하고 哭曰 往年에 吳公이 吮其父하니 不旋踵死敵이러니 今又吮其子하니 妾이 不知其死所矣라 하더라 /璜패옥 황, 娶장가들 취, 踵발꿈치 종,
문후가 이극에게 말하기를, “선생이 일찍이 과인을 가르치되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을 생각한다고 하더니 이제 재상할 사람이 위성 아니면 적황이니 이 두 사람이 어떠합니까?” 하니, 이극이 말하기를, “(평소) 지낼 때에 그 친한 바를 보고, 넉넉할 때 그 주는 바를 보고, 영달했을 때 그 천거하는 바를 보고, 곤궁했을 때 그 하지 않는 바를 보고, 가난할 때 그 취하지 않는 바를 보는데, 그 다섯 가지로 족히 정할 수 있습니다. 복자하와 전자방과 단간목은 위성이 천거한 것입니다.” 라고 하니, 이에 위성을 재상으로 삼았다. 위나라 사람 오기라는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노나라에 벼슬하였더니 노나라에서 오기로 하여금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되 오기가 제나라 여자에게 장가들었기에 의심하더니 오기가 아내를 죽이고 장수되기를 구하여 크게 제나라 군대를 깨트리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기는 잔인하고 행실이 박한(은덕이 없는) 사람이라.” 하니 오기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위나라에 망명하니 문후가 그를 장수로 삼아 진나라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오기가 사졸과 더불어 입고 먹는 것을 같이 하고 병졸이 등창이 나자 오기가 곪은 곳을 빨았다. 병졸의 어미가 그 사실을 듣고 울며 말하기를, “지난해에 오공이 그 아비의 상처를 빨더니 발꿈치를 돌리지(달아나지) 않고 적에 맞서 죽더니 이제 또 그 아들의 상처를 빠니 내가 아들의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文侯가 卒하고 擊이 立하니 是爲武侯라 武侯가 浮西河而下할새 中流에 顧謂吳起曰 美哉라 山河之固여 魏國之寶也로다 起曰在德이요 不在險하니 昔에 三苗氏는 左洞庭이요 右彭蠡로되 禹가 滅之하고 桀之居는 左河濟하고 右泰華하며 伊闕이 在其南하고 羊腸이 在其北하되 湯이 放之하고 紂之國은 左孟門이요 右太行이요 恒山이 在其北하고 大河가 經其南하되 武王이 殺之하니 若不修德이면 舟中之人이 皆敵國也라 하니 武侯曰善이라 하다 /彭땅이름 팽, 蠡좀 먹을 려,
문후가 죽고 격이 즉위하니 이가 무후가 되었다. 무후가 서하에 (배를) 띄우고 내려가며 중류에서 오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나라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가 말하기를, “(나라의 견고함은) 덕에 있지 험함에 있지 않습니다. 옛날 삼묘씨는 왼쪽에 동정호요 오른쪽에 팽려호를 두었지만 우임금이 멸하였고, 걸왕이 있을 때에 왼쪽엔 황하와 제수요 오른쪽엔 태화산이요 이궐은 남쪽에 있고 양장은 북쪽에 있었지만 탕왕이 쫓아내었고, 주임금의 나라는 왼쪽에 맹문이요 오른쪽엔 태행산이요 항산은 북쪽에 있고 큰 강물은 남쪽을 지나가는데 무왕이 그를 죽였습니다. 만약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위의 사람들이 모두 적국입니다.” 하니, 무후가 “그렇다.”고 말했다.
 
武侯가 卒하고 子惠王罃이 立하여 東敗於齊에 將軍龐涓이 與太子申으로 皆死하고 南敗於楚하며 西喪地於秦하고 乃卑辭厚幣하여 以招賢者할새 孟子가 至而不能用이러니 襄王이 立하니 孟子가 去之齊하니라 魏人에 有張儀者가 與蘇秦으로 同師하고 嘗遊楚더니 爲楚相의 所辱하니 妻가 慍有語거늘 儀曰視吾舌하라 尙在否아 하더니 蘇秦이 約從時에 激儀使入秦하니 儀曰蘇君之時에야 儀何敢言이리오 하더니 蘇秦이 去趙而從이 解하니 儀專爲橫하여 連六國以事秦하니라 秦惠王時에 儀嘗以秦兵으로 伐魏하여 得一邑이다가 復以與魏而欺魏하여 割地以謝秦하고 歸爲秦相이더니 已而오 出爲魏相하니 實爲秦地더니 襄王時에 復歸相秦이다가 已而오 復出相魏以卒하다 /罃물독앵, 龐클방, 涓시내 연, 激부딪힐 격,
무후가 죽고 아들 혜왕 앵이 즉위했다. 동쪽으론 제나라에 패하여 장군 방연과 태자 신이 모두 죽고, 남쪽으론 초나라에 패하였으며, 서쪽으론 진나라에게 땅을 빼앗겠다. 이에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어진 사람을 초청하니 맹자가 이르렀지만 등용하지 못했다. 아들 양왕이 즉위하니 맹자는 제나라로 가버렸다. 위나라 사람 장의라는 자가 있어 소진과 같은 스승에게 배워 일찍이 초나라에 머물다가 초나라 재상에게 욕을 당하게 되니 그 처가 성을 내어 말하니 장의가 말하기를, “내 혀를 봐라. 아직 있느냐?” 하더니, 소진이 합종을 맺을 적에 장의를 격동시켜 진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장의가 말하기를, “소진이 있을 때에야 장의가 어찌 감히 말을 하리오.” 하더니, 소진이 조나라를 떠나고 합종이 풀어지니 장의가 오로지 연횡을 주장하여 여섯 나라를 이어서 진나라를 섬기게 하니라. 진나라 혜왕 때에 장의가 일찍이 진나라 군대로 위나라를 정벌하여 한 고을을 얻었다가 다시 위나라에 돌려주고 위나라를 속여서 땅을 쪼개어 진나라에 사례하게 하고 돌아가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더니 이윽고 나와서 위나라 재상이 되니 실상은 진나라 땅을 위함이더니 양왕 때에 다시 돌아가서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가 이윽고 다시 나와서 위나라의 재상이 되어 죽었다.
 
魏安釐王이 立에 封公子無忌하여 爲信陵君하니 無忌愛人下士하여 食客이 三千人이더라 秦이 攻趙할새 魏王이 使晋鄙로 救之러니 秦昭王이 欲移兵先擊救者하니 王이 恐하여 止晋鄙兵하여 壁于鄴하고 又使新垣衍으로 說趙하여 共尊秦爲帝하니 魯仲連이 往見衍曰彼秦者는 棄禮義上首功之國也라 卽肆然帝天下則連이 有蹈東海而死耳라 하니 衍이 再拜曰先生은 天下士也라 吾가 不敢復言帝秦矣라 하더라 /釐다스릴 리, 鄙더러울 비, 변방 비, 鄴땅 이름 업,
위나라 안리왕이 즉위하여 공자 무기를 봉하여 신릉군을 삼으니 무기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거느려서 식객이 삼천명이더라.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니 위나라 왕이 진비를 시켜 구하더니 진나라 소왕이 군대를 이동시켜 구원하는 자를 먼저 공격하려하니 위왕이 두려워서 진비의 군대를 멈추게 하고 업에 성벽을 쌓고 또 신원연을 시켜 조나라를 설득하여 함께 진나라를 높여서 황제로 하려 하니, 노중련이 신원연을 가서 보고 말하기를, “저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공을 으뜸으로 치는 나라라 곧 멋대로 천하에 황제라 하면 내가 동해를 밟고 죽을 따름이라.” 하니 신원연이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선비라. 내가 감히 다시 진나라를 황제라 말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趙平原君의 夫人은 無忌의 姉也라 趙急에 使者冠蓋가 相望하여 責救於無忌하니 無忌請於王하고 及使賓客으로 游說萬端하되 王이 不聽이더니 客侯嬴이 敎無忌하여 請於王幸姬하여 竊得晋鄙兵符하고 且薦力士朱亥하여 與俱하고 謂晋鄙合符而疑則擊殺而奪其軍하라 一如嬴言하여 得兵하고 以進하여 大破秦兵하고 解邯鄲圍에 而無忌不敢歸魏더니 秦이 伐魏하니 魏患之하여 使人으로 請無忌하되 不肯歸거늘 客에 毛公薛公이 見曰魏急而公子가 不恤이다가 一旦에 秦이 克大梁하고 夷先王宗廟이면 公子가 何面目으로 立於天下乎아 無忌趣駕還하니 諸侯가 聞無忌爲魏將하고 皆遣救하니 無忌率五國兵하고 敗秦兵於河外하여 追之函谷關而還이더니 無忌卒十八年而魏王假가 立하고 後又二年에 秦王政이 遣兵伐魏하여 殺王假而滅魏爲郡하다 /蓋뚜껑개, 嬴찰영, 邯땅이름한, 鄲땅이름단, 夷오랑캐이, 평정할이, 函상자 함
조나라 평원군의 부인은 무기의 누나라. 조나라가 위급하니 사신과 귀족들이 서로 바라보면서 무기에게 구원하기를 재촉하니 무기가 왕에게 청하고 빈객으로 하여금 만 가지로 유세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더니 빈객 중에 후영이 무기를 가르쳐서 왕이 총애하는 후궁에게 청하여 진비의 병부를 훔치고 또 역사 주해를 천거하여 함께 하고 말하기를, “진비가 부절을 맞추어 보고 의심하거든 곧 쳐 죽이고 그 군대를 빼앗으라.” 하니, 하나 같이 후영의 말대로 하여 군사를 얻어 나아가서 크게 진나라 군사를 깨트리고 한단의 포위를 풀었으나 무기가 감히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니 위나라가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무기를 청하니 무기가 돌아가기를 좋아하지 않더니, 빈객 중에 모공과 설공이 뵙고 말하기를, “위나라가 위급한데 공자께서 구하지 아니하다가 하루아침에 진나라가 대량(위나라 도읍)을 점령하고 선왕의 종묘를 헐어버리면 공자는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볼 것입니까?” 하니 무기가 수레를 달려 돌아가니 제후들이 무기가 위나라의 장수가 됨을 듣고 모두 구원병을 보내어 무기가 다섯 나라의 군대를 통솔하여 진나라 군대를 황하 가에서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함곡관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무기가 죽은 지 십팔 년에 위나라 왕가가 즉위하고 그 뒤 2년에 진나라 왕 정이 군대를 보내서 위나라를 쳐서 왕가를 죽이고 위나라를 멸하여 군으로 삼았다.
 
韓之先은 本與周同姓하니 武王의 子韓侯之後也이라 國絶하고 其後裔가 事晋하여 爲韓氏하다 韓武子之三世는 曰厥이러니 厥의 五世에 至康子하여 與趙魏로 共滅智氏하고 又二世에 至景侯虔하여 以周威烈王命으로 爲侯하다
한나라의 조상은 본디 주나라와 성이 같더니 무왕의 아들 한후의 후손이다. 나라가 없어지고 그 후예가 진나라를 섬겨서 한씨가 되었다. 한무자의 3대손은 궐이더니 궐의 5대손 강자에 이르러 조와 위와 더불어 지씨를 멸하였고, 또 2대손 경후 건에 이르러 주나라 위열왕의 명령으로 제후가 되었다.
 
韓相俠累가 與濮陽嚴仲子로 有隙이러니 仲子가 聞軹人聶政之勇하고 以黃金百鎰로 爲政母壽하고 欲因以報仇한데 政이 曰老母가 在하니 政身을 未可以許人也라 하더니 及母가 卒에 仲子가 乃使政으로 圖之하니 俠累가 方坐府하여 兵衛甚嚴이거늘 政이 直入刺之하고 因自皮而抉目하니 韓人이 暴其尸於市하고 購問하되 莫能識이더니 姊嫈이 往哭之曰 是는 深井里聶政也라 以妾在之故로 重自刑하여 以絶蹤하니 妾이 奈何로 畏沒身之誅하여 終沒賢弟之名이리오 하고 遂死政尸旁하다 /濮강이름복, 軹굴대머리지, 聶소곤거릴섭, 嫈예쁠앵, 蹤자취종,
한나라 재상 협루가 복양의 엄중자와 사이가 좋지 않더니 엄중자가 지 사람 섭정이 날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금 백일로 섭정의 어머니를 위하여 축수하고 그로 인해 원수를 갚고자 하더니 섭정이 말하기를, “노모가 계시니 섭정의 몸을 남에게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하더니,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자 엄중자가 이에 섭정을 시켜 그 일(복수)을 꾀했다. 협루가 바야흐로 관청에 앉아있는데 병사들의 호위가 매우 엄중하거늘 섭정이 곧바로 들어가 그를 찌르고 인하여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 버리니 한나라 사람들이 그 시체를 저자에다 내놓고 돈을 걸고 (범인을)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섭정의) 누나 앵이 가서 곡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심정리 사람 섭정이라. 내가 살아있는 연유로 스스로 형벌(자해)을 중히 하여 그 자취(증거)를 없앤 것이라. 내가 어찌 죽임을 두려워하여 끝내 어진 아우의 이름을 없애겠는가?” 하고 마침내 섭정의 시체 옆에서 죽었다.
 
景侯의 四世에 至哀侯하여 徙都鄭하고 哀侯二世에 至昭侯하니 鄭人申不害가 以黃老刑名之學으로 爲昭侯相하여 國治兵强이더라 昭侯가 有弊袴하여 命藏之하고 不以賜左右하니 侍者가 曰君亦不仁者矣로다 昭侯曰 明主는 愛一嚬一笑하나니 嚬도 有爲嚬하고 笑도 有爲笑커든 今袴가 豈特一笑哉리오 吾必待有功者라 하더라 昭侯가 卒하고 子宣惠王이 立이더니 三世에 至桓惠王하니 韓上黨守가 降趙하여 致趙受秦兵而有長平之敗하고 後又一世에 至王安하여 秦王政이 遣將하여 虜安하고 遂滅韓爲郡하다
경후의 4대손인 애후에 이르러 도읍을 정에 옮기고 애후의 2대손인 소후에 이르니 정 사람 신불해가 황로 형명의 학술로 소후의 재상이 되어 나라가 다스려지고 군대가 강했다. 소후가 해진 바지를 보관해 두라고 명령하고 좌우 신하에게 주지 않으니 모시는 자가 말하기를, “임금님은 어질지 않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니, 소후가 말하기를, “밝은 임금은 한번 찡그림과 한번 웃음도 아끼나니 찡그림도 할 일이 있어 찡그리고 웃음도 할 일이 있어 웃거든 지금 이 바지가 어찌 특별히 한번 웃음과 다르리오. 나는 반드시 공이 있는 자를 기다리노라.”고 하였다. 소후가 죽고 아들 선혜왕이 즉위하더니 그 3대손인 환혜왕에 이르러 한나라 상당군수가 조나라에 항복하여 조나라가 진나라의 군대(군사개입)를 받아서 장평에서 패하게 하고, 그 뒤 또 일대손인 왕안에 이르러서 진나라 왕 정이 장수를 보내서 왕안을 사로잡고 마침내 한나라를 멸하여 군으로 삼았다.
 
楚之先은 出自顓頊하니 顓頊之子가 爲高辛火正하여 命曰祝融이더니 弟吳回가 復居其職하고 二世에 有季連者하여 復羋姓하고 季連之後에 有鬻熊이 事周文王하더니 成王이 封其子熊繹於丹陽하고 至夷王時하여 楚子熊渠者가 僭爲王이더니 十一世에 至春秋하여 有曰武王하니 益强大하고 至文王하여 始都郢하고 成王이 與齊桓公으로 盟召陵하고 尋與宋襄公으로 爭覇하고 後與晉文公으로 戰城濮하고 歷穆王至莊王하여 卽位三年에 不出令하고 日夜爲樂하고 令國中하되 敢諫者이면 死하리니 伍擧가 曰有鳥在阜하여 三年不蜚不鳴하니 是何鳥也니잇고 王曰三年不飛하니 飛將衝天이요 三年不鳴이면 鳴將驚人이니라 蘇從이 亦入諫하니 王이 乃左執從手하고 右抽刀하여 以斷鐘鼓之懸하고 明日聽政할새 任伍擧蘇從하니 國人이 大悅하고 又得孫叔敖하여 爲相하여 遂覇諸侯하고 /顓마음대로할전, 頊삼갈욱, 羋(양 울 미) 融화할융, 僭참람할참, 郢땅이름영, 濮강이름 복,
초나라의 선조는 전욱(黃帝의 손자)으로부터 나왔는데 전욱의 아들이 고신(帝嚳)의 화정(불을 관장)이 되어 명명하여 축융이라 하더니 그 동생 오회가 다시 그 직책을 맡고 2대손에 계련이 있어 미(羋)성을 회복하고 계련 다음에 죽웅이 있어 주나라 문왕을 섬기더니 성왕이 그 아들 웅역을 단양에 봉하고 (주나라) 이왕 때에 이르러서 초나라 자손 웅거가 왕이라고 참칭하더니 11대 후 춘추시절에 이르러 무왕이 있어 더욱 강대하였다. (초나라) 문왕에 이르러 처음으로 영에 도읍하고 성왕이 제나라 환공과 더불어 소릉에서 맹약을 했으며 조금 있다가 송나라 양공과 패권을 다투었고 그 뒤에 진나라 문공과 성복에서 싸웠다. 목왕을 거쳐 장왕에 이르러 즉위한 지 삼년이 지나도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밤낮으로 즐기기만 하면서 나라에 감히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일 것이라고 하였다. 오거가 말하기를, “언덕에 새가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 무슨 새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3년을 날지 않았으니 날면 장차 하늘을 찌를 것이요 3년을 울지 않았으니 울면 장차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라.” 하였다. 소종이 또한 들어가 간하니 왕이 이에 왼손으로 소종의 손을 잡고 오른 손으로 칼을 뽑아들고 매달아 놓은 종고(악기)를 끊어버리고 다음날부터 정사를 들어 오거와 소종에게 직책을 맡기니 나라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또 손숙오를 얻어 재상으로 삼아 마침내 제후의 으뜸이 되었다.
 
歷共王 康王郟敖 靈王 平王 昭王 惠王 簡王 聲王 悼王 肅王 宣王 威王하여 至懷王하니 秦惠王이 欲伐齊하되 患楚가 與從親하여 乃使張儀로 說楚王曰 王이 閉關而絶齊면 請獻商於之地六百里라 하니 懷王이 信之하고 使勇士로 北辱齊王하니 齊王이 大怒而與秦合이라 楚使가 受地於秦하니 儀가 曰地從某至某에 廣袤六里라 하나 懷王이 大怒하여 伐秦大敗하니 秦昭王이 與懷王으로 盟于黃棘하고 旣而오 遣書懷王하여 願與君王으로 會武關이라 하니 屈平이 不可라 하되 子蘭이 勸王行이더니 秦人이 執之以歸라 楚人이 立其子頃襄王하고 懷王은 卒於秦하니 楚人이 憐之하여 如悲親戚이더라 初에 屈平이 爲懷王의 所任이더니 以讒見疏하고 作離騷하여 以自怨이더니 至頃襄王時하여 又以讒으로 遷江南하여 遂投汨羅以死하니라 /郟(고을 이름 겹) 汨빠질골, 강이름멱, 袤길이무
공왕과 강왕 겹오와 영왕 평왕 소왕 혜왕 간왕 성왕 도왕 숙왕 선왕 위왕을 거쳐서 회왕에 이르니 진나라 혜왕이 제나라를 치고자 하되 초나라가 (제나라와) 더불어 합종책으로 친한 것을 근심하여 이에 장의를 시켜 초나라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관문을 닫고 제나라와 절교하면 상과 오의 땅 육백 리를 바치겠습니다.” 하니 회왕이 그것을 믿고 용사를 시켜서 북쪽으로 제나라 왕을 욕보이니 제나라 왕이 크게 노하여 진나라와 더불어 합종하는 지라 초나라 사신이 진나라에서 땅을 받으려 하니 장의가 말하기를, “땅은 어디에서 어디에까지 사방 육리라.” 하니 회왕이 크게 노하여 진나라를 쳤다가 대패하였다. 진나라 소왕이 회왕과 더불어 황극에서 맹약을 하고 한참 지난 후에 회왕에게 글을 보내어 원컨대 군왕과 더불어 무관에서 만나자고 하니 굴평이 안된다고 하였으나 자란이 권하여 왕이 갔다가 진나라 사람이 그를 잡아 돌아갔다. 초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경양왕을 세우고 회왕은 진나라에서 죽으니 초나라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더라. 처음에 굴평이 회왕에게 쓰이어 직책을 맡았더니 참소를 당해 멀어지고 <이소>를 지어 스스로를 원망하더니 경양왕 때에 이르러 또 참소를 당하여 강남으로 옮겨졌다가 마침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秦이 拔郢하니 楚가 徙都於陳하고 頃襄王이 卒하니 考烈王이 立하여 又徙於壽春하고 春申君黃歇이 行相事하다 當是時하여 齊有孟嘗君하고 魏有信陵君하고 趙有平原君하고 楚有春申君하여 皆好客할새 春申君의 食客이 三千餘人이라 平原君이 使人於春申君할새 欲夸楚하여 爲玳瑁簪하고 刀劍室을 飾以珠玉이더니 春申君의 上客이 皆躡珠履以見之하니 趙使가 大慙하더라 趙人 荀卿이 至楚하니 春信君이 以爲蘭陵令하다 李園이 以妹로 獻春申君이다가 有娠而後에 納之考烈王하여 是生幽王하니 園이 使盜로 殺春申君하여 以滅口而專楚政하다 幽王이 卒하고 弟哀王이 爲楚人의 所弑而立其庶兄負芻더니 秦王政이 遣將破楚하고 虜負芻하고 滅楚爲郡하다 /夸자랑할과, 玳대모(거북껍질)대, 瑁대모모, 芻꼴추
진나라가 영(초나라 도읍)을 함락하니 초나라가 도읍을 진으로 옮겼다. 경양왕이 죽고 고열왕이 즉위하여 또 (도읍을) 수춘으로 옮기고 춘신군 황헐이 재상의 일을 보았다. 이때에 제나라에 맹상군이 있고 위나라에 신릉군이 있고 조나라에 평원군이 있고 초나라에 춘신군이 있어서 모두 문객을 좋아했는데 춘신군의 식객이 삼천여명이었다.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랑하고자 하여 대모로 비녀를 하고 칼을 보관하는 방을 주옥으로 꾸몄더니 춘신군의 상객은 모두 구슬 장식 신발을 신고 보여주니 조나라 사신이 크게 부끄러워했다. 조나라 사람 순경이 초나라에 가니 춘신군이 난릉의 수령으로 삼았다. 이원이 누이를 춘신군에게 바쳤다가 임신한 후에 고열왕에게 바쳐서 이가 유왕을 낳으니 이원이 도둑을 시켜 춘신군을 죽여서 입(소문)을 없애고 초나라 정사를 마음대로 했다. 유왕이 죽고 아우 애왕이 초나라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서형 부추가 즉위하였더니 진나라 왕 정이 장수를 보내어 초나라를 깨뜨리고 부추를 사로잡아 초나라를 없애고 군으로 삼았다.
 
燕은 姬姓이니 召公奭之所封也라 三十餘世에 至文公하여 嘗納蘇秦之說하여 約六國爲從이러니 文公이 卒하고 易王噲立十年에 以國으로 讓其相子之하여 南面行王事하고 而噲는 老不聽政하고 顧爲臣하니 國이 大亂이거늘 齊伐燕取之하고 醢子之而殺噲하니 燕人이 立太子平하여 爲君하니 是爲昭王이라 /奭클석, 噲목구멍쾌, 환할쾌, 醢젓갈해
연나라는 성이 희씨이니 소공 석에게 봉한 곳이라. 삼십여 대를 거쳐 문공에 이르러 일찍 소진의 말을 받아들여서 여섯 나라를 묶어 (秦나라에 대항하는) 합종을 하더니 문공이 죽고 역왕 쾌가 선 지 십년에 나라를 그 재상 자지에게 양보하여 남쪽을 향해 앉아 왕권을 행사하게 하고 쾌는 늙어서 정사를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신하가 되니 나라가 크게 어지럽거늘 제나라가 연나라를 쳐서 그것을 취하고 자지를 젓갈 담고 쾌를 죽이니 연나라 사람들이 태자 평을 세워서 군주로 삼으니 이가 소왕이 되니라.
 
弔死問生하고 卑辭厚幣하여 以招賢者할새 問郭隗曰 齊因孤之國亂而襲破燕하니 孤가 極知燕小하여 不足以報이나 誠得賢士與共國하여 以雪先王之恥가 孤之願也니 先生은 視可者하라 得身事之하리라 隗曰古之人君이 有以千金으로 使涓人求千里馬者러니 買死馬骨五百金而返하니 君이 怒한대 曰死馬도 且買之거든 況生者乎잇가 馬今至矣라 하더니 /隗험할 외,
(소왕이) 죽은 이를 조문하고 산 자를 위문하며 낮은 말과 두터운 예물로 어진 사람을 초빙하는데 곽외에게 묻기를, “제나라가 나의 나라가 어지러움으로 인하여 연나라를 습격하여 깨트리니 나는 연나라가 작아서 족히 보복하지 못함을 아주 잘 알지만 진실로 어진 선비를 얻어서 더불어 나라를 함께하여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선생은 합당한 사람을 살펴보시오. 그를 얻으면 몸소 섬기리라.” 하니 곽외가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임금이 천금으로 심부름꾼을 시켜 천리마를 구하였더니 죽은 말 뼈를 오백 금에 사서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성을 내니 말하기를, ‘죽은 말도 또한 사거늘 하물며 살아있는 말이겠습니까? 말은 곧 이를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不期年에 千里馬至者가 三이라 今王이 必欲致士인댄 先從隗始하시면 況賢於隗者가 豈遠千里哉잇가 於是에 昭王이 爲隗하여 改築宮師事之하니 於是에 士爭趨燕하여 樂毅가 自魏往하니 以爲亞卿하여 任以政이더니 已而오 使毅로 伐齊할새 兵入臨淄하니 齊王이 出走거늘 毅乘勝하여 六月之間에 下齊七十餘城하고 惟莒卽墨이 不下하다 /莒고을이름거
한 해가 못 되어서 천리마가 이른 것이 셋이었습니다. 지금 왕께서 반드시 선비를 이르게 하고 싶을진대, 먼저 곽외로부터 시작하시면 하물며 곽외보다 현명한 자가 어찌 천리를 멀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소왕이 곽외를 위하여 궁을 개축하고 스승으로 섬기니 이에 선비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달려왔다. 악의가 위나라에서 오니 아경을 삼고 국정을 맡기더니 이윽고 악의로 하여금 제나라를 정벌했는데 군대가 임치에 들어가니 제나라 왕이 탈출하여 달아나거늘 악의가 이긴 기세를 타고 여섯 달 사이에 제나라의 70여성을 떨어뜨리고 오직 거와 즉묵만이 함락되지 않았다.
 
昭王이 卒하고 惠王이 立하니 惠王이 爲太子하여 已不快於毅더니 田單이 乃縱反間曰毅與新王으로 有隙하여 不敢歸하고 以伐齊爲名하니 齊人은 惟恐他將來면 卽墨이 殘矣라 하나 惠王이 果疑毅하여 乃使騎劫으로 代將而召毅하니 毅奔趙한대 田單이 遂得破燕而復齊城하다. 惠王의 後에 有武成王孝王하고 至王喜하니 喜의 太子丹이 質於秦이더니 秦王政이 不禮焉이거늘 怒而亡歸하여 怨秦欲報之더니 /縱늘어질 종,
소왕이 죽고 혜왕이 즉위하니 혜왕이 태자였을 때 이미 악의에게 유쾌한 감정이 없더니 전단이 이에 반간(이간책)을 퍼트려 이르되 악의가 (연나라) 새 왕과 틈이 있어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제나라를 정벌하는 것으로써 핑계를 삼으니 제나라 사람들은 오직 다른 장수가 오면 즉묵이 해로울까 두려워한다고 하니 혜왕이 과연 악의를 의심하여 이에 기겁으로 하여금 대신하여 장수로 삼고 악의를 소환하니 악의가 조나라로 달아났다. 전단이 드디어 연나라를 깨트리고 제나라의 성을 회복하였다. 혜왕 다음에 무성왕과 효왕이 있고 왕희에 이르니 왕희의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이 되었더니 진왕 정이 예절로 대하지 아니 하거늘 성내어 도망해 돌아와서 원망하여 보복코자 하더니
 
秦將軍樊於期得罪하고 亡之燕하니 丹이 受而舍之하고 丹이 聞衛人荊軻賢하고 卑辭厚禮로 請之하여 奉養이 無不至하다 欲遣軻하니 軻가 請得樊將軍首와 及燕督亢地圖하여 以獻秦하니 丹이 不忍殺於期거늘 軻가 自以意로 諷之曰願得將軍之首하여 以獻秦王이면 必喜而見臣하리니 臣이 左手로 把其袖하고 右手로 揕其胸則將軍之仇報而燕之恥를 雪矣라 한데 /袖소매수
진날 장군 번오기가 죄를 짓고 도망하여 연나라로 오니 태자 단이 그를 받아들여 살게 하고 태자 단이 위나라 사람 형가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물로 청하여 봉양함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다. 형가를 보내려고 하니 형가가 번오기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독항(비옥한 땅)의 지도를 얻어서 진왕에게 바치기를 청하니 태자 단이 차마 번오기를 죽이지 못하거늘 형가가 자기 뜻으로 풍유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장군의 머리를 얻어서 진왕께 바치면 반드시 기뻐하며 저를 만나볼 것이니 제가 왼손으로 그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 가슴을 찌르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의 수치를 씻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於期慨然하여 遂自刎하니 丹이 奔往伏哭하고 乃以函으로 盛其首하고 又嘗求天下之利匕首하여 以藥焠之하여 以試人하니 血如縷에 立死라 乃裝遣이더라 軻가 行至易水하여 歌曰風蕭蕭兮여 易水寒이로다 壯士가 一去兮여 不復還이로다 于時에 白虹이 貫日하니 燕人이 畏之더라 軻가 至咸陽하니 秦王政이 大喜見之거늘 /慨분개할 개, 縷실 루, 蕭맑은대쑥소, 쓸쓸할소, 焠(담금질 쉬)
번오기가 개연히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찌르거늘 태자 단이 달려가 엎드려 곡하고 이에 함에다 그 머리를 담고, 또 일찍이 천하의 날카로운 비수를 구하여 독약으로 담금질하여 사람에게 시험하니 피가 실같이 뿜으며 선 채로 죽었다. 이에 꾸려서 보냈더라. 형가가 출발하여 역수에 이르러 노래를 불러 이르되, “바람이 쓸쓸함이여 역수의 물이 차도다. 장사가 한번 떠남이여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고 했다. 이때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니 연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형가가 함양(진나라 도읍)에 도착하니 진왕 정이 크게 기뻐하며 만나보거늘
軻가 奉圖進할새 圖窮而匕首見이거늘 把王袖揕之라가 未及身하여 王이 驚起絶袖거늘 軻가 逐之하니 環柱走더라 秦法에 群臣侍殿上者는 不得操尺寸兵이라 左右가 以手搏之하고 且曰 王은 負劍하소서 遂拔劍하여 斷其左股하니 軻가 引匕首하여 擿王不中이라 遂體解以徇하니라 秦王이 大怒하여 益發兵伐燕하니 喜斬丹以獻이더니 後三年에 秦兵이 虜喜하고 遂滅燕爲郡하다 /擿들출척,던질척(擲), 徇조리돌릴 순,
형가가 (독항의) 지도를 받들어 드리니 (두루마리) 지도가 다하고 비수가 나타나거늘 (진나라) 왕의 소매를 붙잡고 그를 찔렀으나 몸에 미치지 못하여 왕이 놀라 일어나니 소매가 떨어지거늘 형가가 쫓으니 기둥을 돌아 달아났다. 진나라 법에 여러 신하가 전상에서 모실 때는 작은 무기라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라 좌우의 신하들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대왕은 칼을 지소서.(칼을 지고 뽑으라는 뜻)” 하니, 드디어 검을 뽑아서 형가의 왼쪽 다리를 자르니 형가가 비수를 끌어서 왕에게 던졌으나 맞지 않았다. 드디어 몸을 해체하여 조리를 돌렸다. 진나라 왕이 크게 노하여 군대를 출동하여 연나라를 치니 왕희가 태자 단을 목 베어 바쳤다. 그 뒤 삼년에 진나라 군대가 왕희를 사로잡고 드디어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군으로 삼았다.
 
秦之先은 本顓頊之裔이니 曰大業者가 生柏翳하니 舜이 賜姓嬴氏더라 其後에 有蜚廉하고 蜚廉의 孫은 女防이요 女防之後에 有非子하여 好馬러니 爲周孝王하여 主馬於汧渭之間하니 馬가 大蕃息이라 分土爲附庸하여 邑之秦이더니 /翳일산예, 蜚바퀴 비, 汧(강 이름 견)
진나라의 조상은 본디 전욱의 후예이니 이른바 대업이라는 자가 백예를 낳으니 순임금이 영씨라는 성을 주었다. 그 후에 비렴이 있고 비렴의 손자는 여방이요 여방의 후손에 비자가 있어 말을 좋아하더니 주나라 효왕을 위하여 견수와 위수 사이에서 말을 주관하더니 말이 크게 번식하는지라 땅을 나누어 부용국이 되어 진에 도읍하였더니
 
閱二世至秦仲하여 始大하니라 歷莊公至襄公하여 犬戎이 弑幽王하니 襄公이 救周有功이거늘 封爲諸侯하고 賜以岐西地더니 歷文公寧公出子武公德公宣公成公하고 至繆公하여 有百里奚者하니 故虞大夫也라 晋人이 伐虢할새 假道於虞하니 其實은 欲幷虞取之라 奚가 知虞公의 不可諫而先去之더니 /繆얽을무, 왕이름 목, 虢나라이름 괵,
두 대를 지나 진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니라 장공을 거쳐 양공에 이르러 견융(서북쪽 오랑캐)이 주나라 유왕을 죽이니 양공이 주나라를 구하여 공이 있거늘 봉하여 제후로 삼고 기산 서쪽의 (西周 畿內의) 땅을 주었다. 문공과 영공과 출자와 무공과 덕공과 선공과 성공을 지내고 목공에 이르러 백리해라는 사람을 기용하니 옛 우나라 대부였다. 진(晋)나라 사람이 괵나라를 칠 때 우나라에 길을 빌렸는데 그 실속은 우나라를 아울러 취하고자 함이라 백리해가 우공에게 간쟁할 수 없음을 알고 먼저 떠났더니
 
(爲繆公夫人媵하여 亡秦走宛하니 楚人執之한데) 秦繆公이 聞其賢하고 (以五羖羊皮로 贖得之하여 授之政하고 號曰五羖大夫라 하다) 以爲相하여 政事를 皆屬焉한데 百里奚가 進其友蹇叔하여 以爲上大夫하다 繆公이 送晋惠公하여 歸晋이더니 已而오 倍秦하고 合戰于韓할새 繆公이 爲晋軍의 所圍더니 岐下에 有嘗食公馬者三百人이 馳冒晋軍하여 遂脫繆公以反하다 /媵몸종 잉, 宛굽을 완, 羖검은양고, 倍(곱 배)배반할배
(목공부인의 몸종이 되어 진나라 완으로 도망해 달아나니 초나라 사람이 잡았는데) 진나라 목공이 그 어짊을 듣고 (다섯 마리 검은 양가죽으로 죄를 속하여 데려와서 그에게 정사를 주고 오고대부라고 불렀다) 재상으로 삼아 정사를 모두 맡겼는데 백리해가 그의 친구 건숙을 천거하여 상대부를 삼게 했다. 목공이 진(晋)나라 혜공을 보내어 진(晋)나라에 돌아가게 했더니 한참 후에 진(秦)나라를 배반하고 (秦나라가 공격하자) 한나라와 힘을 합해 싸웠는데 목공이 진(晋)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었더니 기산 아래에 일찍이 목공의 말을 먹이던 자 삼백 인이 있어 진(晋)나라 군사를 무릅쓰고 달려서 마침내 목공을 탈출시켜 돌아왔다.
 
先是에 繆公이 亡善馬하니 野人이 共得而食之더니 吏逐得하여 欲法之한데 公이 曰 食善馬하고 不飮酒면 傷人이라 하고 皆賜酒而赦之하니 至是하여 聞秦擊晋하고 皆願從하여 推鋒爭死하여 以報德하다 繆公이 後又送晋文公하여 歸晋하여 立而覇諸侯더니 晋文公이 卒한데 秦이 遣孟明襲鄭하여 因破滑이더니 晋襄公이 敗之崤하되 繆公이 不替孟明하고 修國政이더니 後에 伐晋得志하고 遂覇西戎하다 /崤산이름 효,
이보다 먼저 목공이 좋은 말을 잃었더니 야인이 함께 얻어 잡아먹었더니 관리가 쫓아가서 잡아 법대로 처리하려 한데 목공이 말하기를 “좋은 말을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람을 상하게 한다.”고 하며 모두에게 술을 내리고 용서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진(秦)나라가 진(晋)나라를 친다는 말을 듣고 모두 종군하기를 원하여 창을 잡고 죽기를 다투어 은덕을 갚았다. 목공이 뒤에 또 진(晋)문공을 진(晋)나라로 들여보내서 즉위케 하여 제후 중 패자가 되게 했더니 진문공이 죽자 진(秦)나라가 맹명을 보내어 정나라를 습격하여서 활(滑)읍을 깨트리더니 진(晋)나라 양공이 효산에서 진(秦)군을 패퇴시켰지만 목공이 맹명을 교체하지 아니하고 국정을 가다듬더니 뒤에 진(晋)나라를 정벌하여 뜻을 얻고 마침내 서쪽 오랑캐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했다.
 
歷康公共公桓公景公哀公惠公悼公厲公共公躁公懷公靈公簡公惠公出子獻公하고 至孝公하여 河山以東에 强國이 六이요 小國이 十餘로되 皆以夷狄으로 遇秦하고 擯不與諸侯之會盟하니 孝公이 下令하되 賓客群臣에 有能出奇計强秦者이면 吾其尊官하고 與之分土하리라 衛公孫鞅이 入秦하여 因嬖臣景監하여 以求見하고 說以帝道王道이다가 三變爲覇道而後에 及强國之術하니 /鞅가슴걸이앙
강공 공공 환공 경공 애공 혜공 도공 여공 공공 조공 회공 영공 간공 혜공 출자 헌공을 거쳐 효공에 이르러 황하와 화산 동쪽에 강국이 여섯이요 작은 나라가 열이 넘되 모두 오랑캐로서 진나라를 상대하고 제후들의 모임에 물리쳐 함께 하지 않으니 효공이 명령을 내려 손님과 여러 신하 중에 능히 기이한 계책을 내어 진나라를 강하게 하는 사람은 내가 그 벼슬을 높이고 그와 더불어 땅을 나누리라 하니 위나라 공손앙이 진나라로 들어와서 총신 경감으로 인하여 뵙기를 청하고 제왕의 도와 왕의 도로 설득하다가 세 번째로 변하여 패자의 도로써 한 후에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에 미치니
 
公이 大悅하여 欲變法하되 恐天下가 議己하니 鞅이 曰民은 不可與慮始오 而可與樂成이라 하고 卒定令할새 令民으로 爲十伍하여 相收司連坐하고 不告姦者는 腰斬하고 告姦者는 與斬敵同賞하며 匿姦者는 與降敵同罰하고 有軍功者는 各以率로 受爵하며 爲私鬪者는 各以輕重으로 被刑하고 大小는 戮力하고 本業耕織하여 致粟帛多者復其身하고 事末利及怠而貧者는 擧以爲收孥하여 /孥자식 노, 종 노
효공이 크게 기뻐하여 법을 변경하고자 한데 천하가 자기를 의논할까 두려워하니 공손앙이 말하기를, “백성은 더불어 처음을 꾀하지 못할 것이요 가히 더불어 성공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고 마침내 법령을 정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열 명씩 대오를 만들어 서로 거두어 맡아 연좌케 하고 (법령을 어긴) 간사함을 고발하지 아니한 자는 허리를 베고 간사함을 고발한 자는 적군을 벤 사람과 더불어 같은 상을 주며 간사함을 숨긴 자는 적군에게 항복한 사람과 같은 벌을 주고 군공이 있는 자는 각각 군졸을 거느리는 벼슬을 주며 사사로운 일로 다툰 자는 각각 경중을 가려 형벌을 가하고 대인과 소인의 힘을 합쳐서 본업인 경작과 베짜기를 하게 하여 곡식과 비단을 많이 이룬 자는 그 몸을 부역에서 면제시켜 주고 작은 이익을 일삼거나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처자를 거두어 종을 삼았다.
 
令旣具未布에 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하고 募民有能徙北門者이면 予十金이라 하니 民이 怪之하여 莫敢徙거늘 復曰能徙者이면 予五十金이라 하니 有一人이 徙之거늘 輒予五十金하고 乃下令이더니 太子가 犯法하거늘 鞅이 曰 法之不行은 自上犯之라 君嗣는 不可施刑이라 하고 刑其傅公子虔하며 黥其師公孫賈하니
법령이 이미 갖추어지고 아직 발표하지 않은 때에 세 길의 나무를 국도의 저자거리 남문에 세워두고 백성을 모아 능히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열 냥의 금을 주겠다고 하니 백성들이 괴이히 여겨 감히 옮기지 못하거늘 다시 말하기를 능히 옮기는 자에게 오십 냥의 금을 주겠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옮기거늘 문득 그에게 오십 냥의 금을 주고 이에 법령을 반포하였다. 태자가 법령을 어기니 공손앙이 말하기를, “법령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자에게는 형벌을 가할 수는 없다.”라 하고 그 스승 공자 건에게 형벌을 주고 그 스승 공손고에게 경을 쳤다.
 
秦人이 皆趨令하여 行之十年에 道不拾遺하며 山無盜賊하고 家給人足하여 民이 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여 鄕邑이 大治하니 初言令不便者가 來言令便이거늘 鞅이 曰 此는 亂法之民이라 하고 盡遷之邊하니 民이 莫敢議令하고 民이 父子兄弟同室內息者는 爲禁하고 廢井田開阡陌하고 更爲賦稅法하니 秦人이 富强이라 封鞅商於十五邑하고 號曰商君이라 하다 /阡(두렁 천) 陌(두렁 맥)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법령을 지켜 십년이 지나니 길에는 떨어진 것을 줍지 아니하고 산에는 도적이 없어져서 집은 넉넉하고 사람은 족하여 백성들이 나라의 전쟁에는 용감하고 사사로운 다툼에는 겁을 내니 시골과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다. 처음에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한 자가 와서 법령이 편하다고 말하니 공손앙이 말하기를, “이는 법령을 어지럽히는 백성이다.” 하고 모두 변방으로 옮기니 백성이 감히 법령을 의논하지 못하였다. 백성이 부자와 형제가 같은 집에서 지내는 자는 그것을 금지하고 정전법을 폐지하며 밭두렁 논두렁을 개간하고 부역과 세금의 법령을 변경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부강해졌다. (진효공이) 공손앙에게 상과 오의 땅 열다섯 고을을 봉하여 주고 호를 상군이라고 불렀다.
 
孝公이 薨하고 惠文王이 立하니 公子虔之徒가 告鞅欲反이라 한데 鞅이 出亡할새 欲止客舍러니 舍人이 曰商君之法에 舍人 無驗者는 坐之라 하니 鞅이 歎曰 爲法自弊一至此哉아 하고 去之魏러니 魏가 不受하고 內之秦하니 秦人이 車裂以徇하다. /徇 드러내 보일 순
효공이 죽고 혜문왕이 서니 공자 건의 무리가 공손앙이 배반하고자 한다고 알렸다. 공손앙이 나가서 도망하는데 객사에 머물려고 하니 객사 주인이 말하기를, “상군이 정한 법에 객사 주인이 (손님을) 조사하지 않는 자는 (손님의) 죄에 연좌된다.”고 하니 공손앙이 탄식하기를, “법을 만들어 스스로 넘어뜨리는 것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구나.” 하고 위나라로 갔더니 위나라에서 받아주지 않고 진나라로 잡아들이니 진나라 사람이 거열형에 처하여 두루 보게 하였다.
 
鞅이 用法酷하여 步過六尺者는 有罰하고 棄灰於道者는 被刑하여 嘗臨渭論囚할새 渭水가 盡赤이더라 惠文王이 薨하고 子武王이 立하니 武王이 使甘茂로 伐韓한데 茂가 曰 宜陽은 大縣이라 其實은 郡也니 今倍數險行千里하여 攻之難하니이다 /酷독할 혹,
공손앙이 법을 적용함이 혹독하여 1보(단위)를 여섯 자 넘게 하는 자는 벌하고, 재를 길에다 버린 자는 형벌을 받으니 일찍이 위수 가에 임하여 죄수를 논죄함에 위수가 다 붉게 되었다. 혜문왕이 죽고 아들 무왕이 서니 무왕이 감무를 시켜 한나라를 치게 하였다. 감무가 말하기를, “의양은 큰 고을이라 그것이 실제로는 군이니 이제 여러 험한 것을 배로 하여 천 리를 가서 공격함이 어렵습니다.
 
魯人에 有與曾參 同姓名者가 殺人하니 人이 告其母하되 母織自若이더니 及三人이 告之에 母가 投杼下機하여 踰墻而走하니 臣賢이 不及曾參하고 王之信臣이 又不如其母하며 疑臣者가 非特三人이 臣恐大王之投杼也오
노나라 사람이 증삼과 성명이 같은 자가 사람을 죽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증삼)의 어머니에게 고하니 어머니가 베 짜기를 태연자약하게 하거늘 세 사람이 (그렇게) 고하니 어머니가 북(베 짜는 기구)을 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담장을 넘어 달아났거늘, 신의 어짊이 증삼에게 미치지 못하고 왕께서 신을 믿음이 또 그(증삼)의 어머니만 못하며 신을 의심하는 자가 특별히 세 사람만이 아니니 신은 대왕께서 북을 던질까 두렵습니다.
 
魏文侯가 令樂羊으로 伐中山할새 三年而後에 拔之하고 反而論功할새 文侯가 示以謗書一篋하니 再拜曰 非臣之功이오 君之力也라 하더니 今臣은 覊旅之臣也라 樗里子와 公孫奭이 挾韓而議면 王必聽之하리이다 王이 曰寡人이 不聽이라 하고 乃盟于息壤하니 茂攻宜陽이러니 五月而不拔하니 二人이 果爭之라 武王이 召茂하고 欲罷兵이러니 茂曰息壤이 在彼라 하니 王이 乃悉起兵佐茂하여 遂拔之하다 /覊굴레 기, 樗가죽나무 저, 奭클 석
위나라 문후가 악양으로 하여금 중산국을 치게 할새 삼년이 지난 후에 함락시키고 돌아와 공을 논할 때에 문후가 헐뜯은 글 한 상자를 보여 주니 (악양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의 공이 아니라 군주의 힘입니다.’라고 하더니, 지금 신은 (외국에서 온) 나그네 신하라 저리자와 공손석이 한나라를 끼고 의논하면 왕께서는 반드시 들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듣지 않을 것이라.” 하고 이에 식양에서 맹세하니 감무가 의양을 공격하더니 다섯 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니 두 사람(저리자와 공손석)이 과연 다투어 의논하니라. 무왕이 감무를 불러 전쟁을 그만두려 하니 감무가 말하기를,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고 하니, 왕이 이에 모든 군사를 일으켜 감무를 도와 마침내 (의양을) 함락하였다.
 

武王이 有力好戲하여 力士에 任鄙烏獲孟說이 皆至大官이더니 王이 與孟說로 擧鼎이다가 絶脈死하고 弟昭襄王稷이 立하니 有魏人范睢者가 嘗從須賈使齊더니 齊王이 聞其辯口하고 乃賜之金及牛酒하니 賈가 疑睢가 以國陰事로 告齊라 하여 歸告魏相魏齊하니 魏齊 怒하여 笞擊睢하여 折脅拉齒하니 睢가 佯死더니 /脅갈빗대협, 拉꺾을랍,
무왕이 힘이 있고 장난을 좋아하여 역사 임비와 오획과 맹열이 모두 큰 벼슬에 이르렀더니 왕이 맹열로 더불어 솥을 들다가 맥이 끊어져 죽고 아우 소양왕 직이 서니 위나라 사람 범수라는 자가 있어 일찍이 수가를 따라서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제나라 왕이 그 변설을 듣고 이에 황금 및 쇠고기와 술을 주니 수가가 범수를 의심하여 그가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알린 것이라 하여 귀국하여 위나라 재상 위제에게 고하니 위제가 노하여 범수를 매질하여 갈빗대를 꺾고 이를 부러뜨리니 범수가 거짓 죽은 체하더니
卷以簀하여 置厠中하고 使醉客으로 更溺之하여 以懲後하니 睢가 告守者하여 得出할새 更姓名曰張祿이더니 秦使者王稽가 至魏다가 潛載與歸하여 薦于昭襄王하여 以爲客卿하니 敎以遠交近攻之策하다 時에 穰侯魏冉이 用事더니 睢가 說王廢之而代爲丞相하고 號를 應侯라 하다 /卷말권, 簀대자리책, 穰볏짚양, 冉나아갈 염, 丞도울승,
대자리로 말아서 뒷간 속에 두고 취객으로 하여금 다시 오줌을 누게 하여 뒷날을 징계하니 범수가 지키는 자에게 고하여 탈출하고 이름을 바꾸어 장록이라 하더니 진나라 사신 왕계라는 사람이 위나라에 왔다가 남몰래 수레에 싣고 함께 진나라로 돌아와 소양왕에게 추천하여 객경으로 삼으니 (그가 왕에게) 원교근공하는(먼 나라와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계책을 가르쳤다. 그 때에 양후 위염이 정사를 맡았더니 범수가 왕을 설득하여 그를 그만두게 하고 그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고 이름을 응후라고 부르게 했다.
 
魏使須賈가 聘秦하니 睢가 敝衣로 閒步往見之한데 賈가 驚曰 范叔이 固無恙乎아 하고 留坐飮食曰 范叔이 一寒如此哉아 하고 取一綈袍贈之하니 遂爲賈御하여 至相府曰我爲君先入하여 通于相君하리라 賈見其久不出하고 問門下하니 門下가 曰 無范叔이요 鄕者에 吾相張君也라 하니 賈知見欺하고 乃膝行入謝罪한데 睢가 坐責讓之曰 爾所以得不死者는 以綈袍가 戀戀尙有故人之意爾라 하고 /聘찾아갈빙, 綈두꺼운비단제, 袍핫옷포,
위나라가 수가로 하여금 진나라에 사신가게 하니, 범수가 해진 옷을 입고 한가로이 걸어가 그를 만나보았는데 수가가 놀라 말하기를, “범숙이 그동안 무양한가?” 하고 머물러 앉아 음식을 먹으며 말하기를, “범숙이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가?” 하고 두꺼운 비단 핫옷 한 벌을 주었다. 그리하여 범수가 수가의 수레를 몰아 재상부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먼저 들어가 재상께 알리리라.” 하였다. 수가가 오래 있어도 그가 나오지 않음을 보고 문지기에게 물으니 문지기가 말하기를, “범수라는 사람은 없고, 아까 그 사람이 우리 재상 장록 대감입니다.” 하니, 수가가 속임을 당했음을 알고 이에 무릎걸음으로 들어가 사죄하니 범수가 앉아서 꾸짖어 나무라기를, “네가 죽임을 당하지 않는 까닭은 두꺼운 비단 핫옷으로 그리운 정을 표하여 아직도 옛 친구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고
 
乃大供具하여 請諸侯賓客할새 置莝豆其前而馬食之하고 使歸告魏王曰 速斬魏齊頭來하라 不然이면 且屠大梁하리라 賈가 歸告魏齊하니 魏齊가 出走而死하다 睢가 旣得志于秦하니 一飯之德은 必償하고 睚眦之怨을 必報더라 王이 旣用睢策하여 歲加兵三晉하여 斬首數萬하니 周赧王이 恐하여 與諸侯로 約從欲伐秦이더니 秦이 攻周하니 赧王이 入秦하여 頓首請罪하고 盡獻其邑三十六하다 /莝여물 좌, 睚(눈초리 애) 眦(흘길 자{눈초리 제})
이에 크게 음식을 갖추어 제후와 손님들을 청하여 여물과 콩을 그(수가) 앞에 차려내고 말처럼 먹으라 하고, 돌아가 위나라 왕에게 고하여 “빨리 위제의 머리를 베어 가져오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또한 수도 대량을 짓밟을 것이라.”고 하였다. 수가가 돌아가 위제에게 고하니 위제가 달아나다가 죽었다. 범수가 이미 진나라에서 뜻을 얻으니 한 그릇의 밥을 제공 받은 은덕이라도 반드시 보상하고 흘겨보는 눈의 원망이라도 반드시 원수를 갚았다. 소양왕이 이미 범수의 계책을 써서 해마다 군사를 삼진(韓魏趙)에 침공시켜 수 만 명을 참수하니, 주나라 난왕이 두려워하여 제후들과 합종을 약속하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더니, 진나라가 주나라를 공격하니 난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 죄를 청하고 그가 다스리던 서른여섯 고을을 모두 진나라에 바쳤다.
 
秦將武安君白起與范睢로 有隙이더니 廢爲士伍하여 賜劍死于杜郵하니 王이 臨朝而歎曰 內無良將하고 外多强敵이라 한데 睢가 懼더니 蔡澤이 曰 四時之序에 成功者는 去하니라 睢가 稱病하고 澤이 代之하되 昭襄王이 薨하고 子孝文王柱가 立이더니 薨하고 子莊襄王楚가 立이다가 薨하고 嗣爲王者는 政也라 遂幷六國하니 是爲秦始皇帝하다 /杜팥배나무두, 막을두, 郵역참우,
진나라 장수 무안군 백기가 범수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장군에서) 폐하여 무사의 대열에 섰더니 칼을 내려 두우에서 죽게 하였다. 소양왕이 조정에 나아가 탄식하기를, “나라 안에는 좋은 장수가 없고 나라 밖에는 강한 적이 많다.”고 하니 범수가 두려워하더니 채택이 말하기를, “네 계절의 차례에 공을 이룬 자는 물러간다.”고 하니, 범수가 병을 칭하고 채택이 대신 재상이 되었다. 소양왕이 죽고 아들 효문왕 주가 섰더니 죽고 아들 장양왕 초가 섰다가 죽고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 정이다. 마침내 여섯 나라를 병합했으니 이가 진시황제이다.
 
■史略 卷之二
 
○秦이라
秦始皇帝의 名은 政이니 始生于邯鄲하다 昭襄王時에 孝文王柱가 爲太子할새 有庶子楚하니 爲質于趙하여 困不得志러니 陽翟大賈呂不韋適趙라가 見之하고 曰 此는 奇貨라 可居라 하고 因以財로 結之하고 乃適秦하여 因太子妃華陽夫人之姊하여 以說妃立楚爲適嗣하고 不韋가 因納邯鄲美姬하여 有娠에 而獻于楚하여 生政하니 實은 呂氏더라. /邯땅이름감(고을이름한), 鄲조나라서울단,
진시황제의 이름은 정이니 비로소 한단에서 태어났다. (진나라) 소양왕 시절에 효문왕 주가 태자가 되었는데, 여러 아들(서자) 중에 초가 있으니 조나라에 인질이 되어 괴로이 뜻을 얻지 못하더니 양적의 큰 상인 여불위가 조나라에 갔다가 그를 만나보고 말하기를, “이는 기이한 재물이라 가히 차지할 만하다.” 하고, 재물을 써서 (관계를) 맺고 이에 진나라에 가서 태자비 화양부인의 언니로 인하여 태자비를 달래어 초를 정실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였다. 여불위가 이로 인하여 한단의 아름다운 여인을 들여서 임신이 되자 초에게 (그녀를) 바쳐서 정을 낳으니 실은 (진시황제의 성이) 여씨였다.
 
孝文王이 立하여 三日에 薨하고 楚가 立하니 是爲莊襄王이라 四年에 薨하니 政이 生十三歲矣라 遂立爲王하고 母爲太后하다 不韋가 在莊襄王時에 已爲秦相國이더니 至是하여 封文信侯하고 太后가 復與不韋로 通이더니 王이 旣長에 不韋는 事覺하여 自殺하고 太后는 廢處別宮이더니 茅焦가 諫하여 母子가 乃復如初하더라 /薨죽을훙, 焦그을릴초
효문왕이 즉위하여 사흘 만에 죽고 초가 서니 이가 장양왕이 되었다. (장양왕) 4년에 죽으니 정이 태어난 지 열세 해가 되었다. 드디어 즉위하여 왕이 되고 어머니는 태후가 되었다. 여불위가 장양왕 시절에 이미 진나라 상국이 되었더니 이에 이르러 문신후에 봉해지고 태후가 여불위와 더불어 다시 통했다. 왕이 이미 장성하여 여불위는 일이 발각되어 자살하고 태후는 폐하여 별궁에 살게 했더니 모초가 간하여 모자가 이에 처음같이 회복되었다.
 
秦宗室大臣이 議曰 諸侯人來仕者가 皆爲其主游說이라 請一切逐之라 하니 於是에 大索逐客할새 客卿李斯가 上書曰 昔에 穆公은 取由余於戎하고 得百里奚於宛하며 迎蹇叔於宋하고 求丕豹 公孫支於晉하여 並國二十하사 遂覇西戎하고 孝公은 用商鞅之法하여 諸侯가 親服에 至今治强하고 惠王은 用張儀之計하여 散六國從하사 使之事秦하고 昭王은 得范睢하여 强公室하시니 此四君者는 皆以客之功하시니 客何負於秦哉잇가 /鞅가슴걸이앙, 睢부릅뜰수, 宛(굽을 완) 丕(클 비)
진나라 종실의 대신이 의논해 말하기를, “제후의 사람이 와서 벼슬하는 자가 모두 그 주인을 위해 유세를 하니 일절 내쫓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에 대대적으로 찾아서 손님으로 벼슬하는 자를 쫓아내니 객경 이사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에 목공은 융에서 유여를 취하였고 완에서 백리해를 얻었으며 송나라에서 건숙을 맞아들였고 진나라에서 비표와 공손지를 구하여 열두 나라를 아울러 드디어 서융에서 패권을 장악하였고, 효공은 상앙의 법을 써서 제후가 친히 복종하기를 지금에 이르도록 정치를 강하게 하였고, 혜왕은 장의의 계책을 써서 여섯 나라의 합종을 흩어버려서 진나라를 섬기게 하였고, 소왕은 범수를 얻어서 공실을 강하게 하였으니 이 네 임금들은 다 손님의 공으로 (정치를) 하였으니 손님이 무엇을 진나라에 빚졌습니까?
 
泰山은 不讓土壤故로 大하고 河海는 不擇細流故로 深이거늘 今乃棄黔首하여 以資敵國하고 卻賓客하여 以業諸侯하니 所謂藉寇兵 而齎盜糧者也이니이다 王이 乃召李斯하여 復其官하고 除逐客令하다 斯는 楚人이라 嘗學於荀卿이러니 秦이 卒用其謀하여 幷天下하고 有韓非者하니 善刑名하여 爲韓使秦이러니 因上書說秦하여 滅韓하니 王이 悅之라 斯가 疾而間之하여 遂下吏하고 斯가 遺之藥하여 令自殺하다
태산은 토양을 사양하지 않은 까닭으로 크고, 황하와 바다는 작은 흐름을 가리지 않는 고로 깊게 되었거늘, 지금 이에 백성을 버려서 적국에 보탬을 주고 손님을 쫓아내어 제후에게 (이로운) 일을 주니 이른바 도적에게 병장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에 이사를 불러 그 벼슬을 회복시키고 손님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없앴다. 이사는 초나라 사람인데 일찍이 순경(순자)에게서 배웠더니 진나라가 마침내 그의 계책을 써서 천하를 아우르고, (또) 한비자라는 사람이 있어 형벌과 법칙에 밝았는데 한나라에서 진나라로 사신이 되어 왔더니 그로 인해 글을 올려 진나라를 설득하여 한나라를 멸망시키니 진나라 왕이 기뻐하더라. 이사가 이것을 시기하여 이간질하고 마침내 옥리에게 내려서 이사가 약(독약)을 보내 자살하게 했다.
 
十七年에 內史勝이 滅韓하고 十九年에 王翦이 滅趙하고 二十二年에 王賁이 滅魏하고 二十四年에 王翦이 滅楚하고 二十五年에 王賁이 滅燕하고 二十六年에 王賁이 滅齊하다 秦王이 初幷天下에 自以爲德兼三皇하고 功過五帝라 하여 更號曰皇帝라 하고 命爲制 令爲詔하며 自稱曰 朕이라 하고 定爲水德하여 以十月로 爲歲首하다 /翦자를전, 賁클분,꾸밀비, 詔고할조,
(진시황제) 17년에 내사 승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19년에 왕전이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22년에 왕분(왕전의 아들)이 위나라를 멸하고 24년에 왕전이 초나라를 멸하고 25년에 왕분이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26년에 왕분이 제나라를 멸하였다. 진나라 왕이 처음 천하를 아우르니 스스로 은덕이 삼황(伏羲 燧人 神農의 고대 전설상의 세 임금)을 겸하였고, 공적이 오제(黃帝 顓頊 帝嚳 堯 舜의 전설상의 다섯 임금)를 넘었다고 생각하여 칭호를 황제라 바꾸고, 명을 제라 하고 영을 조라하며 스스로를 짐이라고 하고 (나라의 덕을) 수덕(물의 덕)으로 정하여 10월을 한 해의 처음으로 하였다.
 
制曰死而以行爲諡則 是는 子議父 臣議君이라 甚無謂하니 自今以來로 除諡法하여 朕은 爲始皇帝하고 後世는 以計數하여 二世와 三世로 至于萬世하여 傳之無窮하라 하다 收天下兵聚咸陽하여 銷以爲鍾鐻金人十二하니 重各千石이라 徙天下豪富於咸陽十二萬戶하다 /鐻악기걸이거,
(황제가) 명을 내려 이르기를, “(왕이) 죽고 나서 시호를 정하는 것은 곧 이는 자식이 아비를 의논(평가)하고 신하가 임금을 의논하는 것이라 심히 말할 수도 없으니 지금부터 다가오는 이후로는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고 짐은 시황제로 하고 다음 세대는 차수를 계산하여 2세 3세로 하여 만대에 이르도록 끝없이 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천하의 병장기를 함양에 모아서 그것을 녹여 종과 악기걸이, 쇠로 만든 사람 열둘을 만드니 무게가 각각 천 석이었다. 천하의 큰 부자 12만호를 함양에 이주시켰다.
 
丞相王琯等이 言하되 燕齊荊이 地遠하니 不置王이면 無以鎭之하니 請立諸子하노이다. 始皇이 下其議하니 廷尉李斯가 曰 周武王의 所封子弟同姓이 甚衆이나 後屬이 疏遠하여 相攻擊을 如仇讐이러니 今海內가 賴陛下神靈하여 一統皆爲郡縣하니 諸子功臣을 以公賦稅로 賞賜之면 甚足易制오 天下가 無異意則安寧之術也이니 置諸侯는 不便이라 하니 /丞도울승, 琯옥피리관, 陛섬돌폐.
승상 왕관이 말하되, “연나라와 제나라와 초나라가 지역이 머니 왕을 따로 두지 않으면 진압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여러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를 청합니다.” 하니, 시황이 그것을 (공경에게) 의논하라고 하명했다. 정위 이사가 말하기를, “주나라 무왕이 자제와 같은 성(동족)을 봉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후손들이 소원하여 서로 공격함이 원수같이 하였으니 지금 온 천하가 폐하의 신령스러움에 힘입어서 하나로 통일되어 모두 군과 현이 되었으니 여러 아들과 공신을 세금으로 상을 주면 매우 만족하고 제어하기 쉬울 것이요, 천하가 다른 뜻이 없을 것인 즉 안녕을 도모할 방법이니 제후를 두는 것은 불편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始皇이 曰 天下가 初定이거늘 又復立國이면 是는 樹兵也而求其寧息이나 豈不難哉아 廷尉議가 是라 하고 分天下하여 爲三十六郡하고 置守尉監하다.
/守尉監 : 郡守는 掌治其郡하고 丞尉는 掌佐守하야 典武職甲卒하고 監은 御史니 掌監郡이라
시황이 말하기를, “천하가 처음 안정되었거늘 또다시 (제후의) 나라를 세우면 이는 병장기를 세워놓고 편안히 쉬기를 구하는 것이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의논이 옳다.”고 하고, 천하를 나누어 서른여섯 군으로 하고 태수와 승위와 어사를 두었다.
 
二十八年에 始皇이 東行郡縣할새 上鄒嶧山하고 立石頌功業하고 上泰山하여 立石封祠祀하고 旣下할새 風雨가 暴至하니 休樹下하고 封其松爲五大夫하고 禪于梁父하고 遂東遊海上이더니 方士 齊人 徐巿等이 上書請與童男童女로 入海求 蓬萊 方丈 瀛洲 三神山 仙人과 及 不死藥이라 하니 如其言하여 遣徐巿等行하다. /鄒나라이름추, 嶧산이름역, 瀛바다영, 洲섬주
(시황제) 28년에 시황이 동쪽으로 군과 현에 순행하였는데 추역산에 올라 비석을 세워 (자신의) 공업을 찬양하고 태산에 올라서 비석을 세워 봉하고 제사를 지내고 이미 내려오는데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니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그 소나무를 오대부 벼슬에 봉하고 양보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드디어 동쪽으로 가 바닷가에서 놀더니 도사인 제나라 사람 서불 등이 글을 올려 동남동녀(소년소녀)와 더불어 바다로 가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의 삼신산 신선 및 불사약을 찾겠다고 청하니 그 말대로 하라고 하여 서불 등을 보내어 가게 하였다.
 
始皇이 浮江至湘山하니 大風하여 幾不能渡라 問博士曰 湘君은 何神고 對曰 堯女舜妻이니이다 始皇이 大怒하여 伐其樹赭其山하고 遂自南郡而還하다 韓人 張良이 以五世相韓으로 韓亡에 欲爲報仇러니 始皇이 東行至博浪沙中하니 良이 令力士로 操鐵椎하여 擊始皇이다가 誤中副車하니 始皇이 驚하여 求不得하고 令天下로 大索하다 /湘강이름상, 赭붉을자,
시황이 장강에 떠서 상산에 이르니 크게 바람이 불어 거의 (湘江을) 건널 수가 없었다. 박사에게 묻기를, “상군(상강을 다스리는 신)은 어느 신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요임금의 딸이요 순임금의 아내(娥皇과 女英)입니다.”라고 했다. 시황이 크게 성을 내어 그 (상군의 사당이 있는) 산의 나무를 베어 벌거숭이산을 만들었다. 마침내 남군으로부터 돌아왔다. 한나라 사람 장량이 다섯 세대 동안 한나라 재상을 지냈는데 한나라가 망하자 원수를 갚고자 하더니 시황이 동쪽으로 가서 박랑사 가운데 이르니 장량이 역사를 시켜 쇠몽둥이를 가지고 시황을 쳤는데 잘못 수행하는 수레를 치니 시황이 놀라서 잡으려했으나 잡지 못하고 천하로 하여금 수색하게 했다.
 
三十一年에 更臘爲嘉平하다. 三十二年에 始皇이 巡北邊이러니 方士盧生이 入海還하여 奏錄圖書曰 亡秦者는 胡也라 하니 始皇이 乃遣蒙恬하여 發兵三十萬人하여 北伐匈奴하고 築長城할새 起臨洮至遼東하니 延袤가 萬餘里라 威振匈奴더라. /臘섣달납,臘享(臘日에지내는제사)납, 盧밥그릇 노, 遼멀요, 袤길이무, 匈오랑캐흉, 洮(씻을 조)
31년에 섣달 제사를 바꾸어 가평이라고 하였다. 32년에 시황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였는데 도사 노생이 바다에 갔다가 돌아와서 녹도서(예언서)를 드리며 말하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은 오랑캐라.” 하니, 시황이 이에 몽염을 보내어 30만 군대를 출동시켜 북쪽으로 흉노를 치고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에서 출발하여 요동에 이르니 이어진 길이가 만 여리였다. 위세가 흉노를 진동했다.
 
三十四年에 丞相李斯가 上書曰 異時에 諸侯가 並爭하여 厚招遊學이러니 今天下가 已定에 法令이 出一하니 百姓이 當家則力農工하고 士則學習法令이거늘 今諸生이 不師今而學古하고 以非當世하고 惑亂黔首하여 聞令下則各以其學으로 議之하여 入則心非하고 出則巷議하여 率羣下以造謗하니 臣은 請史官이 非秦記거든 皆燒之하고 非博士官의 所職이오 天下에 有藏詩書百家語者는 皆詣守尉하여 雜燒之하고 有偶語詩書者거든 棄市하고 以古非今者는 族하고 所不去者는 醫藥 卜筮 種樹之書요 若有欲學法令이거든 以吏爲師라 하니 制曰 可라 하다
34년에 승상 이사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다른(지난) 시절에 제후들이 함께 경쟁하듯 후하게 떠도는 학자를 불러들이더니, 이제 천하는 이미 (하나로) 정해졌으니 법령이 통일되어 나아가니 백성이 집에서는 농사와 공업에 힘쓰고 선비이면 법령을 학습할 것이거늘, 이제 학생들이 지금(현실)을 스승삼지 아니하고 옛 것을 배워서 당세(현실)를 비난하고 검은머리(백성)를 미혹하여 어지럽게 하여 (나라의) 명령이 내려옴을 들으면 각각 그 배운 바로써 의논하여 (집에) 들어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집밖에) 나가서는 거리에서 의논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비방을 지어내니 신은 청컨대 사관은 진나라 기록이 아니면 모두 불사르며, 박사관이 맡은 바가 아니고 천하에서 (개인적으로) 시서와 백가어를 감춘 자가 있으면 모두 고을의 태수와 현위에게 나아가서 뒤섞어 불태우며, 시서를 우의적으로 하는 자가 있으면 (죽여서) 거리에 내버리고, 옛날로써 지금을 비난하는 자는 족멸하고, 버리지 아니할 것은 의약과 복서(점)와 종수(식목)에 관한 책이요,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시황이) 명령하여 “그리하라.”고 했다.
 
三十五年에 侯生盧生이 相與譏議始皇하고 因亡去하니 始皇이 大怒曰 盧生等을 吾가 尊賜之甚厚이더니 今乃誹謗我하고 諸生이 在咸陽者는 吾가 使人廉問하니 或爲妖言하여 以亂黔首라 하여 於是에 使御史로 悉案問諸生하니 傳相告引하여 乃自除犯禁者가 四百六十四人이라 皆坑之咸陽하니 長子扶蘇가 諫曰 諸生이 皆誦法孔子거늘 今上이 皆重法繩之하시니 臣은 恐天下가 不安일까 하노이다 始皇이 怒하여 使扶蘇로 北監蒙恬軍於上郡하다 /侯과녁 후, 제후 후, 黔검을 검, 繩 줄 승,
35년에 후생과 노생이 서로 더불어 시황을 원망하고 그로 인해 도망가 버리니 시황이 크게 성내어 말하기를, “노생 등은 내가 존중하여 내려준 것이 아주 많거늘 지금 이에 나를 헐뜯었고, 함양에 있는 여러 선비들을 내가 사람을 시켜 살피고 물었더니 어떤 사람은 괴이한 말로 백성들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이에 어사를 시켜 여러 선비들을 모두 살펴 물으니 전하여 서로 알리고 이끌어서 이에 스스로 나뉘어서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4백6십4인이라 모두 함양에서 구덩이에 묻으니 장자 부소가 간하여 말하기를, “여러 선비들이 모두 공자를 외우고 본받거늘 지금 임금님께서 모두 중한 법으로 묶으니 신은 천하가 불안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시황이 성을 내어 부소로 하여금 북쪽으로 가서 몽염의 군대를 상군에서 감독하게 하였다.
 
始皇이 以爲咸陽에 人多하고 先王宮庭이 小라하여 乃營作朝宮於渭南上林苑中할새 先作前殿阿房하니 東西가 五百步요 南北이 五十丈이요 上可坐萬人하고 下可建五丈旗라 周馳爲閣道하여 自殿下로 直抵南山하고 表南山之顚하여 以爲闕하고 爲複道하여 自阿房으로 渡渭屬之咸陽하여 以象天極과 閣道가 絶漢抵營室也러라 阿房宮이 未成하여서 成이면 欲更擇令名하니 天下가 謂之阿房宮이더라
시황이 함양에 사람이 많고 선왕의 궁정이 작다고 하여 이에 위수의 남쪽 상림원 중에 조궁을 짓는데 먼저 앞 궁전 아방을 지으니 동서가 오백보요 남북이 오십 길이요 위에는 만 사람이 앉을 만하고 아래에는 다섯 길의 깃발을 세울 만했다. 두루 복도를 뻗게 하여 전각 아래로부터 바로 남산에 이르고 남산 꼭대기를 드러나게 하여 대궐로 삼고 복도를 만들어 아방궁으로부터 위수를 건너 함양에 붙게 하였으니 하늘 끝과 복도가 은하수를 끊어서 영실에 이르게 함을 형상하였더라. 아방궁이 완성되지 아니하여 완성되면 다시 좋은 이름을 가리려고 하니 천하 사람들이 그를 일러 아방궁이라고 했다.
 
始皇의 爲人 天性이 剛戾自用하여 天下事를 無大小히 皆決於上하여 至以衡石量書하되 日夜有程하여 不得休息하니 貪於權勢가 至如此더라 秦有出使者하여 還이라가 遇人하니 持璧授之曰 爲我遺滈池君하라 明年에 祖龍이 死라 하더라 /滈장마 호, 衡石程書:옛날에 문서는 竹簡이나 木箚를 사용하였는데, 秦始皇은 천하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자신이 직접 결재하여, 저울로 문서의 무게를 달아서 처리하였는바, 衡石量書라고도 한다
시황의 사람됨과 천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제 멋대로 하여 천하의 모든 일을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임금이 결정을 하니 저울질하고 문서를 헤아리는데 밤낮으로 일정이 있어 휴식이 없으니 권세를 탐하는 것에 여기에 이르렀더라. 진나라에 벼슬했던 자가 있었는데 돌아가다가 사람을 만나니 둥근 옥을 지녔다가 주면서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호지군(함양에 있는 물의 신)에 주라. 명년에 조룡(처음 황제, 진시황)이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三十七年에 始皇이 出遊할새 丞相 李斯와 少子 胡亥와 宦者 趙高가 從이더니 始皇이 崩於沙丘平臺하니 秘不發喪하고 詐爲受詔하고 立胡亥하여 賜扶蘇死하고 載始皇轀輬車中하여 以一石鮑魚로 亂其臭하고 至咸陽하여 始發喪하고 胡亥가 卽位하니 是爲二世皇帝더라 /轀(臥車온) 輬눕는수레 량, 鮑절인 고기 포,
37년에 시황이 나가 노닐 때 승상 이사와 어린 아들 호해와 환관 조고가 따르더니 시황이 사구 평대에서 죽으니 비밀에 부쳐 발상하지 않고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속이고 호해를 (후계자로) 세우고 부소에게 죽음을 내리고 시황을 온량차(누울 수 있는 수레)에 싣고 한 섬 절인 고기로 그 냄새를 어지럽히고 함양에 이르러 비로소 발상하고 호해가 즉위하니 이가 이세황제가 되었다.
 
二世皇帝의 名은 胡亥니 元年에 東行郡縣하여 謂趙高曰 吾欲悉耳目之所好하고 窮心志之所樂하여 以終吾年하노라 高가 曰 陛下가 嚴法刻刑하며 盡除故臣하고 更置所親信則高枕肆志矣이리이다 二世然之하여 更爲法律하여 務益刻深하니 公子大臣이 多僇死이더라 /僇욕보일 륙, 죽일 륙)
이세 황제의 이름은 호해이니 원년에 동쪽 군현을 순행하면서 조고에게 말하기를,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즐거움을 다하고 마음이 즐거운 바를 다하여 내 평생을 마치고자 한다.” 하니, 조고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각박하게 하여 옛 신하들을 모두 제거하고 고쳐서 친하고 믿을 만한 자를 두면 베개를 높이하고 뜻을 편안히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세가 그렇게 생각하여 법률을 고쳐 더욱 각박하고 심하게 하니 공자(귀족)와 대신들이 많이 죽임을 당하였다.
 
陽城人陳勝은 字가 涉이니 少與人으로 傭耕할새 輟耕之隴上하여 悵然久之에 曰 苟富貴어든 無相忘이라 하니 傭者가 笑曰 若이 爲傭耕하니 何富貴也오 勝이 太息曰 嗟呼이라 燕雀이 安知鴻鵠之志哉아 하더니 至是에 與吳廣으로 起兵于蘄하다 時에 發閭左하여 戍漁陽할새 勝과 廣이 爲屯長이더니 /隴고개이름 농, 둔덕 농, 悵 슬퍼할 창, 鴻큰 기러기 홍, 鵠고니 곡, 蘄 풀이름 기,
양성 사람 진승은 자가 섭인데 젊어서 어떤 사람과 품팔이 밭갈이를 할 때 밭갈이를 멈추고 둔덕 위에서 (신세를) 오래 슬퍼한 뒤에 말하기를, “진실로 부귀해 지거든 서로 잊지 말자.”라고 하니 품팔이꾼이 웃으며 말하기를, “ 네가 품팔이 밭갈이를 하면서 어떻게 부귀해 지겠는가?” 했다. 진승이 크게 한숨 쉬고 말하기를, “아아, 제비와 참새가 어찌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오광과 더불어 기현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 때에 (진나라에서) 이문의 왼쪽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동원하여 어양 고을을 지키게 했는데 진승과 오광이 진을 친 부대의 우두머리가 되었더니
 
會에 大雨하니 道不通이라 乃召徒屬曰 公等은 失期하니 法當斬이라 壯士가 不死則已거니와 死則擧大名이리라 王侯將相이 寧有種乎아 하니 衆皆從之라 乃詐稱公子扶蘇項燕하여 稱大楚라 하고 勝은 自立爲將軍하고 廣은 爲都尉이더니 大梁에 張耳陳餘가 詣軍門上謁하니 勝이 大喜하여 自立爲王하고 號를 張楚라 하니 諸郡縣이 苦秦法하여 爭殺長吏하고 以應涉이더라
마침 큰 비가 와서 길이 통하지 않았다. 이에 무리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기약을 어겼으니 (진나라) 법으로 마땅히 목이 베일 것이다. (그러나) 장사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크게 이름을 떨쳐야 하리라. 임금이나 제후나 장군이나 재상이 어찌 (정해진) 씨가 있겠는가?” 하니 무리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이에 거짓으로 (진시황의 큰 아들) 공자 부소와 (초나라 장수) 항연을 칭하고 나라 이름을 대초라고 일컬으며 진승은 스스로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가 되었다. 대량(고을 이름)의 장이와 진여가 군문에 이르러 뵙고자 하니 진승이 크게 기뻐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장초라 하니 여러 고을에서 진나라 법을 괴로워하다가 다투어 수령을 죽이고 진섭(진승)에게 응하였다.
 
謁者가 從東方來하여 以反者聞하니 二世가 怒하여 下之吏하니 後使者가 至에 上이 問之한데 對曰 群盜는 鼠竊狗偸라 不足憂也라 하니 上이 悅이더라 陳勝이 以所善陳人武臣으로 爲將軍하고 耳餘로 爲校尉하여 使徇趙地더니 至趙하여 武臣이 自立爲趙王하다 沛人劉邦이 起兵於沛하니 父老가 爭殺令하고 迎立爲沛公하고 沛邑掾 主吏 蕭何 曹參이 爲收沛子弟하여 得三千人하다 /掾아전 연,
아뢰는 자가 동쪽으로부터 와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알려주니 이세황제가 성을 내어 담당 관리에게 내쳤다. 뒤에 사자가 이르러 황제가 물었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떼도둑들은 쥐나 개처럼 훔치는 좀도둑이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였다. 진승이 잘 지냈던 진나라 사람 무신을 장군으로 삼고 장이와 진여를 교위로 삼아 조나라 땅을 둘러보라고 군령을 내렸더니 조나라 땅에 이르러 무신이 스스로 조왕이 되었다. 패현 사람 유방이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유지들이 다투어 수령을 죽이고 그를 맞이하여 패공으로 삼고 패읍의 아전과 이방인 소하와 조참이 (유방을) 위하여 패현의 젊은이를 모아 3천명을 얻었다.
 
項梁者는 楚將項燕之子也라 嘗殺人하고 與兄子籍으로 避仇吳中하니 籍의 字는 羽라 少時에 學書다가 不成하여 去하고 學劍에 又不成하니 梁이 怒한데 籍이 曰 書는 足以記姓名而已오 劍은 一人敵이라 不足學이라 學萬人敵이라 하니 梁이 乃敎籍兵法하다 會稽守殷通이 欲起兵應陳涉할새 使梁으로 爲將하니 梁이 使籍으로 斬通하고 佩其印綏하고 遂擧吳中兵하여 得八千人하고 籍이 爲裨將하니 時年이 二十四더라 /項목 항, 裨도울 비)
항량은 초나라 장수 항연의 아들이라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 형의 아들 항적과 더불어 원수를 피해 오나라에 있었다. 항적의 자는 우인데 어렸을 적에 글공부를 하다가 이루지 못하여 버리고 검술을 배우다가 또 이루지 못하니 항량이 성을 내니 항적이 말하기를, “글은 성명을 기록하면 족한 것이요 검술은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라 배울 만한 게 못됩니다. (저는) 만 사람을 대적하는 것을 배우겠습니다.” 하니 항량이 이에 항적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회계의 태수 은통이 군사를 일으켜 진섭에게 응하려 하여 항량으로 하여금 장군을 삼으니 항량이 항적을 시켜 은통을 참하고 도장과 인끈을 차고 드디어 오나라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8천명을 얻고 항적이 비장이 되니 그 때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다.
 
齊人田儋이 自立爲齊王하다 趙王武臣이 使將韓廣으로 略燕地러니 廣이 自立爲燕王하다 楚將周巿定魏地하고 迎魏公子咎하여 立爲魏王하다 二年에 吳廣이 爲其下의 所殺하다 陳勝이 爲其御莊賈의 所殺하고 以降秦하다 秦將章邯이 擊魏하니 齊楚가 救之러니 齊王儋과 魏王咎가 與周巿로 皆敗死하다 趙王武臣이 爲其將李良의 所殺하니 張耳陳餘가 立趙歇爲王하다 /儋멜 담,
제나라 사람 전담이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었다. 조왕 무신이 장군 한광을 시켜 연나라 땅을 공략하더니 한광이 스스로 연나라 왕이 되었다. 초나라 장군 주불이 위나라 땅을 평정하고 위나라 공자 구를 맞이하여 위왕으로 세웠다. (이세황제) 2년에 오광이 그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진승이 그 마부 장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군사들은) 진나라에 항복하였다. 진나라 장군 장한이 위나라를 공격하니 제나라와 초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하더니 제왕 담과 위왕 구가 주불과 함께 모두 패하여 죽었다. 조왕 무신이 그 장수 이량에게 죽임을 단하니 장이와 진여가 조헐을 조나라 왕으로 세웠다.
 
居鄛人范增이 年七十에 好奇計러니 往說項梁曰 陳勝이 首事에 不立楚後而自立하니 其勢不長이라 今君이 起江東에 楚蠭起之將이 爭附君者는 以君世世楚將으로 必能復立楚之後也라 하니 於是에 項梁이 求得楚懷王孫心하여 立爲楚懷王하니 以從民望이더라 /蠭벌봉,
거소 사람 범증이 나이 일흔에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더니 항량에게 가서 설득하기를, “진승이 처음 거사할 때 초나라의 후계를 세우지 않고 자신이 서더니 그 기세가 길지 않았다. 지금 주군이 강동에서 기병함에 초나라의 벌떼같이 일어나는 장수들이 다투어 주군에게 붙는 것은 주군이 대대로 초나라의 장군이므로 반드시 능히 초나라의 후계를 다시 세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에 항량이 초나라 회왕 손심을 찾아서 초회왕을 (다시)세우니 백성이 바라는 바를 따른 것이라.
 
○趙高가 與丞相李斯로 有隙이더니 高侍二世方燕樂에 婦女居前하여 使人告丞相斯하여 可奏事라 하니 斯가 上謁에 二世가 怒曰 吾嘗多閒日하되 丞相이 不來다가 吾方燕私에 丞相이 輒來라 하니 高가 曰 丞相의 長男李由가 爲三川守하여 與盜通하니 且丞相이 居外하여 權重於陛下라 하니
조고가 승상 이사로 틈이 있더니 조고가 이세황제를 모시고 잔치를 즐길 적에 여자들이 앞에 있어 사람을 시켜 승상 이사에게 알리기를 가히 일을 아뢰라고 하니 이사가 상께 나아가 아뢰자 이세황제가 성내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가한 날이 많은데 승상이 오지 않다가 내가 지금 잔치를 사사로이 즐기는데 승상이 문득 와서 일을 아뢴다.”고 하니, 조고가 말하기를, “승상의 장남 이유가 삼천 태수가 되어 도적(반란군)과 통하니 또한 승상이 궐밖에 있어 권세가 폐하보다도 무겁습니다.”라고 하니
 
二世 然之하여 下斯吏하여 具五刑하고 腰斬咸陽市하니 斯가 出獄하여 顧謂中子曰 吾欲與若으로 復牽黃犬하고 俱出上蔡東門하여 逐狡兎러니 豈可得乎아 하고 遂父子相哭而夷三族하다
이세 황제가 그렇다고 하여 이사를 형리에게 넘겨 다섯 가지 형벌을 갖추어 가하고 함양의 저자거리에서 허리를 참하게 하니 이사가 감옥에서 나와 가운데 아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너와 더불어 다시 누런 개를 이끌고 함께 상채의 동문을 나가서 교활한 토끼를 쫓아 잡으려 하였더니 어찌 가히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부자가 서로 붙들고 울었다. 그리고 삼족이 멸해졌다.
 
◌中丞相 趙高가 欲專秦權하되 恐群臣이 不聽하여 乃先設驗하여 持鹿獻於二世曰馬也라 하니 二世가 笑曰 丞相이 誤邪아 指鹿爲馬오녀 問左右하니 或黙 或言이더니 高가 陰中諸言鹿者以法하니 後에 群臣이 皆畏高하여 莫敢言其過더라
중승상 조고가 진나라 권세를 오로지 하고자 하되 여러 신하들이 듣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먼저 시험해 보기로 하여 사슴을 끌고 와 이세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말이라고 하니 이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승상이 잘못 되었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군요.” 하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사람은 묵묵히 있고 어떤 사람은 말을 하는데, 조고가 남모르는 중에 사슴이라고 말한 여러 사람을 형법으로 얽으니 뒤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잘못을 말하지 못하더라.
 
◌項梁이 與秦將章邯으로 戰이라가 敗死하다 宋義先言其必敗러니 梁이 果敗하고 秦이 攻趙하니 楚懷王이 以義로 爲上將하고 項羽로 爲次將하여 救趙러니 義가 驕어늘 羽가 斬之하고 領其兵하여 大破秦兵鉅鹿下할새 虜王離等하고 降秦將章邯 董翳 司馬欣하니 羽가 爲諸侯上將軍하다
항량이 진나라 장수 장한과 더불어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송의가 먼저 그가 (교만하여)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하더니 과연 패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조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회왕이 송의로 상장군을 삼고 항우로 차장군을 삼아 조나라를 구하게 하더니 송의가 교만하거늘 항우가 그를 베어 버리고 그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군대를 거록 아래에서 크게 깨트렸는데 왕이 등을 사로잡았고 진나라 장수 장한 동예 사마흔을 항복시키니 항우가 제후 상장군이 되었다.
 
◌先是에 趙高가 數(삭)言關東盜는 無能爲라 하더니 及秦兵이 數敗에 高가 恐二世怒하여 使其壻閻樂으로 弑二世於望夷宮하고 立公子嬰하여 爲秦王하니 二世之兄子也라 嬰이 旣立에 族殺趙高하다
이보다 먼저 조고가 여러 번 관동(함곡관 동쪽)의 도적(반란군)은 능히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하더니 진나라 군사가 자주 패하기에 이르자 조고는 이세가 성낼까 두려워하여 그 사위 염락을 시켜서 이세황제를 망이궁에서 죽이고 공자 영을 세워서 진왕으로 삼으니 이세황제의 형(扶蘇)의 아들이라. 영이 이미 왕위에 오르자 조고의 종족을 멸했다.
 
◌初에 楚懷王이 與諸將으로 約하되 先入定關中者는 王之라 하되 當時에 秦兵이 强하니 諸將이 莫利先入關하되 獨項羽가 怨秦殺項梁하여 奮身願與沛公으로 先入關하니 懷王의 諸老將이 皆曰項羽의 爲人이 慓悍猾賊하고 獨沛公이 寬大長者라 可遣이라 하니 乃遣沛公하다
처음에 초나라 회왕이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약속하되 먼저 관중(함곡관과 용관 사이)에 들어가 평정하는 자는 왕으로 삼겠다고 하였으나 당시에는 진나라 군사가 강하니 여러 장수들이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홀로 항우는 진나라가 항량을 죽인 것을 원망하여 몸을 떨쳐 패공(劉邦)과 더불어 관중에 먼저 들어가기를 원하니 회왕의 여러 늙은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항우의 사람됨이 날래고 사나우며 교활하고 해로우니 오직 패공이 관대한 어른이라 가히 보낼 만하다.” 하니, 이에 패공을 보냈다.
 
◌高陽人 酈食其가 謂沛公의 麾下騎士에게 曰 吾聞沛公은 慢而易人하고 多大略이라 하니 此는 眞吾所願從游라 若이 見沛公하고 謂曰臣里中에 有酈生하니 年六十餘에 長이 八尺이요 人皆謂之狂生이라 하되 生이 自謂非狂이라 하라 騎士가 曰沛公이 不好儒하여 客이 冠儒冠來者이면 輒解其冠하여 溲溺其中하니 未可以儒生說也라 하더라 /食먹을 식, 이름 이,
고양 사람 역이기가 패공의 휘하 기사(기병 장교)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패공은 거만하고 사람을 쉽게 보며 큰 계략이 많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내가 따라 노닐기를 원하던 바이라 네가 패공을 보고 이르되, ‘신의 고향 마을에 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 육십여 세에 키가 8척이요 사람들이 모두 미친 사람이라 이르되 그 사람이 스스로 미치지 않았다고 말한다.’라고 하라.” 하니, 기사가 말하기를, “패공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아서 손님이 선비의 갓을 쓰고 오는 사람이면 그때마다 그 갓을 벗겨서 그 가운데를 오줌으로 적시니 가히 선비를 말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沛公이 至高陽傳舍하여 召生入할새 沛公이 方踞床하여 使兩女子로 洗足以見生하니 生이 長揖不拜曰足下가 必欲誅無道秦인대 不宜踞見長者라 하니 於是에 沛公이 輟洗起하여 攝衣하고 延生上坐謝之하니 生이 爲沛公하여 說下陳留하고 後에 常爲說客이더라
패공이 고양의 역사(역말이 머무는 집)에 도착하여 역이기를 불러 들어가니 패공이 이제 막 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로 하여금 발을 씻기면서 역이기를 만나니 역이기가 길게 읍을 하고 절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가 반드시 무도한 진나라를 없애려고 한다면 마땅히 걸터앉아서 노인장을 만나서는 안 될 것이라.” 하니, 이에 패공이 발 씻기를 그치고 일어나 옷을 여미고 역이기를 이끌어 상좌에 앉히고 사례하니 역이기가 패공을 위해 설득하여 진류를 함락시켰다. 그 뒤에 항상 설득하는 막료가 되었다.
 
◌張良이 從沛公西하다 沛公이 大破秦軍하고 入關至覇上하니 秦王子嬰이 素車白馬로 繫頸以組하고 出降軹道旁하니 秦自始皇二十六年으로 倂天下하고 二世三世而亡하니 稱帝는 止十有五年이러라
장량이 패공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패공이 진나라 군대를 크게 깨트리고 관중으로 들어가 패상에 이르니 진왕 자영이 백마가 끄는 흰 차에 목에 밧줄을 걸고 나와서 지도(장안 15리의 정자) 옆에서 항복하니, 진나라는 시황제 26년에 천하를 아우르고 이세와 3세에 망하니 황제를 칭하기는 15년에 그쳤다.
 
◌趙高與丞相李斯有隙、高待二世、方燕樂婦女居前、使人告丞相斯:「可奏事。」斯上謁。二世怒曰:「吾嘗多閒日、丞相不來;吾方燕私、丞相乃來」高曰:「丞相長男李由爲三川守、與盜通。且丞相居外、權重於陛下。」二世以爲然、下斯吏、具五刑、腰斬咸陽市。斯出獄、顧謂其中子曰:「吾欲與若復牽黃犬、俱出上蔡東門、逐狡兔。豈可得乎!」遂父子相哭、而夷三族。
 
西漢
太祖高皇帝
◌漢太祖高皇帝는 堯之後로 姓은 劉氏요 名은 邦이요 字는 季니 沛의 豊邑中陽里人也라 母媼이 息大澤之陂할새 夢與神으로 遇하고 時에 大雷雨晦冥이라 父太公이 往하여 見交龍其上이러니 已而오 産季하니 隆準而龍顔이요 美鬚髥이요 左股에 有七十二黑子하고 寬仁愛人하고 意豁如也하여 有大度하고 不事家人生産이러니
한나라 태조 고황제는 요임금의 후예로 성은 유씨요 이름은 방이요 자는 계니 패현의 풍읍 중양리 사람이라. 어머니가 큰 호숫가에서 쉴 때 신과 만나는 꿈을 꾸었다. 그 때 크게 우레와 비가 쏟아져 주변이 캄캄했는데 아버지 태공이 가서 보니 교룡이 그 위에 덮치고 있었다. 그러고 난 뒤에 계를 낳으니 콧대가 우뚝하고 용의 얼굴이었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왼쪽 넓적다리에 일흔 두 개의 검은 점이 있고, 관대하고 인자하며 사람들을 사랑했다. 생각이 시원하여 큰 도량을 가지고 집안사람의 생산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及壯에 爲泗上亭長이러니 單父人 呂公이 好相人터니 見劉季狀貌하고 曰 吾相人多矣인데 無如季相이니 願季自愛하라 吾有息女하니 願爲箕帚妾이라 卒與劉季하니 卽呂后也라
어른이 되어 사상의 정장이 되었더니 단보 사람 여공이 관상을 잘 보더니 유계의 생김새와 얼굴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의 관상을 여럿 보았지만 유계의 얼굴만한 사람이 없었다. 원컨대 유계는 스스로를 잘 돌보시게. 나에게 딸이 있는데 그대의 시중을 드는 첩으로 삼기를 바라네.”라고 하였다. 마침내 유계에게 딸을 주었는데 그녀가 곧 (고황제의 황후인) 여후이다.
 
季爲縣送徒驪山할새 徒多道亡하니 自度比至에 盡亡之하고 到豊西하여 止飮하고 夜에 乃解縱所送徒 曰 公等은 皆去하라 吾亦從此逝矣라 하니 徒中壯士願從者가 十餘人이라 季가 被酒하고 夜徑澤中이더니 有大蛇가 當徑이거늘 季가 拔劍斬之러니 後人이 來至蛇所하니 有老嫗가 哭曰 吾子는 白帝子也러니 今者赤帝子가 斬之라 하고 因忽不見이거늘 後人이 告季하니 季가 心獨喜自負하고 諸從者가 日益畏之더라
유계가 패현을 위해 무리를 여산에 보냈는데 무리들이 길에서 많이 달아나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여산에) 이를 때면 모두 달아나겠다고 하여 풍읍 서쪽에 이르러 쉬면서 마시게 하고, 밤이 되어 이송하던 무리들을 풀어주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가라. 나도 또한 이제 가겠다.”라고 하니, 무리 중에 장사로 그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십여 명이었다. 유계가 술을 먹고 밤에 늪 사이의 길을 가더니 큰 뱀이 길에 누워있거늘 유계가 칼을 뽑아서 그것을 베었다. 뒤를 따르던 사람이 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어떤 늙은 할미가 울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백제의 아들인데 지금 적제의 아들이 그를 베었다.”라고 했다. 인하여 갑자기 보이지 않거늘, 뒤 따르던 사람이 유계에게 알리니 유계가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고 자부하였다. 여러 따르는 자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그를 두려워하였다.
 
◌陳涉이 起에 劉季亦起兵於沛하여 以應諸侯할새 旗幟를 皆赤이더라 楚懷王이 遣沛公하여 破秦入關하여 降秦王子嬰하고 旣定秦에 還軍覇上하고 悉召諸縣父老豪傑하여 謂曰 父老 苦秦苛法이 久矣라 吾與諸侯로 約하되 先入關中者는 王之하니 吾가 當王關中하리라 與父老로 約法三章耳로니 殺人者는 死하고 傷人及盜는 抵罪하고 餘悉除去秦苛法이라 하니 秦民이 大喜러라
진섭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계도 또한 패현에서 기병하여 제후들에게 응했는데 깃발이 모두 붉은 빛이었다. 초나라 회왕이 패공(유방)을 보내어 진나라를 깨트리고 관중에 들어가서 진나라 왕 자영을 항복시키고 이미 진나라를 평정하여 군사를 패상에서 돌리고 진나라의 모든 군현의 부로와 호걸들을 불러서 이르기를, “부로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고통을 받은 지가 오래이라. 내가 제후들과 약속하되 먼저 관중에 들어온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관중의 왕이 되리라. 부로와 더불어 세 장의 법을 약속하니 살인한 자는 죽이고 사람을 해치거나 도적질한 자는 죄에 따라 처벌하고 나머지 모두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제거할 것이라.” 하니 진나라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項羽가 率諸侯兵하고 欲西入關하니 或이 說沛公하여 守關門이러니 羽가 至하니 門이 閉라 大怒하여 攻破之하고 進至戱하여 期旦擊沛公하니 羽의 兵은 四十萬인데 號百萬이라 在鴻門하고 沛公의 兵은 十萬이라 在覇上이러니 范增이 說羽曰 沛公이 居山東에 貪財好色이러니 今入關에 財物을 無所取하고 婦女를 無所幸하니 此는 其志不在小하고 吾가 令人望其氣하니 皆爲龍成五采하니 此는 天子氣也라 急擊勿失하라 하다
항우가 제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관중에 들어가려 하니, 어떤 이가 패공을 설득하여 관중의 관문을 지키게 하였다. 항우가 관문에 이르니 관문이 닫혔는지라 크게 성을 내어 공격하여 그것을 깨트리고 나아가 희수에 이르렀다. 아침을 기하여 패공을 공격하니 항우의 군대는 40만인데 백만이라 불렀고 홍문에 진치고 있었다. 패공의 군대는 십만으로 패상에 진을 치고 있었다. 범증이 항우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패공이 산동에 있을 적에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했는데 이제 관중에 들어와서는 재물을 취한 바가 없고 부녀자를 가까이한 바가 없으니 이는 그의 뜻이 작은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사람을 시켜 그 기운을 살펴보게 했더니 모두 용이 되어 다섯 가지 색을 이루니 이는 천자의 기운입니다. 급히 쳐서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羽의 季父 項伯이 素善張良이러니 夜에 馳至沛公軍하여 告良하고 呼與俱去하니 良이 曰 臣從沛公이러니 有急에 亡은 不義라 하고 入하여 具告하고 因要伯入見하니 沛公이 奉巵酒爲壽하고 約爲婚姻 曰 吾가 入關에 秋毫를 不敢有所近하고 籍吏民封府庫하여 而待將軍하고 所以守關者는 備他盜也니 願伯은 具言臣之不敢倍[背]德하라 伯이 許諾曰 旦日에 不可不蚤自來謝이니라
항우의 막내 숙부인 항백이 평소에 장량과 잘 지내더니 밤에 패공의 군에 달려가서 장량에게 알리고 함께 달아나자고 호소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내가 패공을 따르다가 급한 일이 있을 때 도망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하고 들어가서 갖추어 고하고 인하여 항백이 들어가 뵙도록 요구하니 패공이 술잔을 받들어 오래살기를 빌고 혼인을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가 관중에 들어와서 추호도 감히 가까이한 것이 없고 벼슬아치와 백성의 명부를 만들고 창고를 봉하여 장군이 오기를 기다리며 관문을 지킨 까닭은 다른 도적을 대비한 것이니 바라건대 항백은 내가 감히 은덕을 배반하지 않았음을 갖추어 말해 달라.”고 하니, 항백이 허락하고 말하기를, “밝아오는 날에 일찍 와서 사례할 수밖에 없소.”라고 했다.
 
伯이 去하여 具以告羽하고 且曰 人이 有大功이거늘 擊之는 不義라 不如因善遇之니라 羽가 許諾하고 沛公이 旦從百餘騎하여 見羽鴻門하고 謝曰臣이 與將軍으로 戮力而攻秦할새 將軍은 戰河北하고 臣은 戰河南이러니 不自意先入關하여 破秦하고 得復見將軍於此이더니 今者에 有小人之言하여 令將軍으로 與臣有隙이라 하니 羽가 曰 此는 沛公의 左司馬 曹無傷之言이라 하고 羽가 留沛公與飮할새
항백이 돌아가서 갖추어 항우에게 고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큰 공을 세웠는데 그를 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그로 인해 잘 대우함이 나으니라.” 하니, 항우가 허락하고 패공이 아침에 백여 기를 몰고 와서 홍문에서 항우를 만나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내가 장군과 더불어 힘을 합쳐 진나라를 칠 때 장군은 황하 북쪽에서 싸우고 나는 황하 남쪽에서 싸우더니 먼저 관중에 들어가서 진나라를 깨트리고 다시 장군을 여기에서 만나기를 스스로 뜻하지 아니 하였더니 지금에 소인의 말이 있어 장군으로 하여금 나와의 사이에 틈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항우가 말하기를, “이는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의 말이오.”라고 하고, 항우가 패공을 머무르게 하고 더불어 술을 마셨는데,
 
范增이 數(삭)目羽하고 擧所佩玉玦者가 三이로되 羽가 不應이라 增이 出하여 使項莊으로 入前爲壽하고 請以劍舞하여 因擊沛公이러니 項伯이 亦拔劍起舞할새 常以身으로 翼蔽沛公하니 莊이 不得擊이라 張良이 出告樊噲以事急하니 噲擁盾直入하여 嗔目視羽하니 頭髮이 上指하고 目眥가 盡裂이라 羽가 曰 壯士라 하고 賜斗巵酒와 一生彘肩하니 噲가 立飮하고 拔劍切肉啗之하니 /玦패옥 결
범증이 항우에게 자주 눈짓하고 차고 있던 옥결을 쳐든 것이 세 번이었지만 항우가 응하지 않으니, 범증이 나가서 항장을 시켜서 들어가 앞에서 축수하고 칼춤 추기를 청하여 인하여 패공을 치려고 하였더니, 항백이 또한 칼을 뽑아 춤을 추며 항상 몸으로 패공을 날개처럼 덮으니 항장이 칠 수가 없었다. 장량이 나와서 번쾌에게 일이 급하다고 알리니 번쾌가 방패를 안고 곧바로 들어가서 성낸 눈으로 항우를 보니 머리카락이 위를 가리키고 흘긴 눈이 다 찢어질 것 같았다. 항우가 말하기를 “장사로다.” 하고, 말 술과 생 돼지고기 어깨살을 주니 번쾌가 서서 술을 마시고 칼을 뽑아 고기를 잘라서 먹었다.
 
羽가 曰 能復飮乎아 噲曰 臣이 死且不避어든 巵酒를 安足辭리오 沛公이 先破秦入咸陽하여 勞苦而功高가 如此거늘 未有封爵之賞하고 而將軍이 聽細人之說하여 欲誅有功之人하니 此는 亡秦之續耳라 切爲將軍不取也하노라 羽가 曰 坐하라 噲從良坐더니 須臾에 沛公이 起如厠하고 因招噲出하여 閒行趨覇上하고 留良謝羽 曰 沛公이 不勝杯杓하여 不能辭하고 使臣良으로 奉白璧一雙하여 再拜獻將軍足下하고 玉斗一雙은 再拜奉亞父足下라 하니 羽가 曰 沛公이 安在오 良이 曰 聞將軍이 有意督過之하고 脫身獨去하여 已至軍矣니이다 /杓자루포,구기작
항우가 말하기를, “능히 다시 마실 수 있는가?” 하니 번쾌가 말하기를 “신이 죽음도 또한 피하지 않는데 술잔을 어찌 족히 사양하리오. 패공이 먼저 진나라를 깨트리고 함양에 들어와서 노고가 많고 공이 높은 것이 이 같은데 벼슬을 봉하여 상을 주지는 아니하고 장군이 자잘한 사람의 말을 듣고 공이 있는 사람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망한 진나라를 잇는 것이라 간절히 장군을 위하여 취하지 않소이다.” 하니, 항우가 “앉으라.” 하여, 번쾌가 장량을 따 앉았더니, 잠깐 사이에 패공이 일어나 뒷간에 가서 인하여 번쾌를 불러내어 사이 길로 패상을 향해 달렸다. 장량을 머무르게 하여 항우에게 사례하여 말하기를, “패공이 술을 이기지 못하여 간다는 말도 못하고 신 장량으로 하여금 희고 둥근 옥 한 쌍을 받들어 두 번 절하고 장군께 바치고 옥 국자 한 쌍은 두 번 절하고 범증에게 받들어 드립니다.”라고 하니, 항우가 말하기를, “패공은 어디에 있소?”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장군께서 허물을 꾸짖을 뜻이 있음을 듣고 몸을 빼어서 혼자 가서 이미 군진에 닿았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范增이 拔劍하여 撞玉斗而破之하고 曰唉라 豎子는 不足與謀로다 奪將軍의 天下者는 必沛公也라 하더라 沛公이 至軍하여 立誅曹無傷하다 居數日에 羽가 引兵西屠咸陽하고 殺降王子嬰하고 燒秦宮室하니 火가 三月不絶이라 掘始皇冢하고 收寶貨婦女而東하니 秦民이 大失望이더라 韓生이 說羽曰 關中은 阻山帶河하여 四塞之地요 肥饒하니 可都以覇라 하니 羽가 見秦殘破하고 且思東歸曰 富貴하여 不歸故鄕이면 如衣繡夜行耳라 하고 韓生이 退曰 人言楚人은 沐猴而冠이라 하더니 果然이로다 羽가 聞之하고 烹韓生하다 /唉물을애,탄식할애, 阻험할조
범증이 칼을 뽑아서 옥 국자를 두드려 깨어버리고 말하기를, “그래, 더벅머리 어린애하고는 모의를 할 수가 없구나. 장군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라.”라고 했다. 패공이 군진에 이르러 선 채로 조무상을 죽였다. 며칠이 지나서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함양을 도륙하고 항복한 왕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궁궐을 불태우니 불길이 석 달 동안 끊이지 않았다. 진시황의 무덤을 파고 보배와 재물과 부녀자를 거두어 동쪽으로 가니 진나라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한생이 항우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관중은 산이 험하고 황하를 띠고 있어 사방이 막힌 땅이요 비옥하고 넉넉하니 가히 도읍하여 패자가 될 만합니다.” 하니 항우가 진나라의 파괴된 나머지를 보고 또 동쪽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여 말하기를, “부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수놓은 옷을 입고 밤길 가는 것과 같을 뿐이다.”라고 하니, 한생이 물러나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은 목욕한 원숭이가 갓을 쓴 것(미개하다) 같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했다. 항우가 그 말을 듣고 한생을 삶아 죽였다.
 
羽가 使人으로 致命懷王하니 王이 曰 如約하라 羽가 怒曰 懷王은 吾家所立耳라 非有功伐하니 何以得專主約이리요 하고 乃陽尊爲義帝하여 徙江南都郴하고 分天下하여 王諸將할새 羽가 自立爲西楚覇王하고 乃曰 巴蜀도 亦關中地라하여 立沛公爲漢王하여 王巴蜀漢中하고 而三分關中하여 王秦降將三人으로 以距塞漢路하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명령을 회왕에게 보내니 왕이 말하기를, “약속과 같이 하라.” 하였다. 항우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회왕은 우리 집에서 세운 바이라. 정벌한 공로가 있지 않으니 어찌 약속을 오로지 주관하겠는가?” 하고, 이에 거짓 높여서 의제라 하고 강남에 옮겨서 침 고을에 도읍하게 하고, 천하를 나누어서 여러 장수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항우 자신은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었다. 이에 말하기를, “파촉도 또한 관중 땅이라.” 하여 패공(유방)을 세워 한왕으로 삼아 파촉과 한중에 왕이 되게 하고, 관중을 셋으로 나누어 진나라에서 항복한 장수 세 사람을 왕으로 삼아 한나라가 (중원으로) 나갈 길을 떨어져서 막게 하였다.
 
漢王이 怒하여 欲攻羽한데 蕭何가 諫曰 願大王은 王漢中하고 養其民以致賢人하고 收用巴蜀하여 還定三秦이면 天下를 可圖也라 하니 王이 乃就國하여 以何로 爲丞相하다
한왕(유방)이 성을 내어 항우를 공격하려고 하니 소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바라건대 대왕은 한중에 왕이 되어 그 백성을 기르고 현인을 이르게 하여 파촉을 수용하여 돌아와 삼진을 평정하면 천하를 가히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한왕이 이에 그 나라(파촉)에 가서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
 
○漢元年에 五星이 聚東井하다 初에 淮陰人 韓信이 家貧하여 釣城下이러니 有漂母가 見信飢하고 飯信하니 信이 曰 吾必厚報母하리라 母가 怒曰 大丈夫가 不能自食일새 吾愛王孫而進食하니 豈望報乎아 하더라
한나라 원년에 오성(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한나라 왕이 일어날 징조로) 동쪽 정 방향(진나라 옹주 지역)에 모였다. 처음에 회음 사람 한신이 집이 가난하여 성 밖에서 낚시질하더니 어떤 빨래하는 여인이 한신의 배고픈 모양을 보고 한신에게 밥을 주니 한신이 말하기를, “내가 반드시 후하게 어미에게 보답하겠습니다.” 하니, 어미(빨래하는 여인)가 성내어 말하기를, “대장부가 스스로 벌어먹질 못하니 내가 귀한 집 자손(한신)을 애처롭게 생각하여 밥을 준 것이니 어찌 갚기를 바라리요?”라고 했다.
 
淮陰 屠中 少年이 有侮信者하여 因衆辱之 曰 若이 雖長大나 好帶劒하니 中情은 怯耳라 能死거든 刺我하고 不能이거든 出我胯下하라 信이 熟視之하고 俛出胯下蒲伏하니 一市人이 皆笑信怯이더라 項梁이 渡淮에 信이 從之하고 又數以策으로 干項羽하되 不用이라 亡歸漢에 爲治粟都尉하여 數與蕭何로 語에 何가 奇之더라
회음의 푸줏간 거리에 소년들이 한신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어 무리로 말미암아 그를 욕보이며 말하기를, “네가 비록 키가 크고 칼을 차고 다니기를 좋아하나 마음속은 겁쟁이라. 능히 죽을 수 있으면 나를 찌르고 그렇지 않으면 내 가랑이 사이를 끼어 나가라.” 하니 한신이 익히 보다가 허리를 구부려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가니 한 저자거리 사람들이 모두 한신이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항량이 회수를 건널 적에 한신이 그를 따르고 또 여러 번 계책으로 항우에게 쓰이기를 구했으나 쓰지 않았다. (항우에게서) 도망하여 한나라로 돌아가니 치속도위로 삼았다. 자주 소하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니 소하가 그를 기이하게 생각했다.
 
漢王이 至南鄭하니 將士가 皆謳歌思歸하여 多道亡하고 信이 度何의 已數言王하되 不用하고 卽亡去하니 何가 自追之러니 人曰 丞相何가 亡이라 하니 王이 怒하여 如失左右手더니 何가 來謁하니 王이 罵曰 若이 亡은 何也오 曰追韓信이니이다 王이 曰 諸將亡을 以十數로되 公無所追더니 追信은 詐也라 한데 何가 曰 諸將은 易得耳거니와 信은 國士라 無雙하니 王이 必欲長王漢中인댄 無所事信이거니와 必欲爭天下인댄 非信이면 無可與計事者라 하니 王이 曰吾亦欲東耳니 安能鬱鬱久居此乎아
한왕이 남정에 이르니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노래를 불러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여 길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한신이 소하가 이미 자주 한왕에게 말했으나 쓰지 않음을 헤아리고 곧 도망해 가려고 하니 소하가 스스로 그를 잡으러 쫓아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승상 소하가 도망갔다.” 하니 한왕이 성을 내어 좌우의 손을 잃은 것 같았다. 소하가 돌아와 뵈니 한왕이 욕을 해 말하기를, “네가 도망함은 어찌된 일이냐?” 하니, 소하가 말하길, “한신을 잡으러 쫓아갔습니다.” 했다. 한왕이 말하길, “여러 장수들이 도망간 것이 십 수 명이었지만 그대가 쫓아간 바가 없더니 한신을 쫓아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니, 소하가 말하기를, “여러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을 뿐이지만 한신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장수라 그 비슷한 쌍이 없으므로 임금께서 반드시 길이 한중에서 왕 노릇을 하시려면 한신을 쓸 일이 없지만,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한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더불어 일을 계획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한왕이 말하기를, “나 또한 동쪽으로 가고자 할 따름이니 어찌 능히 여기에서 답답하게 오래 있겠는가?” 했다.
 
何가 曰 計必東인댄 能用信이면 信이 卽留오 不然이면 信이 終亡耳리이다 王이 曰 吾가 爲公하여 以爲將하리라 何가 曰不留也일니이다 王이 曰 以爲大將하리라 何가 曰 幸甚이나 王이 素慢無禮하여 拜大將을 如呼小兒하시니 此는 信의 所以去이니이다 乃設壇具禮하니 諸將이 皆喜하여 人人이 自以爲得大將이러니 至拜하여는 乃韓信也라 一軍이 皆驚이더라 王이 遂用信計하여 部署諸將하고 留蕭何收巴蜀租하여 給軍糧食하고 引兵從故道出하여 襲雍王章邯하니 邯은 敗走死하고 塞王司馬欣과 翟王董翳는 皆降하다
소하가 말하기를, “반드시 동쪽으로 나갈 계획으로 능히 한신을 쓰면 한신이 곧 머무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한신이 끝내 도망칠 것입니다.” 하니, 한왕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 때문에 그를 장수로 삼으리라.” 했다. 소하가 말하기를, “(그러면) 그는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한왕이 말하기를, “대장을 삼으리라.”고 했다. 소하가 대답하기를, “매우 다행입니다마는 왕께서 평소에 거만하고 무례하여 대장을 벼슬주어 애와 같이 부르니 이렇게 하면 한신이 달아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단을 쌓고 예의를 갖추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여 사람마다 자기가 대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더니 벼슬을 내리기에 이르러서는 이에 한신이라 한 군대가 모두 놀랐더라. 한왕이 마침내 한신의 계책을 써서 여러 장수들의 부서를 정하고 소하는 머물러서 파촉의 세금을 거두게 하여 군대의 양식을 대게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옛 잔도를 (수리하여) 나가서 옹왕 장한을 습격하니 장한은 패주하다가 죽고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흔은 모두 항복했다.
 
○漢二年에 項籍이 弑義帝於江中하다 初에 陽武人 陳平이 家貧好讀書러니 里中社에 平이 爲宰하여 分肉甚均하니 父老曰 善하다 陳孺子之爲宰로다 平이 曰 嗟乎 使平으로 得宰天下라도 亦如此肉矣라 하더라 初事魏王咎러니 不用이라 去事項羽라가 得罪하고 亡하여 因魏無知하여 求見漢王하니 拜爲都尉參乘하고 典護軍하니
한나라 2년에 항적(항우)이 강중에서 죽였다. 처음에 양무인 진평이 집이 가난하지만 책읽기를 좋아하더니 마을 제사에 진평이 책임을 맡아 (제사지낸) 고기를 아주 균등하게 나누니 어른들이 말하기를, “잘한다. 진 청년이 유사(有司)노릇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진평이 말하기를, “아. 진평을 시켜서 천하를 맡아서 다스리게 하여도 또한 이 고기와 같이 할 것인데.”라고 했다. 처음에 위왕 구를 섬겼는데 그를 쓰지 않았다. 그를 버리고 항우를 섬겼는데 죄를 지어 도망했다. 위무지로 말미암아 한왕에게 뵙기를 청하여 도위 참승의 벼슬을 받았고 군대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았다.
 
周勃이 言於王曰 平이 雖美如冠玉이나 其中은 未必有也라 臣은 聞平이 居家에 盜其嫂하고 事魏不容하고 亡歸楚라가 又不容하고 亡歸漢이거늘 今大王이 令護軍하시니 受諸將金하니 願王은 察之하소서 王이 讓魏無知한데 無知曰 臣所言者는 能也요 大王所問者는 行也라 今有尾生孝己之行이라도 而無益成敗之數하니 大王이 何暇用之乎잇가 王이 拜平護軍中尉하여 盡護諸將하니 諸將이 乃不敢復言이더라
주발이 한왕에게 말하기를, “진평이 비록 관옥 같이 아름다우나 그 속은 반드시 그런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 것이라. 신은 듣기로 진평이 집에 있을 때 그 형수를 도둑질하고 위왕을 섬겼으나 용납되지 않았으며 도망하여 초나라로 갔다가 또 용납되지 않아서 도망하여 한나라로 왔거늘 지금 대왕께서 호군을 시키시니 여러 장수들의 돈을 받았으니 원컨대 왕께서는 그를 살피소소.” 하니, 한왕이 위무지를 꾸짖으니 위무지가 말하기를, “신이 말하는 것은 능함이요 대왕께서 물으시는 바는 행실입니다. 지금 (신의가 깊은) 미생이나 (효행으로 죽은) 효기의 행실이라도 (전쟁에) 이기고 지는 계략에는 무익한 것이니 대왕께서는 어느 여가에 그것(신의나 효행)을 쓰겠습니까? 한왕이 진평에게 호군 중위의 벼슬을 주어 여러 장수들을 다 감독하니 여러 장수들이 이에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더라.
 
漢王이 至洛陽하니 新城의 三老인 董公이 遮說曰 順德者는 昌하고 逆德者는 亡하며 兵出無名이면 事故不成하나니 明其爲賊이라야 敵乃可服이라 項羽가 無道하여 放弑其主하니 天下之賊也라 夫仁不以勇하고 義不以力하나니 大王이 宜率三軍之衆하여 爲之素服하고 以告諸侯而伐之하라 於是에 王이 爲義帝發喪하고 告諸侯曰 天下가 共立義帝더니 今項羽가 放弑之하니 寡人이 悉發關中兵하고 收三河之士하여 南浮江漢而下하여 願從諸侯王하여 擊楚之弑義帝者라 하더라
한왕이 낙양에 이르니 신성의 삼로(향리의 교화를 맡은 어른)인 동공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덕을 따르는 자는 창성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며 군대를 명분 없이 출진시키면 일이 본디 이루어지지 않나니 그 도적됨을 밝혀야 상대를 이에 가히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라 항우가 무도하여 그 주군을 내쫓아서 죽이니 천하의 도적이라 대저 인자함은 용기로써 하지 않고 정의로움은 힘으로 하지 않는 것이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삼군의 무리를 거느리고 소복을 입고 제후들에게 고하고 그를 치십시오.” 하였다. 이에 한왕이 의제를 위하여 발상하고 제후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천하가 함께 의제를 세웠더니 지금 항우가 내쫓아 죽이니 과인이 관중의 병사를 다 출동시키고 삼하(河東, 河南, 河內)의 병사들을 모아서 남쪽으로 장강과 한수에 배를 타고 내려가서, 원컨대 제후 왕을 따라서 초나라의 의제를 죽인 자를 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漢王이 率五諸侯兵三十六萬伐楚할새 入彭城하여 收其寶貨美人하고 置酒高會러니 項羽가 方擊齊다가 聞之하고 自以精兵三萬으로 還擊漢하여 大破漢軍睢水上하니 死者가 二十萬人이라 水爲之不流하고 圍漢王三匝이러니 會에 大風이 從西北起하여 折木發屋하고 揚沙石하여 晝晦하니 王이 乃得與數十騎로 遁할새 審食其從太公呂氏하여 間行이라가 遇楚軍하여 爲楚의 所獲하니 常置軍中爲質이더라 王이 至滎陽할새 諸敗軍이 皆會하고 蕭何가 亦發關中老弱하여 悉詣滎陽하니 漢軍이 復大振이더라
한왕이 다섯 제후의 삼십육만 군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는데, 팽성에 들어가서 그 보화와 미인을 거두고 술잔치를 마련하여 드높이 회합을 하더니 항우가 바야흐로 제나라를 치다가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정예병 삼만으로 돌아와서 한나라를 쳐서 한나라 군사를 수수가에서 크게 깨뜨리니 죽은 자가 이십 만이더라. 물이 이 때문에 흐르지 아니하고 한왕을 세 겹으로 둘러쌌더니 마침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일어나서 나무를 꺾고 집을 부수며 모래와 돌을 날려서 대낮이 캄캄해지니 한왕이 이에 수십 기와 더불어 달아났다. 심이기는 태공(유방의 아버지)과 여씨(유방의 부인)를 따라 샛길로 가다가 초나라 군사를 만나 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초나라 군중에 두고 인질로 삼았다. 한왕이 형양에 이르니 여러 패한 군대가 모두 모이고 소하가 또 관중의 노약자를 동원하여 모두 형양에 이르게 하니 한나라 군이 다시 크게 떨치게 되었다.
 
○蕭何가 守關中하여 立宗廟社稷하고 縣邑事를 便宜施行하고 計關中戶口하여 轉漕調兵을 未嘗乏絶이더라 魏王豹가 叛하니 漢王이 遣韓信擊之할새 豹가 以柏直으로 爲大將하니 王이 曰 是는 口尙乳臭니 安能當韓信이리오 信이 伏兵하고 從夏陽하여 以木罌으로 渡軍襲安邑하여 虜豹하고 信이 旣定魏에 請兵三萬人하여 願以北擧燕趙하고 東擊齊하고 南絶楚糧道하고 西與大王으로 會於滎陽이다 하니 王이 遣張耳與俱하다
소하가 관중을 지켜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고을의 일을 편의대로 시행하며 관중의 호구를 계산하여 물자를 돌리고 배로 실어와 군사와 보급을 조달함을 일찍이 쪼들리거나 끊어지게 않게 하였다. 위왕 표가 배반하니 한왕이 한신을 보내어 치게 했는데, 위왕 표가 백직으로 대장을 삼으니 한왕이 말하기를, “이 자는 입에서 아직 젖 냄새가 난다. 어찌 능히 한신을 당하겠는가.”라고 했다. 한신이 군대를 숨기고 하양으로부터 나무통으로 군대를 건너게 하여 안읍을 습격하여 위왕 표를 사로잡았다. 한신이 이미 위나라를 평정하고 삼만 군사를 청하여 “북쪽으로 연나라와 조나라를 평정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초나라의 식량운반 길을 끊은 후에 서쪽으로 가서 대왕과 더불어 형양에서 만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한왕이 장이를 보내어 함께 가게 하였다.
 
○三年에 韓信張耳가 以兵으로 擊趙할새 聚兵井陘口하니 趙王歇及成安君陳餘가 禦之러니 李左車가 謂餘曰井陘之道는 車不得方軌하고 騎不得成列하여 其勢糧食이 必在後하리니 願得奇兵하여 從間道하여 絶其輜重하고 足下는 深溝高壘하고 勿與戰이면 彼는 前不得鬪하고 退不得還이면 野無所掠하여 不十日에 兩將之頭를 可致麾下이라 하니 餘는 儒者라 自稱義兵은 不用奇計라 하니 信이 間知之하고 大喜乃敢下하여 未至井陘口止하고 夜半에 傳發輕騎二千하여 人人이 持赤幟하고 從間道望趙軍 戒曰 趙見我走이면 必空壁逐我하리니 若이 疾入趙壁하여 拔趙幟하고 立漢赤幟하라 하고
(漢)3년에 한신과 장이가 군대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치니 군사들을 정형산 입구에 모이게 하니 조왕 헐과 성안군 진여가 그것을 막더니 이좌거가 진여에게 말하기를, “정형산의 길은 수레가 궤도를 반듯이 하지 못하고 기병이 열을 이루지 못하니, 그 형세가 양식은 반드시 뒤에 있을 것이니 원컨대 기습할 군사를 얻어 샛길로부터 그 짐수레를 끊으리니, 그대는 참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하여 더불어 싸우지 않으면 저들은 앞으로 나와 싸울 수 없고 물러나서 돌아갈 수도 없으며 들에는 약탈할 것이 없으니 열흘이 못 되어서 두 장수의 목을 가히 대장기 아래에 바칠 수 있을 것이라.” 하니, 진여는 선비라 스스로 이르되 ‘의로운 군사는 기이한 꾀를 쓰지 않는다.’ 하니, 한신이 간첩으로 하여 이를 알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감히 내려가 정형산의 입구에 이르지 못한 곳에 멈추고 밤중에 명령을 전하여 가벼운 기병 2천명을 출동시켜 사람마다 붉은 기를 지니고 샛길로부터 조나라 군사를 바라보고 경계하여 이르기를, “조나라 군사가 우리의 달아남을 보면 반드시 성벽을 비우고 우리를 쫓을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조군의 성벽 안에 들어가서 조나라 기를 뽑고 한나라의 붉은 기를 세우라.” 하고
 
乃使萬人으로 先行背水陣하고 平旦에 建大將旗하고 鼓鼓行出井陘口하니 趙가 開壁擊之라 戰良久에 信耳佯棄旗鼓하고 走水上軍하니 趙果空壁逐之라 水上軍이 皆殊死戰하니 趙軍이 已失信等하고 歸壁이라가 見赤幟하고 大驚하여 遂亂遁走라 漢軍이 夾擊大破之하고 斬餘禽歇하니 諸將이 賀하고 因問曰兵法에 右倍山陵하고 前左水澤이어늘 今背水而勝은 何也오 信이 曰兵法에 不曰陷之死地而後에 生하고 置之亡地而後에 存乎아 諸將이 皆服이러라 信이 募得李左車하여 解縛師事之하고 用其策하여 遣辯士奉書於燕하니 燕이 從風而靡러라 /倍곱배,등질배
이에 만 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먼저 배수진을 치게 하고 아침에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며 행진하여 정형산 입구를 나오니 조나라 군사가 성벽 문을 열고 돌격하는지라 싸우기를 한참 한 뒤에 한신이 거짓 깃발과 북을 버리고 (배수진을 친) 물가의 군으로 달아나니 조나라 군사가 과연 성벽을 비우고 쫓는지라 물가에 진을 친 군사가 다 죽기를 결심하고 싸우니 조나라 군사가 이미 한신 등을 잃어버리고 성벽으로 돌아가다가 붉은 깃발을 보고 크게 놀라 드디어 어지러이 도망하였다. 한나라 군사가 옆에서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진여를 베고 조왕 헐을 사로잡았다. 여러 장수들이 하례하고 인하여 묻기를, “병법에 오른쪽에는 산언덕을 등지고 앞과 왼쪽에는 물과 습지가 있거늘 이제 물을 등지고 이긴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하니, 한신이 말하기를, “병법에 ‘죽을 처지에 빠진 뒤에야 살 수 있고, 망할 처지에 이른 후에야 생존한다.’고 이르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여러 장수들이 다 승복하였다. 한신이 이좌거를 찾아오게 하여 묶은 것을 풀고 스승으로 섬기며 그의 계책을 써서 변사를 보내어 (회유하는) 글을 연나라에 바치니 연나라가 바람을 따라 쓰러지듯 항복했다.
 

○隨何가 說九江王黥布하여 畔楚歸漢하니 旣至에 漢王이 方踞床洗足하고 召布入見하니 布가 悔怒하여 欲自殺이러니 及出就舍에 帳御飮食從官이 皆如漢王居하니 又大喜過望이더라 酈食其가 說漢王하여 立六國後하니 王이 曰促刻印이더니 張良이 來謁할새 王이 方食이라가 具告良하니 良이 曰請借前箸하소서 爲大王籌之하리이다 하고 遂發八難하니 其一은 曰天下游士가 離親戚棄墳墓하고 從大王游者가 徒欲望尺寸之地더니 今復立六國後면 游士가 各歸事其主하리니 大王이 誰與取天下乎며 且楚惟無强이거늘 六國이 復撓而從之면 大王이 焉得而臣之乎잇가 誠用客謀면 大事가 去矣리이다 王이 輟食吐哺하고 罵曰 竪儒가 幾敗乃公事라 하고 令趣(촉)銷印하다
수하가 구강왕 경포를 설득하여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귀부하게 하여 이미 이르니 한왕이 바야흐로 평상에 걸터앉아 발을 씻으면서 경포를 불러서 들어오게 하여 만나보니 경포가 (항복한 것을) 후회하고 성을 내어 자살하려고 하더니, 나가서 막사에 이르러 군막과 말과 음식과 따르는 벼슬아치가 다 한왕의 거처와 같으니 그제야 또 바라던 바에 지남을 크게 기뻐했다. 여이기가 한왕을 설득하여 육국의 후계자를 세우게 하니, 한왕이 말하길, “빨리 도장을 새기라.”고 하더니, 장량이 와서 뵈니 한왕이 바야흐로 밥을 먹다가 갖추어 장량에게 고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청컨대 앞에 놓인 젓가락을 빌리겠습니다. 대왕을 위하여 산가지로 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여덟 가지 어려움을 말하니, 그 중 하나는 “천하의 선비가 친척을 이별하고 조상분묘를 버리고 대왕을 좇아 고락을 같이하는 것은 오로지 작은 땅을 바라고 하는 것이니 이제 다시 육국의 후계자를 세우면 따르는 선비들이 각각 돌아가서 그 주군을 섬기리니 대왕이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취하며, 또 초나라가 오직 막강하거늘 육국이 다시 어지러워져서 그를 따른다면 대왕이 어떻게 신하로 삼겠습니까? 진실로 손님(수하)의 꾀를 쓴다면 (천하를 얻으려는) 큰일은 가버릴 것입니다.”하니, 한왕이 밥 먹기를 그치고 먹던 것을 토하며 욕하여 말하기를, “유자(선비)녀석이 거의 나의 일을 실패하게 할 뻔 했다.”라며 빨리 도장을 녹여버리라고 명령했다.
 
○楚가 圍漢王於滎陽하니 王이 謂陳平曰 天下가 紛紛하니 何時定乎아 平이 曰項王의 骨骾之臣은 亞父輩數人耳라 行間以疑其心이면 破楚가 必矣라 하니 王이 與平黃金四萬斤하고 不問其出入하니 平이 多縱反間이러니 羽가 大疑라 亞父가 請骸骨歸라가 疽發背死하다
초나라(군사)가 형양에서 한나라 왕을 포위하니 한왕이 진평에게 말하기를, “천하가 어지러우니 어느 때에 평정하리오.” 하니, 진평이 아뢰기를, “항왕(항우)의 골경지신(가시가 목에 걸리듯 뼈있는 말을 하는 신하)은 아부의 무리 몇 사람뿐이라. 틈을 벌이는 꾀를 행하여 그 마음을 의심케 하면 초나라를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하니, 한왕이 진평에게 황금 4만근을 주고 그가 출입하는 것을 묻지 말라고 하니 진평이 반간계를 많이 풀어 놓았더니 항우가 크게 의심하더라. 아부가 해골을 보존하기를 청하여 돌아가다가 등에 종기가 터져서 죽으니라.
 
楚가 圍漢王益急하니 將軍紀信이 曰事가 急矣라 請誑楚이라 하고 乃乘漢王車하고 出東門曰 食盡하여 漢王이 出降이라 하니 楚人이 皆之城東觀이라 王이 乃得出西門去하고 項羽가 燒殺紀信하다 漢王이 軍成皐러니 羽가 圍之하니 王이 跳去北渡河하여 晨入趙壁하여 奪韓信軍하고 令信으로 收趙兵擊齊하다
초나라가 한왕을 포위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장군 기신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므로 초나라(군사)를 속이리라.” 하고 이에 한왕의 전차를 타고 동문으로 나가서 말하기를, “군량이 다하여 한왕이 나와서 항복한다.”고 하니, 초나라 사람들이 모두 성 동쪽에 가서 보는지라 한왕이 이에 서문으로 나가서 도망하니 항우가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한왕이 성고에 군사를 주둔시켰더니 항우가 포위하니 한왕이 뛰어나가 달아나서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새벽에 조나라 성벽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주둔한) 한신의 군대를 빼앗고 한신으로 하여금 조나라 군대를 거두어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酈食其說漢王하여 收滎陽據敖倉粟하고 塞成皐之險하니 王이 從之하다 酈食其爲漢王하여 說齊王下之러니 蒯徹이 說韓信曰將軍이 擊齊而漢이 獨發間使下之하니 寧有詔止將軍乎아 酈生은 伏軾掉三寸舌하여 下七十餘城하니 將軍이 爲將數歲에 反不如一豎儒之功乎아 하더라 四年에 信이 襲破齊하니 齊王이 烹食其而走하다
역이기가 한왕을 설득하여 형양을 수복하여 오창의 곡식에 의지하고 성고의 험지에 성을 쌓자고 하니 한왕이 그 말을 좇았다. 여이기가 한왕을 위하여 제왕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더니, 괴철이 한신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장군이 제나라를 공격하였는데 한나라가 따로 그 사이 사신을 보내어 항복시키려 하니 어찌 장군의 공격을 그치게 하는 명령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생(여이기)은 수레의 가로 지름대에 엎드려 (사신이 되어) 세치의 혀를 놀려서 70여성을 항복시키니 장군이 장수가 된 지 여러 해 동안에 (세운 공적이) 도리어 한 더벅머리 유생의 공로보다 못하겠습니까?”라고 했다. (한왕) 4년에 한신이 제나라를 엄습하여 깨뜨리니 제왕이 여이기를 삶아죽이고 달아났다.
 
漢이 與楚로 皆軍廣武러니 羽가 爲高俎하여 置太公其上하고 告漢王曰不急下이면 吾烹太公하리라 王이 曰吾與若으로 俱北面事懷王할새 約爲兄弟하니 吾翁이 卽若翁이니 必欲烹而翁인댄 幸分我一杯羹하라 羽가 願與王으로 挑戰하니 王이 曰吾寧鬪智언정 不鬪力이라 하고 因數羽十罪하니 羽가 大怒하여 伏弩射王中胸하다
한나라가 초나라와 더불어 다 광무(형양에 쌓은 성)에 주둔하였더니 항우가 높은 도마를 만들어 그 위에 태공(유방의 아버지)을 놓고 한왕에게 알려 말하기를,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태공을 삶을 것이라.”하니, 한왕이 말하기를, “나와 그대는 함께 북쪽으로 향하여 회왕을 섬길 때에 형제로 맹약하였으니 나의 아버지가 곧 그대의 아버지이니 반드시 아버지를 삶고자 한다면 다행이 나에 한 그릇 국물을 나누어 달라.” 하고, 인하여 항우의 열 가지 죄를 헤아리니 항우가 크게 성을 내어 쇠뇌를 매복시켜 한왕에게 쏘아서 가슴을 맞혔다.
 
楚가 使龍且로 救齊하니 龍且가 曰韓信은 易與耳라 寄食於漂母하니 無資身之策하고 受辱於胯下하니 無兼人之勇이라 하고 進與信으로 夾濰水而陣이러라 信이 夜使人으로 囊沙壅水上流하고 旦渡擊且라가 佯敗還走하니 且가 追之라 信이 使決水하니 且軍이 太半不得渡이라 急擊殺且하고 虜齊王田廣하여 遂定齊地하고 信이 使人으로 言之漢王하여 請爲假王以鎭齊하니 王이 大怒하여 罵之러니 張良陳平이 躡王足하고 附耳語하니 王이 悟하고 復罵曰大丈夫가 定諸侯에 卽爲眞王耳니 何以假爲리오 하고 遣印立信爲齊王하다
초나라(왕)가 용저를 시켜 제나라를 구하게 하니 용저가 말하기를, “한신은 쉬울 따름이라. 빨래하는 여인에게 밥을 얻어먹었으니 제 몸을 부지할 방책이 없고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는 모욕을 당했으니 뛰어난 용기도 없다.”하고 나아가 한신과 더불어 유수를 끼고 진을 쳤더니 한신이 밤에 사람으로 하여금 모래를 주머니에 넣어 상류의 물을 막아 아침에 건널 때에 용저를 치다가 거짓 패하여 돌아서 달아나니 용저가 추격하였다. 한신이 (막았던) 물을 터놓게 하니 용저의 군사가 태반이 건너지 못하였는데 급히 공격하여 용저를 죽이고 제왕 전광을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제나라 땅을 평정하였다. 한신이 사람을 시켜 한왕에게 말하되 거짓 왕을 삼아 제나라를 진압하기를 청하니 한왕이 크게 성내어 욕을 하였다. 장량과 진평이 한왕의 발을 밟으며 귀엣말을 하니 한왕이 깨닫고 다시 욕하여 말하기를, “대장부가 제후를 평정함에 곧 진짜 왕이 될 뿐이니 어찌 거짓 왕이 되리오.” 하고 도장을 보내어 한신을 세워 제왕으로 삼았다.
 
項羽가 聞龍且死하고 大懼하여 使武涉으로 說信하여 欲與連和하고 三分天下하니 信이 曰 漢王은 授我上將軍印하고 解衣衣我하고 推食食我하고 言聽計用하니 我倍之이면 不祥이라 雖死라도 不易이라 하니 蒯徹이 亦說信한데 信이 不聽이더라 漢이 立黥布爲淮南王하다
항우가 용저의 죽음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무섭을 사신으로 보내어 한신을 설득하되 더불어 화합하여 천하를 셋으로 나누자고 하니 한신이 말하기를, “한왕은 나에게 상장군 도장을 주었고 옷을 벗어 나에게 입혔으며 음식을 밀어서 나를 먹였고 내말을 들어주고 계책을 썼으니 내가 그를 배반하면 좋지 않다. 비록 죽더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라 하니 괴철이 또한 한신을 설득했지만 한신이 듣지 않았다. 한나라(왕)가 경포응 세워 회남왕으로 삼았다.
 
項王이 少助食盡하고 韓信이 又進兵擊之하니 羽가 乃與漢으로 約하되 中分天下하여 鴻溝以西로 爲漢하고 以東은 爲楚하고 歸太公呂后하고 解而東歸하니 漢王이 亦欲西歸러니 張良陳平이 曰漢은 有天下太半하고 楚는 兵饑疲하니 今釋不擊이면 此는 養虎自遺患也라 하니 王이 從之하다
항왕(項羽)이 구원병이 적고 식량이 다하였는데 한신이 또 군사를 내어 공격하니 항우가 이에 한나라와 더불어 약속하되 천하를 가운데로 나누어 홍구의 서쪽은 한나라로 하고 (홍구의) 동쪽은 초나라로 하기로 하고 태공과 여후를 돌려보내고 (군대를) 풀어서 돌아가려고 하니 한왕도 또한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더니 장량과 진평이 말하기를, “한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초나라는 군사들이 굶주리고 지쳤으니 지금 (무장을)풀고 공격하지 않으면 이는 호랑이를 길러서 스스로 근심을 남기는 것입니다.”하니 한왕이 그들의 계책을 좇았다.

○五年에 王이 追羽至固陵할새 韓信 彭越이 期不至어늘 張良이 勸王以楚地梁地로 許하니 兩人이 皆引兵來하고 黥布亦會라 羽가 至垓下하여 兵少食盡하고 信等이 乘之하니 羽가 敗入壁이라 圍之數重하니 羽가 夜聞漢軍이 四面皆楚歌하고 大驚曰 漢이 皆已得楚乎아 何楚人多也오 起飮帳中하고 命虞美人起舞하고 悲歌慷慨하고 泣數行下하니 其歌에 曰 力拔山兮여 氣蓋世로다 時不利兮여 騅不逝로다 騅不逝兮여 可奈何오 虞兮虞兮여 奈若何오 하니 騅者는 羽의 平日所乘駿馬也라 左右가 皆泣하고 莫敢仰視러라
5년에 한왕이 항우를 추격하여 고릉에 이르렀는데, 한신과 팽월이 기약하고 이르지 아니하거늘 장량이 한왕을 권하여 초나라 땅과 양나라 땅을 (한신과 팽월에게 주기로) 허락하니 두 사람이 모두 군사를 이끌고 오고 경포도 또한 모인지라. 항우가 해하에 이르러서 군사가 적고 식량이 다되어서 한신 등이 이런 형편을 타고 (공격하니) 항우가 패하여 성벽에 들어갔다. (한나라 군사가) 둘러싸기를 여러 겹으로 하니 항우가 밤에 한나라 군사들이 사면에서 모두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얻었느냐? 어찌된 초나라 사람이 이리 많은가?” 하고, 일어나 장막 안에서 술을 마시고 우미인을 명하여 일어나 춤추게 하고 슬픈 노래를 강개하게 부르고 눈물을 몇 줄 흘리니, 그 노래에 이르되,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상은 온 세상을 덮었도다. 때가 이롭지 못함이여,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음이여, 가히 어찌 하겠는가.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하리오.” 하니, 오추마는 항우가 평소에 타던 준마라. 좌우에 따르는 사람이 다 울고 감히 우러러 보지 못했다.
 
羽가 乃夜從八百餘騎하여 潰圍南出하여 渡淮라가 迷失道하여 陷大澤中하니 漢追가 及之하고 至東城하니 乃有二十八騎라 羽가 謂其騎曰 吾가 起兵八歲에 七十餘戰이로되 未嘗敗北더니 今에 卒困如此하니 天亡我오 非戰之罪라 今日에 固決死하여 願爲諸君決戰하여 必潰圍斬將하여 令諸君으로 知之하리라 皆如其言하고 於是에 欲東渡烏江이러니 亭長이 艤船待曰 江東이 雖小나 亦足以王하니 願急渡하소서 하다
항우가 이에 밤에 8백여 기를 따라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탈출하여 회수를 건너다가 헤매어 길을 잃어서 큰 늪지 가운데 빠지니 한나라 추격병이 이르게 되었다. 동성에 이르니 28기가 남아있었다. 항우가 그 기병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8년에 70여 번 싸웠으되 아직 패배한 적이 없더니 오늘에 마침내 이렇게 곤란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요 싸움을 잘못한 허물은 아니다. 오늘 오로지 죽기로 결단하여 원컨대 그대들을 위하여 결전할 것이니 반드시 포위를 무너뜨리고 장수를 베어 그대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리라.” 하였다. 모두 그 말과 같이 하고, 이에 동쪽으로 오강을 건너가려 하더니 정장이 배를 대고 기다리다가 말하기를, “강동이 비록 작지만 또한 족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으니 원컨대 급히 건너소서.”라고 했다.
 
羽가 曰 籍이 與江東子弟八千人으로 渡江而西이러니 今無一人還하니 縱江東父老가 憐而王我나 我가 何面目으로 復見이리오 獨不愧於心乎아 하고 乃刎而死하니 楚地悉定하되 獨魯不下라 欲屠之하여 至城下러니 猶聞絃誦之聲하고 爲其守禮義之國이 爲主死節이라 하여 持羽頭示之하니 乃降이라 王이 還馳入齊王信壁하여 奪其軍하고 立信爲楚王하고 彭越爲梁王하고 漢王이 卽皇帝位하다 /항우 이름은 적, 자는 우.
항우가 말하기를, “내가 강동의 자제 8천명과 더불어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갔다가 이제 한 사람도 없이 돌아오니 비록 강동의 어버이들이 불쌍히 여겨서 나를 왕으로 삼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다시 그들을 보겠는가?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아니하리오.” 하고, 이에 목을 찔러 죽으니 초나라 땅이 다 평정되었지만 홀로 노나라가 항복하지 아니하는지라. 한왕이 무찌르고자 하여 성 아래에 이르렀더니 오히려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듣고 그 예의를 지키는 나라가 임금을 위하여 절개에 죽는다고 하여 항우의 머리를 가져가서 보이니 이에 항복하는지라. 한왕이 돌아와서 말을 달려 제나라 왕 한신의 성벽에 들어가서 그 군사를 빼앗고, 한신을 세워 초나라 왕을 삼고, 팽월을 양나라 왕으로 삼고 한왕은 황제의 자리에 나아갔다.
 
置酒洛陽南宮할새 上이 曰徹侯諸將이 皆言吾所以得天下者는 何이며 項氏所以失天下者는 何인가 高起 王陵이 對曰 陛下는 使人攻城略地에 因而與之하여 與天下同其利하고 項羽는 不然하여 有功者를 害之하고 賢者를 疑之하며 戰勝而不予人功하고 得地而不與人利니이다 上이 曰 公이 知其一이요 未知其二로다 夫運籌帷幄之中하여 決勝千里之外는 吾不如子房이오 鎭國家 撫百姓하며 給餽餉 不絶粮道는 吾不如蕭何하고 連百萬之衆하여 戰必勝 攻必取는 吾不如韓信하니 此三者는 皆人傑이라 吾能用之하니 此는 吾所以取天下요 項羽는 有一范增而不能用하니 此는 其所以爲我擒也라 하니 羣臣이 悅服이더라
낙양 남궁에서 술잔치를 열어 황제가 말하기를, “여러 제후와 장군은 모두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이며,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이 무엇인지를 말하라.” 하니, 고기와 왕릉이 대답하기를, “폐하는 사람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으면 그로 인해 나눠주고 천하와 더불어 그 이익을 함께 하였지만, 항우는 그렇지 아니하여 공이 있는 자를 해치고 어진 자를 의심하며 싸움에 이겨도 그 사람에게 공을 주지 아니하고 땅을 얻어도 그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그 하나만 알고 그 둘은 알지 못하였도다. 대저 장막 속에서 산가지를 움직여서 천리 밖에 승리를 결정하기는 내가 자방(장량)보다 못하고, 국가를 진압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보급하여 보급로를 끊지 아니하기는 내가 소하보다 못하고, 백만의 군졸을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기는 내가 한신보다 못하니, 이 세 사람은 다 인걸이라. 내가 능히 그들을 쓰니 이것은 내가 천하를 취한 까닭이요, 항우는 한 사람의 범증이 있으나 능히 쓰지 못하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잡힌 까닭이라.” 하니, 뭇 신하들이 기뻐하며 승복하였다.
 
故齊王田橫이 與其徒五百人으로 入海島하니 上이 召之曰 橫아 來하라 大者면 王이요 小者면 侯요 不來면 且擧兵誅하리라 橫이 與二客으로 乘傳至洛陽尸鄕하여 自剄이어늘 以王禮로 葬之러니 二客이 自剄從之하고 五百人의 在島中者가 聞之하고 皆自殺이더라
옛 제나라 왕 전횡이 그 무리 5백 명과 더불어 바다 속 섬으로 들어가니 황제가 그를 불러 말하기를, “횡아 오너라. 큰 것이면 왕이요, 작은 것이면 제후이지만, 오지 않으면 또한 군사를 움직여서 죽이리라.” 하니, 전횡이 두 명의 문객과 더불어 전마(傳馬)를 타고 낙양의 시향에 이르러서 스스로 목 베어 죽거늘 왕의 예절로서 장사지냈다. 두 문객이 스스로 목 베어 따라 죽고 섬에 있던 오백 명의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모두 자살하였다.
 
初에 季布가 爲項羽將하여 數窘帝러니 羽가 滅에 帝가 購求布하되 敢匿者는 罪三族하리라 布가 乃髡鉗爲奴하여 自賣於魯朱家하니 朱家가 心知其布也하고 之洛見滕公曰 季布가 何罪오 臣各爲其主耳라 以布之賢으로 漢이 求之急하니 不北走胡면 南走越耳니 此는 棄壯士資敵國也라 하니 滕公이 言於上하여 乃赦布하여 召拜郎中하고 布의 母弟丁公이 亦爲項羽將하여 嘗窘帝彭城西할새 短兵接하니 帝急하여 顧曰兩賢이 豈相厄哉아 하니 丁公이 乃還이더라 至是하여 謁見하니 帝以徇軍中 曰丁公이 爲臣不忠하여 使項王으로 失天下라 하고 遂斬之曰 使後世爲人臣하여 無效丁公也이라 하니라 /購살구
처음에 계포가 항우의 장수가 되어 자주 황제(유방)를 군색하게 하더니, 항우가 멸망함에 황제가 계포를 현상금으로 잡으려 하여, 감히 숨겨주는 자는 삼족을 멸하는 죄를 주리라고 했다. 계포가 이에 머리를 깎고 칼을 쓰고 노비가 되어 스스로 노나라 주가에게 팔리니, 주가가 마음속으로 그가 계포인 줄 알아보고 낙양에 가서 등공(夏侯嬰)을 뵙고 말하기를, “계포가 무슨 죄입니까? 신하는 각각 그 주군을 위함이라. 한나라가 그를 급히 구하니 계포의 어짊으로 북쪽으로 오랑캐에 달아나지 않으면 남쪽으로 월나라에 달아날 것이니 이것은 장사를 버려서 적국을 이롭게 함이라.” 하니, 등공이 황제께 아뢰어 계포를 용서하고 불러서 낭중의 벼슬을 주었다. 계포의 동모제(同母弟) 정공이 또한 항우의 장수가 되어 일찍이 황제(유방)를 팽성 서쪽에서 군색하게 하였는데, 짧은 병장기로 마주치니 황제가 급하여 돌아보고 말하기를, “두 어진 이가 어찌 서로 재난을 주랴.”라고 하니, 정공이 이에 물러갔더니 이에 이르러서 알현하거늘 황제가 군중에 드러내 보이고 말하기를, “정공이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않아서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목을 베어 이르기를,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된 사람으로 하여금 정공을 본받지 않게 하라.”라고 했다.
 
○齊人婁敬이 說上曰洛陽은 天下之中이라 有德이면 易以興하고 無德이면 易以亡하고 秦地는 被山帶河하고 四塞以爲固하니 陛下가 按秦之故이면 此는 搤天下之亢而附其背也라 하니 上이 問張良한대 良이 曰洛陽은 四面受敵하니 非用武之國이요 關中은 左殽函이요 右隴蜀하고 阻三面而守하니 敬의 說이 是也이니이다 上이 卽日에 西都關中하다
제나라 사람 누경이 임금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낙양은 천하의 가운데라 덕이 있으면 흥하기를 쉽게 하고 덕이 없으면 망하기를 쉽게 하며, 진나라 땅은 산을 입고 황하를 띠로 둘렀으며 사면이 막히어서 견고하니 폐하께서 진나라의 연고를 누르면 이는 천하의 목을 조르고 그 등에 붙은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장량에게 물으니, 장량이 말하기를, “낙양은 사면으로 적을 받으니 병법을 쓸 땅이 아니요, 관중은 왼쪽에는 효산과 함곡관이요 오른쪽에는 농산과 촉 지역이라 삼면을 막아서 지키니 루경의 말이 맞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그날에 서쪽으로 관중을 도읍으로 했다.
 
張良이 謝病辟穀하다. 良이 佐上定天下에 封功臣할새 上이 使良으로 自擇齊三萬戶하니 良이 曰 臣이 始與陛下로 遇於留하니 此는 天以臣授陛下라 封留가 足矣라 하니 遂封留侯러니 至是하여 杜門導引하고 不食穀曰家世相韓이러니 韓滅에 爲韓報仇하고 今以三寸舌로 爲帝者師하고 封萬戶侯하니 此는 布衣之極이라 願棄人間事하고 從赤松子遊耳라 하더라
장량이 병으로 사직하고 곡식을 먹지 않았다. 장량이 황제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여 공신을 봉할 때에 임금이 장량으로 하여금 스스로 제나라 삼만 호를 택하게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에 폐하와 유(陳留) 땅에서 만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신으로써 폐하에게 준 것이라. 유에 봉함이 족합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유후를 봉하니 이에 이르러 문을 닫고 도인법(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욕망을 줄이는 도교의 양생법)을 행하여 곡식을 먹지 않고 말하기를, “집안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이더니 한나라가 멸망함에 한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이제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어 만호후에 봉해졌으니 이는 베옷 입은 선비에게 지극한 영광이라 원컨대 인간사를 버리고 신선 적송자를 따라서 놀 것이라.”라고 하였다.
 
六年에 人有上書告楚王韓信이 反하니 諸將이 曰 發兵坑孺子耳라 하거늘 上이 問陳平한데 平이 危之曰 古有巡狩會諸侯하니 陛下가 第出僞遊雲夢하여 會諸侯於陳하고 因禽之하면 一力士之事耳라 하니 上이 從之하여 告諸侯會陳하되 吾將遊雲夢이라 하고 至陳하니 信이 上謁이거늘 命武士縛信載後車하니 信曰 果若人言이로다 狡兎死에 走狗가 烹하고 高鳥가 盡에 良弓이 藏하고 敵國이 破에 謀臣이 亡이라 하더니 今天下가 已定하니 臣固當烹이로다 遂械繫以歸하여 赦爲淮陰侯하다
6년에 어떤 사람이 초왕 한신이 배반했다고 글을 올려 알리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군대를 출동시켜서 애송이를 묻으리라.” 하거늘, 임금이 진평에게 물으니, 진평이 그것이 위험하다고 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순수하여 제후들을 모음이 있으니 폐하께서 다만 나가시어 거짓 운몽에 놀고 제후를 진에 모아서 그로 인해 잡으면 한 사람 역사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아서 제후에게 고하여 “진에 모이되 내가 장차 운몽에 놀리라.”하고 진에 이르니 한신이 임금을 뵈거늘 무사를 명하여 한신을 묶어서 후차에 실으니, 한신이 말하기를, “과연 어떤 사람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달리던 개가 삶아지고, 높이 날던 새가 다하면 좋은 활이 감춰지며, 적국이 깨어지면 모의하던 신하가 없어진다고 하더니 이제 천하가 이미 정해지니 내가 마땅히 삶기겠구나.”라고 했다. 드디어 형틀에 매여 돌아와서 사면을 받아 회음후가 되었다.
 
上이 嘗從容問信하여 諸將의 能將兵多少할새 上이 曰 如我는 能將幾何오 信이 曰 陛下는 不過將十萬이니이다 上이 曰 於君에 何如오 信이 曰 臣은 多多益辦이니이다 上이 笑曰 多多益辦이면 何以爲我禽고 曰 陛下는 不能將兵而能將將하시니 此가 臣所以爲陛下禽이요 且陛下는 所謂天授요 非人力也이라 하더라
임금이 일찍이 조용히 한신에게 여러 장수가 능히 얼마나 많은 병사를 거느릴 수 있는가를 물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나 같은 이는 능히 얼마나 거느릴 수 있는가.” 하니, 한신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십만 명을 거느리는 것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에게는 어떠한고?” 하니, 한신이 말하기를,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잘 거느릴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잘 거느릴 수 있다면 어찌하여 나에게 잡혔는고?” 하니, (한신이) 말하기를, “폐하는 병졸을 잘 거느리지는 못하지만 장수를 잘 거느리시니 이는 제가 폐하에게 잡힌 까닭이요, 또 폐하는 이른바 하늘이 내린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剖符封功臣할새 酇侯蕭何의 食邑이 獨多하니 功臣이 皆曰臣等은 被堅執銳하여 多者는 百餘戰하고 少者는 數十合하되 蕭何는 未嘗有汗馬之勞하고 徒持文墨議論하되 顧反居吾等上은 何也이니잇고 上이 曰諸君이 知獵乎아 逐殺獸者는 狗也요 發縱指示者는 人也라 諸君은 徒能得走獸耳니 功이 狗也요 至如蕭何하여는 功이 人也라 하니 羣臣이 皆莫敢言이더라
신표를 쪼개어 공신을 봉하는데 찬후 소하의 식읍이 홀로 많으니 공신들이 다 말하기를, “우리들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아 많은 자는 백여 싸움을 겪고 적은 자는 수십 합을 겪었는데, 소하는 일찍이 말을 달려 땀을 흘린 수고가 없었고 한갓 글 쓰고 의논을 지켰으되 돌아보니 도리어 우리보다 위에 있는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사냥을 아는가? 짐승을 쫓아서 죽이는 것은 개요 (고삐를) 풀어놓아서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라. 여러분은 한갓 능히 짐승을 쫓았으니 공이 개에 해당하고, 소하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공이 사람에 해당한다.”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다 감히 말하지 못하더라.
 
上이 已封大功臣하고 餘는 爭功不決이더니 上이 從複道上하여 望見諸將이 往往坐沙中하여 相與語하고 上이 問張良한데 良이 曰陛下가 以此屬取天下하시고 今所封은 皆故人親愛오 所誅는 皆平生仇怨이라 此屬이 畏不能盡封하고 又恐見疑平生過失하여 及誅故로 相聚謀反耳니이다
임금이 이미 큰 공을 (이룬 사람을) 봉하고 나머지는 공을 다투어서 결정하지 못하더니 임금이 복도 위에서부터 바라보니 여러 장수들이 이따금 모래 위에 앉아서 서로 더불어 이야기하거늘, 임금이 장량에게 물으니 장량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이 무리를 거느리고 천하를 취하고 지금 봉한 것은 모두 옛 친구와 친애하는 사람이요 죽인 자는 모두 평생의 원수라. 이들 무리가 능히 봉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또 평생 과실을 의심받아서 죽임에 미칠까 두려워하는 고로 서로 모여서 배반하기를 꾀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上이 曰奈何오 良이 曰陛下의 平生所憎을 羣臣所共知가 誰最甚者니잇고 上 曰雍齒라 하니 良이 曰急先封齒하소서 於是에 封齒爲什方侯하고 而急趣丞相御史하여 定功行封하니 羣臣이 皆喜曰 雍齒도 且侯하니 吾屬은 無患矣라 하더라 詔定元功十八人位次할새 賜丞相何의 劒履上殿하고 入朝不趨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할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폐하가 평생 미워하는 바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는 자 중에 누가 가장 심한 자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옹치라.”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급히 먼저 옹치를 제후에 봉하십시오.” 하였다. 이에 옹치를 봉하여 십방후를 삼고 급히 승상과 어사를 불러서 공을 정하여 봉하기를 실행하니 여러 신하들이 다 기뻐하며 말하기를, “옹치도 또한 제후로 봉했으니 우리 무리들은 근심할 것이 없다.” 고 하였다. 황제의 명령을 내려 으뜸 공로자 열여덟 사람의 차례를 정했는데 승상 소하에게 칼을 차고 궁전에 오르게 하고 조회에 들어올 때 달리지 않는 것(특전)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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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太公爲太上皇하다.
한고조의 부친 태공을 높여 태상황으로 하였다.
 
○帝懲秦苛法하야 爲簡易하니 羣臣이 飮酒爭功하고 醉或妄呼하며 拔劍擊柱하니 叔孫通이 說上曰儒者는 難與進取호대 可與守成하니 願徵魯諸生하야 共起朝儀라하니 上이 從之하다
​한고조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괴로워하며 간이하게했다.군신들이 음주하며 공을 다투고,취하여 혹 망령되게 행동하고 칼을 뽑아 기둥을 쳤으니,숙손통이 상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유학자는 진취에는 더불어하기가 어렵지만,지키고 이루어감에 더불어 할수 있습니다.원컨대 노나라의 여러 유생들을 불러서 같이 조정의 의식을 세우십시오"하자 상이 따랐다
 
魯有兩生이 不肯行曰禮樂은 積德而後에 可興이라하니 通이 與所徵及上左右의 與弟子百與人으로 爲綿蕝하야 野外習之하다
노나라에 두 명의 유학자가 있었는데 가려하지 않고 말하기를 "예악은 적덕후에 가히 일으킬수 있습니다."하였다.숙손통이 부른 바의 사람과 및 윗사람, 좌우의 사람과 더불어 제자 백여 명과 함께, 실로 띠를 묶어 표시하고 야외에서 익혔다
 
七年에 長樂宮이 成하니 諸侯와 羣臣이 皆朝賀할새 謁者 致禮하야 引諸侯王以下至吏六百石이 以次奉賀하니 莫不震恐肅敬이라 置法酒하고 御使執法이 擧不如儀者하야 輒引去하고 竟朝罷酒에 無敢誼譁失禮者하니 上이 曰吾乃今日에 知爲皇帝之貴也라하고 拜通爲大常하다
한나라 7년, 장락궁이 이루어지자, 제후군신이 모두 조회하며 축하했다. 알자(謁者/알현을 담당하는 관리)가 예절을 잘 다스렸으며, 제후와 왕이하, 관리로 600석에 이르기까지, 인솔하여 차례대로 받들어 축하하였으니,깜짝놀라며(振恐) 삼가 존경(肅敬)하지 않는이가 없었다.예(禮)를 다하여 법주를 놓았으며,어사가 예법을 집행하고,의식에 맞지않은자는 들어서,곧 이끌어 가게했다.알현이 끝나고 술자리가 파하여도 감히 떠들썩하여(諠譁/훤화) 실례하는자들이 없었다. 한고조가 말하기를 "내가 마침내 금일에야 황제의 존귀함을 알게되었도다" 하고 숙손통을 태상(太常/掌天神人鬼地祇之禮)으로 하였다​
 
匈奴 寇邊이어늘 帝自將擊之할새 聞冒頓單于 居大谷하고 悉兵三十萬하야 北逐之하야 至平城이러니 冒頓이 精兵四十萬餘騎로圍 帝白登七日하니 用陣平 秘計하야 使間厚遣閼氏하니 冒頓이 乃解園去하다. 平이 從帝征伐하야 凡六出奇計에 輒益封邑이러라.
흉노가 변경을 침범하자 한고조가 친히 거느리고 공격하였다.묵돌선우(冒頓單于)가 대곡에 있다는 말을 듣고,총3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내쫒아 평성에 이르렀다. 묵돌의 정예병사 40만의 기병이 한고조를 백등에서 칠일간 포위하였으며 진평이 은밀한 계략을 써서, 간첩으로 하여금 선우의 부인인 연지(閼氏)에게 후하게 보내게하여,묵돌이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진평은 한고조를 따라서 정벌하면서, 무릇 6번이나 기묘한 계략을 내었으며, 번번이 봉읍을 더해주었다 ​
 
九年에 遣劉敬, 使匈奴하야 和親하고 取家人子하야 名을 公主라하야 妻單于하다
한고조 9년에,유경을 보내 흉노로하여금 화친케하였다.민가의 여자를 취해다가 공주라고 이름하고,선우에게 시집보냈다​
 
十年에 代相國陣豨反하니 帝自將擊之러니 淮陰侯韓信의 舍人弟,上變告信이 陰與豨謀라하니 呂后 與蕭何로 謀하야 詐稱豨敗死라하고 給信入賀하야 使武士로 縛信斬之러니 信이 曰吾 悔不用蒯徹之謀하야 乃爲兒女子의 所詐라하니 逐夷信三族하다.
한고조10년,대상국 진희가 모반했다. 한고조가 친히 장수로 치러갔다. 회음후인 한신의 밑에 있는 사인의 동생이 급변(急變)을 상고(上告) 했다. 상고하기를 "한신이 몰래 진희로 더불어서 모의했다"하니 여후가 소하와 더불어서 모의하여, 거짓으로 말하여 '진희가 이미 패하여죽었다'고 하였다. 한신을 속이니, 궁에 들어가서 축하를 하자 무사를 시켜서 한신을 포박하고 참살했다. 한신이 말하기를 "나는 괴철의 도모하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노니, 마침내 아녀자에게 속아 죽게되었도다" 하였다. 결국 한신은 삼족을 죽임당했다
 
十一年에 帝破豨하고 還聞韓信이 言恨不用蒯徹하고 詔捕徹하야 至欲烹之하니 徹이 曰秦失其鹿에 天下 共逐할새 高才疾足者 先得之하니 當是時하야 臣이 獨知韓信하고 非知陛下也라 天下에 欲爲陛下所爲者 甚衆호대 力不能耳니 又可盡烹邪아하니 帝赦之하다
한고조 11년(B.C.196년)에, 한고조는 진희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괴철을 체포하였는데, 잡혀와서 말하기를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자, 천하가 같이 뒤쫒았는데, 재주가 높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었습니다. 당시는 신은 오직 한신만을 알았으며 폐하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천하에서 폐하가 되려고 위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힘이 불능이었을 뿐입니다. 또한 실패한자들을 모두 다 삶아죽일 수는 없는것입니다"하자 한고조가 풀어주었다
 
梁王彭越의 太僕이 告其將扈輒이 勸越反하니 上이 使人掩越 因之하야 反形이 己具에 赦處蜀이러니 呂后 曰此는 自遣患이라하고 遂誅之하니 夷三族하다.
양나라왕 팽월의 태복(太僕/官名)이 고하였다.그 장수 호첩이 권해서 팽월이 모반할것입니다.한고조는 사람을 시켜서 팽월을 엄습하고 가두었다.팽월의 모반한 형태가 이미 갖추어졌다.그러나 용서하여 촉에 살게했다.그러자 여후가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걱정거리를 남기는것입니다'하고 마침내 주살하여 삼족을 멸하였다​
 
遣陸賈하야 立南海尉佗爲南奧王하니 佗 稱臣奉漢約이어늘 賈 歸報하니 拜太中大夫하다. 賈 時前說詩書하니 上이 罵之曰乃公이 馬上得天下하니 安事詩書리오 賈 曰天下 以馬上得之어니와 寧可以馬上治之乎잇가 文武並用은 長久之術也라 使秦으로 幷天下에 行仁義 法先聖이면 陛下 安得有之리잇고 上이 曰試爲我하야 著秦所以失과 吾所以得과 及古成敗하라 賈 著書十二篇하야 每奏에 上이 稱善하고 號曰新語하다
한고조가 육가를 보내서 남해위 조타(趙佗)를 세워서 남월왕(南粤王)이 되게했다. 조타가 칭신하고 한나라를 받들기를 약속했다.육가가 돌아와서 보고하자 태중대불로 벼슬을 주었다. 육가는 때로 앞에서 시경이나 서경을 설명했다. 한고조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임금인 나(乃公/내공:임금이 신하에게 자기를 일컫는 말)는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었는데(馬上得天下), 어찌 시서(詩書)를 받들겠느냐" 하자, 육가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마상에서 천하를 얻었으나,어찌 마상에서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문무를 같이 쓰는것이 천하를 장구히 하는 방법입니다" "가령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인의를 행하고 선성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찌 천하를 얻었겠습니까" 하니 한고조가 말하기를 "시험삼아 나를 위해 책을 써주되, 진나라가 천하를 잃은 까닭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과​ 옛 성패를 쓰도록 하시오"하니 육가가 12편을 저술하여 매번 올릴 때마다 칭찬을 받았으며 책을 신어(新語)라 하였다
 
淮南王黥布 遣帝殺韓信하며 醢彭越하고 以同功一軆之人으로 自疑禍及하야 遂反하니 帝自將擊之하다
회남왕 경포가 한고조가 한신을 죽이고 팽월을 소금에 절여죽임을보고 같은 공으로써 한몸인 사람으로 스스로 화가 미칠것으로 의심하고 마침내 모반하였다. 한고조가 친히 거느리고 쳤다.
 
十二年에 帝破布하고 還過魯할새 以太牢로 祠孔子하고 過沛할새 置酒하고 召宗室故人하야 飮酒酣에 上이 自歌曰大風起兮여 雲飛揚이로다 威加海內兮여 歸故鄕이로다 安得猛士兮여 守四方고 令沛中子弟로 習歌之하고 以沛로 爲湯沐邑하다.
12년에 경포를 파하고 노나라를 지닐때 큰 소로 공자에 제사를 지내고 패를 지날때 술상을 차리고 종실을 초청하여 술에 취해 노래 부르길 "대풍이 일어나 구름이 날린다 내해에 위엄이 더하여 고향으로 돌아 왔다 훌륭한 선비를 얻었어서 나라을 지키리라" 지금의 패의 자제들로 하여금 노래를 익히게 하고 패를 탕목읍로 하였다.
 
初에 戚姬,有寵하야 生趙王如意하니 呂后 見疏하고 太子 仁弱하니 上이 以如意類己로 欲廢太子而立之하니 羣臣이 爭之하대 皆不能得이라 呂后 使人으로 强要張良計劃하니 良이 曰此는 難以口舌爭也오 顧上所不能致者四人이 東園公,綺里季, 夏黃公, 角里先生이니 以上嫚侮士故로 逃匿山中하야 義不爲漢臣하야 上이 高此四人하니 今令太子로 爲書하야 卑詞安車로 固請이면 宜來至하야 以爲客하리니 詩從入朝하야 令上見之則一助也리라
전에 척희를 총애하였는데 척부인이 조나라왕 여의(如意)를 낳았으며, 여후가 소외당하였고,태자 인(仁)은 허약하여,상이 여의로써 자기를 닮았다하여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세우고자 하였다. 군신들이 다투어서 간언하였는데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여후가 사람을 시켜서 장량에게 계책을 세우기를 강요하였더니, 장량이 말하기를,이것은 구설로 간쟁하여서는 어렵습니다하고 돌아보건대 상이 불러서 오게하지 못한 자가 네 사람이니, 동원공(東園公)、기리계(綺里季)、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甪里先生)입니다. 상께서 선비들을 모욕한 일(嫚侮/만모)로, 산중에 도망하여 숨어살며, 의를 지키면서 한나라 신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께서 이 네 사람을 높이 칩니다. 만약 지금 태자로하여금 서신을 보내서 자신을 낮추면서, 안전한 수레로 굳게 청하시면 마땅히 오실 것입니다. 도착하면 손님으로 모시며, 그때를 맞추어 따라서 궁중에 들어가 알현하십시오, 또 폐하로 하여금 만나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일조가 될것입니다"
 
后 從之러니 至時에 上이 擊布還하야 愈欲易太子러니 後置酒하고 太子 侍할새 良이 所招四人者 從하니 年皆八十餘라 鬚眉皓白하고 衣冠이 甚偉하니 上이 怪問之한대 四人이 前對하야 各言姓名하니 上이 大驚曰吾 求公數歲에 公이 避逃我러니 今何自從吾我遊乎아
여후가 사람을 시켜서 태자의 글을 받들고가서 초청을 하자, 네 사람이 도착하였다 한고조가 경포를 치고 돌아와서,더욱 태자를 바꾸려했는데, 후일에 술자리를 마련하고​,태자가 기다렸으며, 장량은 초청한 네 사람을 따라갔는데, 나이가 모두 80이 넘었으며, 수염과 눈썹이 희고 의관은 매우 위대하게 보이니, 상이 괴이하여 물었다. 네 사람이 앞에서 대답하여,각자 성명을 말하자, 상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내가 공들을 수년간 구했는데,공들이 나를 피하여 도망하더니,지 금 어째서 친히 나의 아들을 따라서 놀려하시오"​ 하였다.
 
 
四人이 曰陛下는 輕士善罵하시니 臣等이 義不辱이러니 今聞太子 仁孝하고 恭敬愛士하야 天下 莫不延頸하야 願爲太子死者라 故로 臣等이 來耳니이다 上이 曰煩公하야 幸卒調獲하라 四人이 出에 上이 召戚夫人指示之曰我欲易之러니 被四人者 輔之하야 羽翼이 已成하니 難動矣라하더라
네 사람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선비를 가벼이 하시고 욕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신등은 의를 지키고 욕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제 들으니 태자 인(仁)이 효도하고 공경하며 선비를 사랑한다들었습니다. 천하가 목을 늘여서 태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그러므로 신등이 왔습니다"하자 상이 말하기를 "공들이 번거롭더라도, 바라건대 끝까지(幸卒)훈련시키고 보좌(調護/调教辅佐:훈련시키고 보좌함)해주시오"하였다. 네 사람이 나가자 상이 척부인을 불러, 가리켜보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바꾸려하는데,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돕고 있으니, 날개가 이미 이루어져서 움직이기 어렵소 "하였다
 
蕭何 以長安에 地峽하고 上林中에 多空地棄로 請令民得入田하니 上이 大怒하야 下何廷尉械擊之라가 數日而赦之하다.
소하가 '장안의 땅이 협소하니,상림(上林/궁중의 정원)가운데 많은 빈땅이 버려졌으니,청컨대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가서 농사짓게하여주십시오'하자 상이 대노하였다.소하를 정위에 내려보내서,형틀에 묶게하였다가 수일만에 석방하였다
 

上이 擊布라가 中流矢疾甚하니 呂后 問陛下百歲後에 蕭相國이 死하면 誰可代之리잇고 上이 曰曹參이오 其次는 曰王陵이나 然이나 少戇하니 陣平이 可以助之오 平은 智有餘나 然이나 難獨任하고 周勃은 重厚少文호대 可令爲太尉하니 安劉氏者는 必勃也리니 復問其次한대 上이 曰此後는 亦非乃의 所知也라하리다
상이 경포를 치면서 흐르는 화살에 맞아서 상처가 심하였다.여후가 묻기를 "폐하께서 100년을 다스린 후에 상국인 소하도 죽으면 누가 대신할수있습니까" 하자, 한고조가 말하기를 "조삼이고, 그 다음은 왕릉이며, 그러나 약간 어리석으니,진평이 도와주면 가능하오. 진평의 지혜가 남음이 있으나, 그러나 혼자 맡기는 어렵소,​주발은 중후하지만 문에서는 부족하오. 태위를 하면 가능할것이오. 유씨를 편히 할자는 반드시 주발일 것이오, 다시 묻기를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차후는 또한 알바가 아니오" 하였다
 
上이 崩에 葬長陵하니 爲王者 四年이오 爲帝者 八年에 凡十二年이라 太子 立하니 是爲孝惠皇帝러라
한고조가 붕했으며 장릉에 묻었다. 한왕을 한것이 4년이고 황제가 된 것이 8년이니 무릇 12년이다. 태자 영(盈)을 세웠다. 이가 바로 효혜황제이다​
 
孝惠皇帝
孝惠皇帝의 名은 盈이오 母는 呂太后라 卽位之元年에 太后 鴆殺趙王如意하고 斷戚夫人手足하고 去眼煇耳하고 音瘖藥하야 使居厠中하고 命曰人彘라하고 召帝觀之하니 帝 驚하야 大哭하고 因病歲餘에 不能起러라
호혜황제는 이름이 영(盈)이며 모친은 여태후이다​. 즉위 원년에 여태후는 조왕 여의(如意)를 짐살(鴆殺/짐술를 먹여 사람을 죽임)하고, 척 부인의 수족을 자르고,눈을 파고 귀를 불로 지지고,약을 먹여 벙어리가 되게하였다.그리고 측간 가운데살게하면서 명하기를 인간돼지라고 부르게 했다. 황제를 불러서 보게 하였는데, 황제가 놀라서 크게 울더니, 인하여 병이 나서, 한 해가 지나도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二年에 相國鄼侯蕭何 卒하니 以曹參으로 爲相國하다 初에 參이 聞何卒하고 令舍人으로 趣爲裝호대 吾且入相이라하더니 使者 果召러라 參이 代何에 一遵何約束하니 百姓이 歌之曰蕭何 爲法에 較若畫一이러니 曹參이 代之에 守而不失이로다 載其淸淨하니 民以寧壹이라하더라
호혜황제2년에 소하가 죽었다.제 나라 상(相) 조삼이 사인으로 하여금 여장을 꾸리게하며, 나 또한 조정에 들어가 재상(相)을 할 것이다 하였는데 사자가 과연 조삼을 불러서 소하를 대신하여 상국(相國)이 되었다. 한결같이 소하의 약속을 따르니, 백성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소하가 재상할 때 일률적으로 환하게 하였는데, 조삼이 대신하더니 그것을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으니, 일을 맑고 깨끗하므로,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五年에 相國平陽侯曹參이 卒하다
호혜황제 5년에 조삼이 죽었다.
 
六年에 以王陵으로 爲右丞相하고 陣平으로 爲左丞相하다 留侯張良이 卒하다 以周勃로 爲太尉하다
6년에 왕릉이 우승상,진평이 좌승상이 되었다.장량이 죽었다​.주발이 대위가 되었다
 
 
 
 
 
七年에 帝 崩에 葬安陵하고 帝無子하니 呂后 取他人子하야 以爲太子러니 至是하야 卽位하고 呂后 臨朝稱制핤 元年에 呂后 議立諸呂爲王하니 王陵이 曰高帝 刑白馬盟曰非劉氏而王이너늘 天下 共擊之라하대 平과 勃이 以爲可라하니 陵이 罷相하고 遂王呂氏하다
7년에 황제 붕하니 안릉에 장사를 지냈다. 여후 타인의아들을 취하여 태자로하고 즉위하니 여후 조정에 임하여 명령을 내렸다. 여후가 여씨들에게 왕을 삼고자 하니 왕릉이 말하기를 고조가 백마의 맹약을 할때 유씨이외의 사람이 왕이 되거든 공격하라하니 진평과 주발이 가하다고 하여 왕릉을 재상에서 파하고 여씨를 왕에 올렸다.
 
○四年에 太后 廢少帝하야 幽殺之하고 立恒山王義하야 爲帝하고 更名弘하니 亦取他人子爲惠帝子者也러라
4년에 여후 소제를 폐하고 유폐하고 죽였다. 항산왕 의를 세워 황제로 삼고 이름을 홍이하 바꿨다. 역시 타인의 아들이다.
 
八年에 太后 崩하니 諸呂 欲爲亂할새 時에 呂祿이 將北軍하고 呂産이 將南軍하니 太尉勃이 不能主兵이라 平,勃이 使酈寄로 說祿하야 解印以兵授勃하니 入軍令曰爲呂氏者는 右袒하고 爲劉氏者는 左袒하라하니 軍中이 皆左袒이라 遂召朱虛侯劉章하야 予卒千餘人하야 擊産誅之하고 分部悉捕諸呂하야 無少長히 皆斬之하다
8년에 여후 죽으니 여씨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는데, 여록이 북군을 여록이 남군을 장악하고 있었서 태위 주발이 그 군을 지휘할수 없었다 진평과 주발이 역기를 시켜 왕록을 섷득해 장군인을 회수하여 주발에 주니, 군령을 내려 여씨를 따르는자는 우단, 유씨를 따르는자 좌단하라하니 모두들 좌단 하였다. 주허후 유장을 불러 1000명을 주어 유산을 죽이고 모든 여씨를 체포하니 모두 참하였다.
 
○諸大臣이 迎立代王恒하니 王이 西鄕讓者 三이오 南鄕讓者 再에 遂卽位하야 誅子弘等하고 赦天下하니 是爲太宗孝文皇帝러라.
제 대신이 대왕 환을 맞이하자 왕이 서향하여 3번, 남향하여 2번 거절후 즉위하고 홍 등을 죽이고 천하를 사면하니 태종효문황제이다.
 
 
○孝文皇帝의 名은 恒이오 母는 薄氏니夢에 龍據肴而生帝러니 帝立에 尊之爲皇太后하다
효문황제의 이름은 항이요 모는 박씨인데, 꿈에 용을 옆에끼고 태어나니 황제에 올라 황태후로 하였다.
 
 
元年에 以陳平으로 爲左丞相하고 周勃로 爲右丞相하다
원년에 진평을 좌승상, 주발로 우승상으로하였다.
 
 
時에 有獻千里馬者어늘 帝曰鸞旗는 在前하고 屬車는 在後하야 吉行은 日五十里하고 師行은 日三十里하니 朕이 乘千里馬하고 獨先安之리오 於是에 還其馬와 與道里費而下詔曰朕不受獻也리니 其令四方으로 毋來獻하라하다.
그때 어느사람이 천리마를 바치자, 말하기를 난기로 잘하면 50리, 군대를 데리고 가면 30리 가는데 짐이 혼자 먼저 가리오 말을 돌려주고 명을 내려 이후 사방에 영을 내려 헌상치 못하게 하였다.
 
帝益明習國家事하야 朝而問右丞相勃曰天下一歲決獄이 幾何오 勃이 謝不知어늘 又問一歲錢穀出入幾何하니 勃이 又謝不知하고 惶恐하야 汗出沾背라 上이 問左丞相平한대 平이 曰有主者하니 卽問決獄이 責廷尉하시고 問錢穀언대 責治粟內史하쇼서 上이 曰君所主者는 何事오 平이 謝曰陛下 使待罪宰相하시니 宰相者는 上佐天子하야 理陰陽順四時하야 下逐萬物之宜하고 外鎭撫四夷하며 內親附百姓하야 使卿大夫로 各得其識焉이니이다 帝 稱善하니 勃이 大慙하야 謝病免하다
황제가 국사학습이 더하여 질때, 조회시 우승상 주발에게 묻되 올해 하옥한자가 몇이냐고 묻자, 대답 못하고, 올해 전곡출입을 묻자 알지 못하고 황송하여 땀이등을 덮었다. 상이 좌승상 진평에게 묻자, 진평이 하옥은 정위에 묻고, 전곡은 치속내리에 물어라 하자, 상이 그럼 그대는 무엇을 하느냐? 진평이 재상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음양과 사시에 순해야 하며 아래로는 만물을 편케하고 외적으로 사이를 진무하고 내적으로 백성을 친하게 하고 관리를 시켜 각자의 일을 독려하는 것이라고 하자 황제가 칭찬하였다. 주발이 크게 부끄러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河南守吳公이 治平이 爲天下第一이니 召爲廷尉하다 吳公이 薦洛陽人賈誼하니 年이 二十餘라 一歲中에 超遷爲太中大夫하다
하남태수 오공이 천하제일로 다스려 불러 정위로 삼다. 오공이 낙양인 가의를 추천하니 20세였고 1년중에 태중태부로 출세하다.
 
二年에 丞相曲逆侯陳平이 卒하다 賜天下今年田租之半하다
이년에 승상 곡역후 진평이 졸하다. 천하 금년 전조세를 반으로 깎아 주었다.
 
三年에 以張釋之로 爲廷尉하다 上이 行中渭橋할새 有一人이 橋下走하니 乘輿馬驚이라 捕하야 屬廷尉러니 釋之 奏호대 犯蹕하니 當罰金이라하다 上이 怒어늘 釋之曰法如是니 更重之면 是는 法不信於民이라 廷尉은 天下之平也어늘 一傾이면 天下에 用法이 皆爲之輕重하리니 民安所措手足잇가 上이 良久에 曰廷尉當이 是也라하고 其後에 人有盜高廟玉還이어늘 得하야 下廷尉治러니 釋之 奏當호대 棄市라하니 上이 大怒曰人이 盜先帝器하니 吾欲致之族이어늘 而 廷尉 以法 奏之하니 非吾所以共承宗廟意也라한대 釋之曰盜宗廟器而族之면 假令愚民이 取長陵一抔土면 何以加其法乎잇가 上이 許之하다
문제3년(B.C.177),장석지가 정위가 되었다.문제(上)이 중위교를 행차하는데,한사람이 다리밑으로 달려갔다.임금이 타는 수레(乘輿)말이 놀라자,그 사람을 체포하여 정위에 넘겼다.장석지가 주청하였다."수레앞을 지나는죄(犯蹕/범필)는 벌금에 해당합니다."하자 상이 노하니,장석지가 말하기를 "법이 이와같습니다" 다시 무겁게하면,이법은 백성에게 불신받게됩니다.정위는 천하의 공평함이므로,한번 기울면,천하의 법을 쓰는것이 모두 가볍게 무겁게할것이니,백성들이 어디에 수족을 두겠습니까?"하자 상이 한참있다가 말하기를 "정위가 당연히 옳도다"하였다.그 후에 어떤사람이 고묘(한고조의 묘)의 옥환을 훔쳤는데,잡아서 정위에 내려 다스리게하였다.장석지가 주청하여 기시에 해당한다하니 상이 대노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선제의 기물을 훔쳤는데,내가 일족을 멸하고자한다"하자 정위가 법으로써 주청하고 말하였다.제가 종묘의 뜻을 공손히 받드는 뜻과는 어긋납니다.장석지가 말하기를 "종묘의 기물을 훔치는것으로 일족을 멸하면,가령 어리석은 백성이 장릉의 한줌흙을 취하면,어떻게 그 법을 가해야합니까?"하자 황제가 허락하였다
 
六年에 淮南王長이 謀反이어늘 廢徒蜀이러니 道死하다 民이 有歌之者 曰,一尺布도 尙可縫이오 一斗粟 도 尙可春이어늘 兄弟二人이 不相容이라하니 帝 聞而病之러니 後에 封其四子爲侯하다
문제6년에,회남 여왕인 장(長/문제의 동생)이 모반하자,폐하고 옮겼는데 죽었다.백성중에 노래를 하는자가 있었는데 이러하였다 "한자의 베도 오히려 옷을 만들어 같이 입을수 있고,한말의 곡식도 오히려 절구질(舂/용)해서 같이먹을수 있다.그러나 형제인 두사람이 서로 용납하지않는도다"하자 황제가 듣고 아파했다.뒤에 그 네 아들(長의 아들)을 봉하여 후로 임명하였다
 
匈奴冒頓이 死하다 以賈誼로 爲梁王太傳하다 先是에 上이 議以誼로 位公卿하니 大臣이 多短之라 上이 以爲長沙王太傳러니 至是하야 徒梁王太傳하니 上疏方今事勢에 可爲痛哭者 一이오 可爲流涕者 二오 可爲長太息者 六이라하니라
흉노의 묵돌이 죽었다. 가의로 양왕태부를 삼았다. 이보다 먼저, 상이 의논하여 가의(賈誼)의 지위로써 공경으로 하려하자, 대신들이 많이 부족하다했다. 상이 장사왕 태부(大傅)로 삼았으며 옮겨서 양왕 태부로하였다. 가의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방금 일을 캐물으니​,통곡할일이 하나이고,눈물을 흘릴 것이 둘이며, 장탄식할 것이 여섯입니다"
 
十年에 帝의 舅薄昭 殺漢使者하니 帝不忍誅하고 使公卿과 群臣으로 徃哭之하니 昭 自決하다
문제10년(B.C.170년), 황제의 외삼촌 박소가 한나라 사신을 죽였다. 공경,군신들로 하여금 가서 곡하게하였더니 박소가 자살하였다.
 
 
十二年에 賜農民今年半租하다
문제12년에, 백성의 금년 전조를 반으로 면해 주었다.

十三年에 太倉令,淳于意,有罪當刑이러니 少女緹縈이 上書曰死者는 不可復生하고 刑者는 不可不屬하니 願沒入爲官婢하야 以贖父刑이라하니 上이 燐其意하고 詔除肉刑하다
문제13년, 대창령 순우의(​淳于意)가 죄를 받고 형벌을 당하여, 소녀 제영(緹縈)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사형을 받고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벌을 받고 수족을 잘리면 붙일 수 없습니다" 원컨대 몰적하여 관비로 삼으시고, 부친의 형벌을 속죄케하십시오" 하니 상이 그 뜻을 불쌍히여겨서, 조서를 내려서 육형을 없애 주었다.
 
除田之租稅하다
이해 전의 조세를 감면해주었다
 
十五年에 作渭陽五帝廟하고 十六年에 親祠之하시고 以新垣平으로 爲上大夫하다
15년에 위양의 오제묘를 짓고, 16년에 친히 제사를 올리고 방사 신원평을 상대부로 삼았다.
 
詔更以明年으로 爲元年하다
조서를 내려 다시 명년을 원년으로 한다고 하였다
 
後元年에 新垣平이 伏誅하다
후원년에 신원평이 사기죄로 주살되었다
 

六年에 匈奴 寇上郡雲中하니 詔將軍周亞父하야 屯細柳하고 劉禮는 次霸上하고 徐厲는 次棘門하야 以備胡할새 上이 自勞軍하야 至覇上及棘門하야는 直馳入하니 大將以下 騎送迎이러니 巳而오 之細柳하니 不得入이라 先驅 曰天子 且至시니라 軍門都尉 曰軍中에 聞將軍令이오 不聞天子詔라하니 上이 乃遣使持節詔將軍한대 亞夫 乃傳言開門하니 門士 請車騎曰將軍이 約호대 軍中에 不得驅馳라하니 上이 乃按轡徐行至營하야 成禮而去하니 羣臣이 皆驚이어늘 上이 曰嗟乎라 此 眞將軍也로다 向者覇上,棘門,軍은 兒戱耳라하더라
6년(B.C.158년), 흉노가 상군, 운중에 침입했다. 조서를 내려 장군 주아부를 세류에 주둔케 하고, 유례를 패상에 머물게 하고, 서려는 극문에 머물게 했으며 흉노에 대비케하였다. 상이 친히 군을 위로하려고 패상과 극문의 군대에 이르러, 바로 달려 들어가자 대장이하 기병들이 맞이하고 전송해 주었다. 마치고 세류로 가서, 들어갈 수가 없으니, 앞서 달리던 기병이 말하기를 "천자가 곧 군문에 도착한다 하자, 도위가 말하기를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령만 따릅니다.천자의 조령이라도 따르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사신을 시켜서 절(節)을 지니도록하고,조서를 장군 주아부에 내렸다.마침내 말을 전하여 개문하니, 문의 병사가 수레기사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장군님은 규제하시기를,군중에서 말달릴수가 없습니다."하자 상이 마침내 고삐를 잡아당기고, 서행하면서 군영에 이르니,예를 이루어 갔다.이에 군신들이 모두 놀라자,상이 말하기를 "아아, 이것이 진실로 장군이다. 지난번 패상의 극문군은 어린이 장난일 뿐이었다" 하였다
 
七年에 帝崩호대 葬安陵하니 在位二十三年에 宮室,苑囿,車騎,服御를 無所增益하고 嘗欲作露臺할새 召匠計之하니 直百金이라 上이 曰中人十家之産也라 何以臺爲리오하고 身衣式綈하며 所幸愼夫人이 衣不曳地하야 示朴爲天下先하고 吳王이 不朝어늘 賜以几杖하고 張武 受賂어늘 更加賞賜하야 以愧其心하야 專以德化民하니 當時에 公卿大夫風流篤厚하야 恥言人過하니 上下 成俗하야 是以로 海內安寧하고 家給人足하야 後世,莫能及이러라 太子 立하니 是爲孝景皇帝러라
7년 황제가 붕하였다. 재위 23년이다. 궁실이나 원유(苑囿/궁궐안의 동산), 차기(車騎/戰車戰馬), 복어(服御/임금의 의복)를​, 더하여 늘리는 바가 없었다. 일찌이 노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장인을 불러서 계산을 하니, 값이 백금이라 하여, 상이 말하기를 중인의 열가구 재산이라 하였다. 이런 재산을 어찌 누대로 하겠는가 하고 ,몸의 옷은 검은색(弋)거친 비단(綈/제)이며, 총애하는 신부인은, 옷을 땅에 끌지 않게 하였고, 소박함에 있어 천하에서 먼저가 되었다. 오왕이 조회에 들어오지 않자,궤장을 하사하였으며,장무가 금전을 수뢰하자, 다시 더하여 상을 내려주었더니, 이로써 그 마음을 부끄럽게하였다. 오로지 덕으로써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당시 공경대부는 풍류가 돈독하고 후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함을 부끄럽게 여겼으며,상하가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어서(成俗),이때문에 해내(국내)가 안녕하였으며 가급인족(家給人足/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살기 좋음)하였다. 후세에는 이와같이 미치지 못하였다. 문제를 패릉에 매장했다. 태자가 즉위하였다. 그가 효경황제이다​
 

○孝景皇帝의 名은 啓니 卽位之元年에 丞相申屠嘉 奏호대 功莫大於高皇帝니 宜爲帝者太祖之廟하고 德莫盛於孝文皇帝니 宜爲帝者太宗之廟라하대 制曰可라하다.
효경황제는 이름이 계이다. 즉위한 원년에 승상 신도가(申屠嘉) 아뢰었다. 공은 한고조보다 클 수 없습니다. 하여 의당 황제를 위하여서 태조의 묘를 세워야합니다. 덕은 효문황제보다 성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황제를 위하여 태종의 묘호를 세워야 합니다. 경제가 조칙을 내려서 "좋다"고 허락했다​
 
復收民田半租하고 三十而稅一하다.
다시 민전의 조세를 반으로 하고 30분의 1을 부세하였다.
帝爲太子時로 鼂錯 爲家令하야 得幸하니 太子家 號爲智囊이러니 帝 卽位에 錯 爲來史하야 數請間言事에 輒聽하니 寵傾九卿하고 法令이 多所更定이러라
효경황제가 태자였을 때, 조착이 가령(家令/한대에 황가의 속관)이 되었으며, 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태자가에서 지낭(智囊/지혜주머니)이라 불렀다. 조착을 내사로 삼아,여러번 틈을 청하여 일을 말하면 문득 들어주었으며, 총애가 구경보다 압도하였고, 법령도 많이 개정했다
 
 
初에 孝文時에 吳王濞의 太子 入見할새 得侍皇太子하야 飮博이러니 爭道하야 不恭이어늘 皇太子 引博局하야 提殺之러니 濞稱疾하고 不朝라 錯 數言吳過를 可削이라하대 文帝不忍이러니 及帝卽位에 錯 曰吳王이 誘天下亡人하야 謨作亂하니 今削之라도 亦反이오 不削이로다 亦反이로대 削之면 反亟禍小하고 不削이면 反遲禍大라하니 上이 令公卿 列侯, 宗室로 雜議한대 莫敢(261)難이라
처음 문제 때에, 오나라왕 비(濞)의 태자가 궁에 들어와 알현했다. 황태자를 모시고 마시면서, 바둑의 도(道)로 다툼이 일어났다. 오나라 태자가 공손하지 않으니, 황태자가 바둑판을 쥐고 쳐서 죽였다. 오나라왕 비(濞)가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았다. 조착이 여러번 말하기를 오나라가 잘못하므로 가히 삭제해야함을 아뢰었다. 그러나 문제는 차마 하지 못하였다. 경제가 즉위하자,조착이 말하기를 "오나라왕이 천하의 망인을 유인해다가, 모의를 하여 작란을 합니다. 이제 삭제하면 또한 반란할 것이고, 삭제를 안해도 또한 반란할것입니다. 삭제하면 반란함이 극하더라도 화는 작을 것이며, 삭제하지 않으면 반란은 지연될 것이나 화는 클것입니다. 상이 공경, 열후, 종실로 하여금 모여서 의논하게 하였는데 감히 비난하지 않았다
 
​錯 又言楚,趙 有罪라하야 削一郡하고 膠西 有姦이라하야 削六縣이러니 及削吳의 會稽,豫章書 至에 吳王이 遂反할새 膠西,膠東菑,川,濟南,楚,趙,皆先有吳約이러니 至是에 同反하고 濟王은 先諾이러니 後悔하야 背約城守러라
조착이 또 임금에게 아뢰었다. 초와 조도 죄가 있습니다. 하나의 군을 삭제하십시오. 교서(膠西)가 간악하므로 여섯 현을 삭제하십시오.마침내 오나라에서 회계와 예장을 삭제한다는 조서가 도착하자, 오왕이 마침내 반항하였다. 교서,교동, 치천, 제남,초와 조등, 여러나라들은 모두 먼저 오나라와 약속이 있었기에 ,이때 같이 반항하였다. 제나라왕이 먼저 승낙은 했으나 후에 후회를 했다
 
初에 文帝且崩할새 戒太子曰卽有緩急이러든 周亞夫는 眞可任將이라하더니 至是하야 拜 亞夫太尉하야 將三十六將軍하고 往擊吳楚하다.
처음 문제가 장차 붕어하려함에,태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일에는 완급이 있다. 주아부를 진짜로 총장군으로 맡길때이다. 함께 일곱나라가 반란을 하자 임금이 된 경제는 주아부를 태위로 벼슬을 내리고, 36장군을 지휘하고, 가서 오나라와 초나라를 치게 하였다.
 
鼂錯 素與袁盎으로 不善이러니 盎이 言獨有斬錯하고 復諸侯故地면 兵可無血刃而罷이러라 錯 於是에 腰斯東市하고 父母,妻子,同産이 無少長히 皆棄市하고 亞夫 大破吳,楚하니 諸反이 皆平하다.
조착은 평소에 원앙(袁盎)과 사이가 않좋았다. 원앙이 말하기를 오직 조착을 죽여야 제후들이 옛땅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군대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兵無血刃), 그만둘 수가 있습니다. 조착은 이에 동시(東市)에서 요참하였다.부모처자형제까지 노소 없이 모두 죽여 거리에다 버렸다. 주아부가 오나라 초나라를 대파하니 모든 반란이 다 평정되었다
 
○亞夫 後爲相하야 奉條候러니 以諫으로 忤上意罷하다 上이 曰此 鞅鞅하니 非少主臣이라하고 卒爲人所誣告하야 下獄하니 不食嘔血死하다
주아부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조(條/발해에 속한 읍<邑>)의 후(侯)로 봉하였다. 간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렸으므로 파면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처럼 뜻에 불만이 많으면(鞅鞅/앙앙), 어린 군주의 신하가 되지 못한다" 하고 마침내 다른 사람이 무고를 하자 하옥시키니,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自漢興으로 掃除繁苛하야 與民休息하고 孝文이 加以恭儉이러니 至帝遵業하야 五六十載之間에 移風易俗하야 黎民이 醇厚하고 國家 無事하야 家給人足하고 都鄙에 廩庾 皆滿而府庫에 餘貲財하야 京師之錢에 累駏萬이라
한고조가 한나라를 일으켜서, 번거롭고 가혹한 법을 쓸어버리고, 백성들을 휴식케 하였다. 효문제는 공손하고 겸손함을 더하여서, 경​제에 이르러서 왕업을 준수하였다 (遵業/遵守世業:대대로 왕업을 준수함). 그리하여 5-60년의 사이에, 풍속이 바뀌고 변하였으며, 백성들이 순후하였고, 국가는 일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가정에 공급됨이 풍족하였다. 서울과 시골(都鄙/도비)의 곳집(廩庾/늠유)이 모두 가득찼으며, 정부의 창고는 재물(貲財/자재)이 남았다. 경사의 돈이 쌓여 수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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貫朽而不可校하고。太倉之粟陳陳相因、充溢露積於外、紅腐勝不可食。爲吏者長子孫、居官者以爲姓號。故有倉氏・庫氏。人人自愛而重犯法。然罔疏而民富、或至驕溢、兼併之徒、武斷於卿曲。宗室・有土・公卿以下、奢侈無度。物盛而衰、固其變也。
꿰는 것이 노후하였어도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큰 창고의 곡식은, 진진상인(陳陳相因/오래된 쌀이 겹겹이 쌓여있음)하여, 충만하고 넘쳐서 밖에 길에다 쌓아두었다. 그랬더니 붉게 썪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벼슬을 하는 자들은 자손을 자라게하고, 관직에 거하는 자는, 이로써 성호(姓號)로 삼았다. 그러므로 창씨, 고씨가 있게 되었고 사람마다 자애하고, 범법을 삼갔다(重犯法)​. 그러나 한편 법망을 소홀히하며 백성이 부자가 되기도 하고, 혹자는 교만함이 넘치기도 하였다. 겸병의 무리들(토지를 빼앗은 지주)이, 백성을 억지로 내리 눌렀다(武斷鄕曲)​. 종실에도 토지를 두었으며, 공경 이하도 사치를 하고 법도가 없었다. 사물이 성하면 쇠퇴하는 것이니, 반드시 그들도 변하게 되는 것이다.
 
帝崩。在位一十七年。有中元・後元。太子立。是爲世宗孝武皇帝。
효경황제가 붕하였으니 재위는 17년이다. 중원, 후원의 연호가 있었으며 태자를 세웠는데 이가 세종 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이다.
 
孝武皇帝
〔孝武皇帝〕名徹、卽位之元年、始改元曰建元、年有號始此、○擧賢良方正直言極諫之士、親策問之、廣川董仲舒對曰、事在强勉而已矣、强勉學問、則聞見博、而知益明、强勉行道、則德日起、而大有功、
효무황제는 이름이 철이다. 즉위원년에 원년을 고쳐 건원이라하였다.​연(年)에 이름이 있기는 여기서 비롯하였다. 현량, 방정, 직언,극간하는 선비를 천거하면 친히 책문(策問)하였다.광천(廣川/山東省) 동중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일은 억지로 힘써야 마칠수 있습니다. 열심히 학문을 해야 견문이 넓어지고,지혜가 더욱 밝아지며,도를 행하는것을 열심히 하면 ,덕이 날로 일어나서 큰 공이 있게됩니다."
 
又曰、人君者正心以正朝廷、正朝廷以正百官、正百官以正萬民、正萬民以正四方、四方正、遠近莫不一於正、而無邪氣奸其閒、是以陰陽調、風雨時、羣生和、萬民殖、諸福之物、可致之祥、莫不畢至、而王道終矣、
또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정심이라야 조정이 바르게됩니다.조정이 바르면 백관이 바르고, 백관이 바르면 만민이 바르게 됩니다. 만민이 바르게 되면 사방이 바르고, 사방이 바르면, 원근이 정(正)에서 하나같지않음이 없게 됩니다. 삿된 기운과 간악함으로 이간함이 없게되고,이렇게 하면 음양이 조화롭고, 풍우가 때에 맞으며, 여러 생명이 화합하고, 만민은 번창하며, 복이 있는 만물들이 가히 길함에 이르게 되니, ​지극함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되어 왕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陛下行高而思厚、知明而意美、愛民而好士、然而敎化不立、萬民不正、譬琴瑟不調、甚者必解而更張之、乃可鼓也、爲政而不行、甚者必變而更化之、乃可理也、漢得天下以來、常欲治、而至今不可善治者、當更化而不更化也、
폐하께서 행하심이 고결하시고 생각​하심이 후하시며, 밝게 아시며, 뜻이 아름다우십니다. 백성을 사랑하시며 선비를 좋아하시지만 그러나 교화가 세워지지않고 만민은 바르게 되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금슬이 조화롭지 않으니, 심한것은 반드시 풀어서 다시 당겨야 마침내 가히 금슬을 탈수가 있는것입니다.정사를 하여서 행해지지 않으면, 심한 것은 반드시 바꿔서 다시 교화해야 마침내 가히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얻은 이래로 항상 다스리고자하였으나,지금에 이르러서 잘다스렸다할수 없는것은 당연히 다시 교화할 것을 다시 교화하지 않은 것 때문입니다.
 
又曰、養士莫大乎太學、太學者、賢士之所關也、敎化之本原也、願興太學、置明師以養天下之士、又曰、郡守縣令、民之師帥、所使承流、而宣化也、宜使列侯郡守、各擇其吏民之賢者、歲貢各三人、又曰、春秋大一統者、天地之常經、古今之通誼也、今師異道、人異論、臣愚以爲諸不在六藝之科、孔子之術者、皆絕其道、然後統紀可一、法度可明、而民知所從矣、上善其對、以爲江都相、
​동중서가 또 말하였다. "선비를 기름은 태학보다 더 큰 곳이 없으며, 태학은 현명한 선비의 관문이며, 교화의 본원입니다. 원컨대 태학을 일으켜서, 현명한 스승을 두어서 천하의 선비를 길러내십시오."하고 또 말하기를 "군수와 현령은 백성들의 스승이며 본보기입니다. 이들의 사명은 좋은 풍속을 계승하여 이어져서 흐르게하고,임금의 명을 전파하고 백성을 교화합니다. 마땅히 열후,군수로하여금 각각 뽑아 그 백성중에 현명한자를 해마다 세명씩 올리게 하십시오." 하고 또 말하였다. "춘추는 크게 통일하는 책입니다. 천지의 항상하는 도리이며, 고금으로 세상에서 이행할 도의(通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스승들이 다른 도를 가르치고, 사람들마다 다른 논리를 따릅니다. 신은 어리석으나, 만약 육예의 과에 있지 않거나, 공자의 술(術)이 아닌것은 모두 그 도를 잘아야합니다.그런후에 기강을 통일하여 하나로 할 수가 있으며 법도를 가히 밝게할 수 있으며,백성들이 따를바를 알게될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 대답을 좋다하고 동중서를 강도상(江都相)으로 삼았다
 
○上使使者奉安車蒲輪、束帛加璧、迎魯申公、旣至、問治亂之事、公年八十餘、對曰、爲治不在多言、顧力行何如耳、
한무제가 사신으로 하여금 부들로 바퀴를 싸서 편안하게 한 안차(安車)를 받들고, 여러 겹으로 비단에 옥을 놓고,노나라 신공을 맞이하게 했다. 신공이 이르자,한무제가 치란의 일을 물었는데 신공의 나이가 80세가 넘었으며,대답하여 말하기를," 치는 말이 많음에 있지 않으며,역행(힘써 행함)을 여하이 하는가 돌아보는데 있를 뿐입니다."하였다
 
○三年、閩越擊東甌、遣使發兵救之、徙其衆江淮閒、
건원 3년(B.C.138년), 민월(閩越)이 동구(東甌)를 쳤다. 무제가 사신을 보내고 군대를 내서 구원했다.그 백성들을 강수외 회수 사이로 옮겼다
 
○帝始爲微行、起上林苑、
황제가 처음으로 미행(微行)을 했다, 상림원을 일으켰다
 
○五年、置五經博士、
건원 5년,오경박사(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를 두었다
 
​○六年、閩越擊南越、遣王恢等擊之、
건원 6년, 민월이 남월을 치자, 왕회를 보내서 공격케 하였다
 
○元光元年、初令郡國、擧孝廉各一人、
원광 원년(B.C.134년), 처음 영을 내려서 군국에서 효도와 청렴한 사람 각한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二年、方士李少君見上、善爲巧發奇中、言、祠竈則致物、而丹砂可化爲黃金、蓬萊仙者可見、見之以封禪則不死、上信之、始親祠竈、遣方士入海、求蓬萊安期生之屬、海上燕齊迂怪之士、多更來言神事矣、
원광 2년, 방사 이소군이 한무제를 뵈었는데, 교묘하게 드러낸 말이 신기하게 잘 들어맞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부엌신을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십시오." 하였고, "단사를 황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였고, "봉래의 신선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고, "신선을 보고 봉선하면 불사합니다." 하였다. 한무제가 믿고, 처음으로 친히 부엌신을 제사하였으며, 방사를 바다로 들여보내서, 봉래의 안기생(安期生) 신선을 찾게 했다. 바다 건너 연나라, 제나라에서 신비하고 괴상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신이한 일을 말하였다
 
○上用大行王恢議、遣恢等、將兵匿馬邑旁谷中、陰使聶壹誘匈奴、入塞而擊之、單于覺而去、自是絕和親、攻當路塞、
한무제가 대행인 왕회의 의논함을 썼다.왕회를 보내서 군대를 이끌고 마읍의 곁에 골짜기에 숨어서, 은밀히 섭일을 보내서 흉노를 유인하여, 들어오면 막고 치려하였는데,선우가 깨닫고 가버렸다. 이로부터 화친이 끊어졌으며, 치고 대적하니 길이 막혔다
 
○唐蒙上書、請通南夷、拜蒙中郞將、將千人入夜郞、夜郞侯聽約、以爲犍爲郡、
당몽이 상서하여, 남이와 통하기를 청하니, 허락하고 당몽을 벼슬 주어 중랑장으로 하였으며, 천명을 이끌고 야랑에 들어갔다. 야랑의 후가 약속을 받아들였다. 건위군으로 하였다 ​
 
○又拜司馬相如爲中郞將、通西夷、卭筰冉駹置郡縣、西至沫若水、南至䍧牱、爲徼、​
또 사마상여를 벼슬 주어 중랑장으로 삼았으며, 서이와 통하게 하고, 공(​卭), 작(筰), 염방(冉駹)에 군현을 두었으며, 서쪽으로 말수 ,약수에 이르렀고, 남으로는 장가군에 이르렀으니, 변방의 경계로 하였다
 
○徵吏民有明當世之務、習先聖之術者、縣次續食、令與計偕、
​무제는 관리, 백성으로 당세의 일에 밝은 자와 선성의 술에 익숙한자를 불러오게하였으며, 현을 차례로 연속하여 숙식케 하며,회계 장부를 매년 경사(서울)로 올리는 관리와 더불어 같이 오게 하였다
 
菑川公孫弘、對策曰、人主和德於上、百姓和合於下、故心和則氣和、氣和則形和、形和則聲和、聲和則天地之和應矣、策奏、擢爲第一、待詔金馬門、
치천사람 공손홍이 대책을 아뢰기를 "인주가 위에서 덕으로 화합하면, 백성들도 밑에서 화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화합한즉 기가 화합하고, 기가 화합한즉 형이 화합하고, 형이 화합한즉 소리가 화합하고 소리가 화합한즉 천지가 화합하여 응하게 됩니다." 하고,대책을 아뢰었는데, 제일로 삼아 발탁하였고 금마문에서 명을 기다리게 하였다 ​
 
齊人轅固、年九十餘、亦以賢良徵、弘仄目事之、固曰、公孫子務正學以言、無曲學以阿世、
제나라사람 원고는 나이가 90세를 넘었다.또한 현량으로써 소집되었는데, 공손홍이 눈을 찡그리고 섬겼다. 원고가 말하기를 "공손은 바른 학문으로 아뢰기를 힘써야한다,곡 학아세(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함)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匈奴寇上谷、遣將軍衞靑等、擊卻之、○元朔元年、主父偃上書、諫伐匈奴、嚴安亦上書、及徐樂亦上書云、陛下何威而不成、何征而不服、書奏、上召見曰、公等皆安在、何相見之晚也、皆拜郞中、是秋匈奴入寇、二年、又入寇、遣衞靑等擊之、遂取河南地、置朔方郡、
흉노가 상곡에 침입하자, 장군 위청등을 보내서 상곡을 치게 했다. 원삭 원년에 주보언이 상서하여 흉노토벌을 간하였다. 엄안도 또한 상서하였고,서락도 또한 상서하여 이르기를 "폐하께서 누군들 위협하여 이루지 못할 것이며, 누군들 정벌하여 정복하지 못하겠습니까? 글을 올리자, 상이 불러서 보고 말하기를 "공등은 모두 어디에 있었는가, 왜 서로 보는것이 늦었는가 하고 모두 벼슬 주어 낭중으로 임명하였으며 이해 가을에 흉노가 들어와 침입했다. 2년에 또 침입했으며, 한무제는 위청을 보내서 공격했으며, 마침내 하남땅을 취하였으며 삭방군을 두었다
 
○五年、公孫弘爲丞相、封平津侯、上方興功業、弘於是開東閤、以延賢人、
원삭 5년에(B.C.124년), 공손홍을 승상으로 삼았으며 평진후에 봉하였다. 상이 한창 공업을 일으키려하자, 공손홍이 이에 동합(東閤)을 열고, 현명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匈奴寇朔方、遣衞靑率六將軍擊之、還、以靑爲大將軍
흉노가 삭방을 침략하자, 위청을 보내서 여섯장군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돌아오자 위청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匈奴入代、
흉노가 대지방에 침입하였다.
 
○六年、春遣衞靑等六將軍、擊匈奴、夏再遣、
6년 봄에 위청등 여섯장군을 보내서 흉노를 치고 여름에 다시 파견하였다​
 
○元狩元年、遣博望侯張騫、使西域、通滇國、
원수 원년(B.C.122년), 박망후 장건을 보내서 서역으로 사신갔으며 전국과 통하게 했다
 
○二年、以霍去病爲驃騎將軍、擊敗匈奴、過焉支祁連山而還、
원수 2년에, 곽거병으로 표기장군을 삼았는데, 흉노를 격파했다. 연지를 지나서 기련산[天山]을 지나서 돌아왔다
 
○匈奴渾邪王降、置五屬國、以處其衆、
흉노 혼사왕이 항복하였으므로 다섯 개의 속국을 두고 그 무리들을 처하여 살게 했다
 
​○三年、匈奴入右北平定襄、
원수 3년에 흉노가 우북평과 정양에 침입하였다
 
○四年、遣衞靑霍去病擊匈奴、去病封狼居胥山而還、
원수4년에 위청과 곽거병을 보내서 흉노를 공격하였다. 곽거병은 낭거서산에서 봉선하고 돌아왔다
 
○元鼎二年、方士文成將軍李少翁、以詐誅、
원정2년에,방사 문성장군 이소옹이 사기로 주살되었다
 
​○西域始通、置酒泉武威郡、
서역에 처음으로 통하자, 주천과 무위군을 설치하였다
 
○五年、遣將軍路博德等擊南越、○方士五利將軍欒大、以詐誅、○六年、討西羌平之、、
원정5년에 장군 노박덕등을 보내서 남월을 치게하였다.방사 오리장군 난대가 사기로 주살되었다.원정6년에 서강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南越平、置九郡
남월을 평정하고 아홉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元封元年、帝出長城、登單于臺、遣使吿單于曰、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下、今單于能戰、天子自將待邊、
원봉 원년(B.C.110년), 무제가 만리장성 밖으로 가서 선우대에 올라갔다. 사신을 보내서 선우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남월왕 머리는 이미 한나라 북쪽대 궐밑에 걸려있노라. 이제 선우가 능히 싸우려하면, 천자가 친히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리겠다." 하였다.
 
○帝如緱氏、登中嶽、遂東巡海上、求神仙、封泰山、禪肅然、復東北至碣石而還、
황제가 구씨현에 가서 중악에 올라, 마침내 동쪽으로 바다를 순회하면서 신선을 구하였으며, 태산에서 봉제사를 하고, 숙연산에는 선제사를 올렸다.다시 동북으로 갈석산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滇王降、置益州郡、전왕이 항복하니 익주군을 설치하였다
 
​○三年、擊樓蘭虜其王、擊車師破之、
원봉 3년에 누란을 치고 그 왕을 사로잡았으며 차사를 쳐서 격파하였다
 
○朝鮮降、置樂浪、臨屯、玄菟、眞番郡,​
조선이 항복하였고,낙랑,임둔,현도,진번군을 두었다(B.C.108년)
 
○匈奴寇邊、遣兵屯朔方、흉노가 변방을 침략하였으므로,군대를 보내 삭방군에 주둔케 하였다.
 
○五年、南巡江漢、至泰山增封、○六年、擊昆明、
원봉5년에 남쪽으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순수하여 태산에 이르러 증봉(增封)하였다.6년에 곤명을 쳤다
 
○太初元年、帝如泰山、十一月甲子、朔旦冬至、作太初曆、以正月爲歲首、
태조 원년(B.C.104년), 무제가 태산에 가서 제사하였다.11월 갑자 초하룻날 아침이 동지였다. 태초력을 만들고 정월로써 세수(歲首)로 삼았다​
 
○遣李廣利伐大宛、不克、​
​이광리를 보내서 대원을 치게하였는데 이기지못하였다.
 
○遣趙破奴擊匈奴、敗沒、
조파노를 파견하여 흉노를 쳤으나 패하여 죽었다.
 
○三年、匈奴大入破塞外城障、
​태조3년, 흉노가 크게 쳐들어왔으며 요새와 외성보루를 파괴했다.
 
​○大發兵、從李廣利伐宛、宛降、得善馬數十匹、
크게 군대를 동원하여,이광리를 따라서 완(宛)을 치게 했다. 완이 항복하자 좋은말 수십 필을 얻었다.
 
○四年、匈奴單于、使使來獻、
태초4년에 흉노의 선우가 사신을 보내서 바치러왔다
 
○天漢元年、遣中郞將蘇武使匈奴、單于欲降之、幽武置大窖中、絕不飮食、武齧雪與旃毛、幷咽之、數日不死、匈奴以爲神、徙武北海上無人處、使牧羝曰、羝乳乃得歸、
천한원년(B.C.100년)중랑장 소무를 보내서 흉노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선우가 항복시킬려고 소무를 큰 움(窖/교)가운데 유폐하고,음식을 안주고 끊었으며,소무는 눈을 깨물고 모직물의 털을 더불어같이 깨물어서 함께 삼켰다. 수일이 지나도 죽지 않자 흉노가 신으로 여기고,소무를 북해상 무인처에 옮겼다.소무에게 숫양을 키우게 하며 말하기를, "숫양이 젖을 주면 돌아갈 것이다" 하였다
 
○二年、遣李廣利擊匈奴、別將李陵敗降虜、
천한 2년에, 이광리를 보내서 흉노를 치게 했는데, 별장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上以法制御下、好尊用酷吏、東方盜賊滋起、遣使者、衣繡衣、持斧督捕、得斬二千石以下、
한무제는 법제로써 아래를 다스렸으며,​혹독한 관리를 써서 따르게하기를 좋아했다. 동방에서는 도적이 자주 일어났으며, 사자를 보내서 수의(繡衣/수놓은 옷)를 입게하고 도끼를 가지고 가서 감독하고 잡게 하고 2천석이하 세도가를 베도록 하였다
 
​○四年、李廣利擊匈奴、不利、
천한4년에 이광리가 흉노를 쳤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太始三年、帝東巡瑯琊、浮海而還、
태시3년(B.C.94년)에 한무제가 동쪽 낭야를 순시하고 바다를 거쳐서 돌아왔다
 
○四年、東巡祀明堂、修封禪、
태시4년, 동쪽으로 가서 명당에 제사하고 봉선(封禪)하였다 ​
 
○征和二年、巫蠱事作、帝如甘泉、以江充爲使者、治巫蠱獄、掘太子宮云、得木人尤多、太子據懼、使客佯爲使者、收捕充斬之、白母衞皇后、發中廏車、載射士、出武庫兵、發長樂宮衞卒、上從甘泉來、詔發三輔兵、丞相劉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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