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146년간 숨겨온 한국의 땅 高麗 현종 후손이 밝힌 오키나와의 충격! 진실
[해외감동사연] 유튜브에 나온 내용을 정리하여 실었습니다.
오키나와 해역에서 한 시대를 뛰어넘는 역사적 발견이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의 ‘高麗國 재구도 류큐도’라는 글씨가 새겨진 金印이 발견되면서, 146년 동안 숨겨왔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에 현지 주민들은 말합니다. 우리 조상은 한국 땅에서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제야 우리 정체성이 빛을 본다‘ 한 노인은 눈가를 적시며 조용히 말합니다.
“우리 조상은 진정 한국인이었습니다. 이 진실이 밝혀져 다행입니다” 젊은 여성은 단호합니다. “더 이상 숨겨진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일본 정부는 즉각 이 발견에 대해 ’조작’이라고 일축하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한 의원은 어릴 적 가문의 비밀과 함께 쉽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요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오키나와 출신 일본 국회의원 타카하시 미나입니다. 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자리를 빌려 저의 정체성과 가족사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저는 태어나 자란 땅과 그곳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지만, 동시에 수년 전부터 제 내면에 격렬한 소용돌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땅이 천 년 동안 결코 일본 땅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충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을 과감 없이 알리고자 결연히 나섰습니다.
2024년 5월 15일,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도쿄에 있는 의원 숙소에서 커피잔을 들고 뉴스를 보던 찰나, 갑작스러운 특보 화면에 저는 얼어붙었습니다. 오키나와 해역에서 한국의 조사선이 고려 시대 국세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장면, 그리고 그 금빛 인장에는 분명히 ’고려국 제구도 류큐도 관인’이라는 문구가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온 듯했습니다. 나는 그때 왜 할아버지가 그토록 괴로워하셨는지, 그리고 왜 우리 집안이 감춰야만 했는지 그 비밀의 끈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일본 총리 야마구치가 주재한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즉시 이 발견을 ‘명백한 조작’이라 규정하며 한국의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제 손에는 이미 세계 각국 학자들이 연대(年代) 측정고ㅑㅏ글씨 해독을 마친 자료가 있었다. 총리께 질문을 던졌다.
“만약 이 사실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 순간 회의장은 정적에 휩싸였고, 저는 의원 숙소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비밀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옥 패와 한문으로 빽빽하게 적힌 일기가 있었다. ‘고려국 관찰사 왕기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 앉았습니다. 수 백 년 동안 감춰진 그 진실이 바로 내 핏줄이 있고, 그것은 가문의 비밀을 넘어 오키나와 전체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엄중한 사실이었다. 이윽고 저는 일본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리에 오키나와로 날아갔습니다. 공항에서 역사학자 이선영 교수를 만났다. 그녀는 저를 슈리성의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안내하며, 그곳에서 발견된 충격적인 문서를 보여주었다. 한문과 한글로 쓰인 문서들은 고려와 조선이 오키나와 지역을 직접 다스렸다는 증거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세종대왕이 한글 교육을 명한 명령서와 당시 류큐의 조선 의병 파병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치 수백 년 전 우리 조상들이 목소리를 내는 뜻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만남 이
후 저는 오키나와 사람들과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전통 수호자 마코토 할머니는 한국어의 억양이 조금 다를 뿐 오키나와 방언이 변형된 한국어임을 시연해 보여주셨다.` 그리고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유물과 문서들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확실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한 단 높은 벽으로 진실을 막으려 하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때 제 휴대전화에는 이미 일본 정부 고위층과 공안의 감시와 협박성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의 안전, 정치 생명이 위협받는 현실에 저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메시지가 마음을 다잡게 했다. “언젠가 우리 후손 중 누군가는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할 것이다” 저는 그 누군가가 되기를 결심했다. 이렇게‘ 천년 동안 오키나와는 한국 땅이었다’라는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제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앞으로 이야기는 한 개인의 고뇌를 넘어 146년간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한 뜨거운 투쟁과 수많은 희생, 그리고 한민족 정체성 회복을 향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몸부림 기록입니다. 부디 끝까지 귀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저는 오키나와에 도착한 후 역사학자 이선영 교수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저를 슈리성의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안내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를 맞이한 곳은 오랜 세월 숨겨져 있던 지하 비밀 공간이었는데, 그곳에선 믿기 힘든 문서와 유물들이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천 권의 고서와 한문, 또 놀랍게도 한글로 적힌 문서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고, 그중에는 세종대왕이 직접 내린 한글 교육 시행 보고서도 있었다. 저는 그 문서들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내용을 확인했다. 세종 10년에 류큐도 백성들에게 한글을 익히게 하라는 내용이 명확히 적혀 있었고, 즉 류큐 도는 천년 전부터 한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마코토 할머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 땅의 비밀을 지켜왔습니다. 조선 시대 관복, 왕이 하사한 교서들, 과거시험 합격증서까지 모두 여기에 보존되어 있지요. 임진왜란 때는 2만 명이 조선을 도우려 파병됐습니다. 우리도 조선인이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저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동안 배워온 역사와는 전혀 다른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말이 사실상 한국어 병합임을 깨달았고, 문화와 언어가 천년 전부터 이어온 한민족의 흔적임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또한, 그 빛바랜 문서들을 통해 조선 왕실과 류큐 왕가가 끈끈한 연대를 맺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앞으로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숨겨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제 가슴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 정부의 거센 저항과 탄압을 예상하며 무거운 책임감과 두려움도 커져갔습니다. 이선영 교수와 마코토 할머니의 도움으로 얻은 자료들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열쇠였기에 이 여정은 단순한 역사 탐구를 넘어 정체성 회복 투쟁임을 절감했습니다. 역사를 밝혀낼수록 제가 직면한 현실은 더욱 냉혹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전자 연구소 과학자 야나기가 극비리에 진행된 DNA 분석 결과를 전달해 왔습니다.
오키나와 주민 2만 명 중 82% 이상이 한반도 혈통으로 나타났다는 충격적인 보고서였습니다. 특히 제 가문은 고려 왕실 직계와 99.8%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저 자신이 진정한 고려
왕족 후손임을 과학적으로 입증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언론에 공개될 경우 일본 정부에 치명타가 될 수 있기에 극비에 부쳐 졌습니다. 이와 함께 야마구치 총리와 일본 정부는 역사 왜곡과 은폐를 위해 무자비한 탄압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역사 말살 프로젝트가 이미 146년 넘게 진행 중이며, 조선어 사용 금지, 한글 서적 전량 소각, 조선식 이름 변경 강요, 반항 지도자 처형 등이 무참히 자행되고 있다는 극비 문서가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제가 매만진 족보와 이를 기반으로 한 유전자 연구 결과는 개인적인 충격을 넘어 민족 전체의 아픔과 통탄을 상기시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각종 위협과 감시 속에서 깊어지는 내면 갈등과 가족 걱정을 묵묵히 감내하며 그 역사적 진실을 파헤쳐 갔습니다. 이선영 교수와 함께 자료를 번역하고 정리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의 잃어버린 역사가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오키나와 인들이 자신들의 뿌리와 정체성을 되찾으려 떠드는 사회적 바람은 멈출 수 없는 물결이었고, 그 중심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여전히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지만, 진실을 알리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의 고비는 어디에든 예고 없이 다가오는 법이었습니다. 어느 날 슈리성 더 깊은 비밀의 공간에서 조선 왕실 제례 도구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기록과 제사 관련 유물들이 그곳에 보존되어 있었고, 특히 조선 왕실이 만수무강을 비는 축문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문구는 ‘소큐왕 왕위검은 천자의 나라 조선을 영원히 섬기겠나이다’라고 적혀 있어, 류큐 왕가가 조선 왕가에 충성을 다짐한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 일본 공안들이 슈리성 인근을 급습하여 문서와 유물을 압수하려 했으나, 우리는 신속하게 많은 자료를 안전하게 빼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1879년 병합 당시 작성된 극비 문서에는 3만 명의 조선계 주민을 처형한다는 잔혹한 학살 계획이 명시되어 있었으며, 실제 실행된 기록들이 발견되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가 직접 체포 위기에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동포, 역사학자들과 함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의지는 한층 더 굳건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개인과 가족에게 대한 협박과 압박을 강화했고, 사회 전반에 걸친 감시망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저는 고집스럽게 싸움을 이어 나갔고, 이제는 단순한 투쟁이 아닌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임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안과 탄압 속에서도 오키나와 주민들은 하나둘씩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은 점점 더 단단해졌습니다. 우리는 가슴 아픈 역사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온 우리의 혼과 정신을 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진실의 빛을 꺼뜨리지 않는 저항이 계속될 것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진실을 깨닫고, 한민족임을 외치는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거리 곳곳에 모인 사람들은 평화롭게 “우리는 한국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명에 불과했던 참가자 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3천 명이 넘는 군중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의 진심 어린 외침은 일본 정부의 엄격한 금지령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와 단결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곧바로 강경 진압과 경제 제재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자
위대가 대거 투입되고 불법으로 규정되어 경찰의 무력 진압이 이어졌습니다. 경찰봉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많은 주민이 부상 당하고 억울하게 연행되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한 청년, 강민재는 눈물을 머금으며 “우리 조상은 천 년 전부터 한국이었는데 왜 우리를 버립니까?” 하며 절박한 외침을 내뱉었습니다. 그의 말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대변했습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외교적 고려와 국제 정세를 이유로 공식 입장에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오키나와 문제를 ‘과거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라고만 밝혔습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천 년 동안 우리 땅이었고, 지금도 우리 땅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한국 정부에 대한 절망감과 배신감이 켜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 단체와 개인들은 오키나와 동포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발적인 서명운동과 문화행사를 계속 열었고, 국민의 공감과 동참이 급속도로 확산하였습니다. 국제 정세도 복잡하게 얽히면서 상황은 더욱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미군 기지가 위치한 오키나와 문제는 미국의 안보 이익과 직결되어 있었기에, 미 국무부는 현상 유지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 역시 동맹 관계와 군사적 이익 때문에 개입을 주저하며, 오키나와 주민들의 요구는 현실 정치 속에서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처럼 국제적 압력과 현실 외교는 진실과 정의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냉엄한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타카하시 미나 의원과 이선영 교수는 이러한 힘겨운 정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았습니다. 한국 내 유력 국회의원들과 수차례 접촉하며 협력을 모색했으나, 현실적인 제한과 정치적 난항에 좌절감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내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청년 단체와 활동가들과 함께 오키나와 진실 운동을 지속하며, 국민 여론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키나와의 동포들은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항쟁은 단순히 현재의 현실을 넘어, 과거부터 이어온 문화와 정신을 결국에는 이 땅과 세상에 되살려내겠다는 단호한 의지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국제 정치의 냉대와 정부의 외면에 맞서 싸워야 했지만, 내면의 열망과 끊기는 더욱 강인해졌습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자신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자발적인 움직임을 펼쳤습니다. 한글 교육과 전통문화 복원은 숨 쉬는 저항이었으며, 각종 비밀 모임에서는 옛 한글 글자를 가르치고 전통춤과 제례를 재현하는 모습이 활발히 나타났습니다. 마코토 할머니가 이끄는 한 문화 센터에서는 노인들이 젊은 세대에게 한국어와 전통을 전해주면서 잃어버릴 뻔한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간절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한국 시민 단체들 또한 오키나와 동포들의 목소리에 호응하여 자발적 모금 운동과 문화 후원에 나섰습니다. ‘잃어버린 동포 오키나와 돕기’ 캠페인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한글 교재와 문화 자료들이 비밀리에 오키나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처럼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저항과 지원은 정부의 냉담한 태도와 대비되며, 진정한 국민들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개인의 힘으로 시작된 작은 박물관도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타카하시 의원이 설립한 ‘천년의 기억’박물관은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한국 탐방단과 역사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박물관 한쪽에는 방문객들이 남긴 메시지가 가득했고, ‘우리는 잊지 않겠다.’ ‘언젠가 진정한 우리의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립
니다’라는 글귀가 가득 채웠습니다. 2024년 7월, 일본 국회에서 긴급 청문회가 열렸고, 저는 증인으로 나서 146년 동안 은폐되어 온 진실을 공개 증언했습니다. 제 진짜 이름은 왕위겸의 후손임을 고백하며, 오키나와가 918년부터 1879년까지 천년 가까이 고려와 조선의 정식 영토였음을 힘주어 밝혔습니다. 고려국 국세, 임진왜란 참전 기록, 일본 정부가 자성한 학살 문서, 그리고 최신 DNA 분석 결과까지 공개하며 하원의사당은 순식간에 술렁였습니다.
여당에서부터 격렬한 반박과 논쟁이 벌어졌지만, 일부 야당 의원들과 국민들이 뜨거운 박수와 지지로 맞섰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 아니면 버림받은 고아인가? ”라는 절규가 의사당을 울렸고, 방청석에 있던 수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함께 외쳤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그 순간 현장은 혼돈 속에서도 희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국제 질서 존중’을 이유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며, 현실 정치의 벽을 절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사이에선 오키나와 동포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시민 단체의 서명운동과 문화교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딸과 함께 ‘우리는 천년 동안 한국인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렇다’라는 신념을 나누며, 이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국가가 외면하고 억압을 가해도 우리의 정체성과 역사는 결코 사라질 수 없습니다. 진실은 반드시 세상에 빛을 발할 것이며, 언젠가 반드시 우리의 땅과 정체성이 온전히 회복되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