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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수가 한국에 와서 눈물을 흘리게 된 이유
25/08/08 12:38:29 金 鍾國 조회 69
일본 교수가 한국에 와서 눈물을 흘리게 된 이유( 해외 감동 사연에서 간추려 실음)
 
(다카하시 유타로 교수가 밝힌 독도의 영유권 역사를 재조명해 본다)

512년 신라 지증왕 때의 기록, 1454년 세종실록, 1877년 일본 태정관 지령,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시대순으로 나열해보니 한국의 주장이 훨씬 앞서고 일관되어 있었다. 1899년 일본 수로지, 일본 해군성이 발간한 조선수로지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해군조차 독도를 조선 영역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40년간 믿어왔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교수님, 아마 일본에서는 이런 자료를 잘 공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국의 불리한 자료들이니까요.
 
교수님 독도 현지 방문도 가능합니다. 직접 보시면 더 명확해질 것입니다. 이미 제 확신은 크게 흔들린 상태였습니다.”정말 내가 틀렸던 걸까? 40년간 믿어온 게 잘못된 거야? “창밖 서울 야경을 바라보는 저는 깊은 혼란에 빠졌다. 이 그 섬을 보는 것 말이에요. 특히 일본 측 자료들이 한국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정말 내가 40년간 놓친 게 있었던 걸까?” 울릉도에 도착해서 헬기로 갈아타며, 동행한 해양경찰이 설명해 주었다. 울릉도에서 독도로 향하는 15분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다케시마, 아니 독도라고 해야 하나?” 점점 가까워지는 섬을 보니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섬이 왜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어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교수님, 곧 도착합니다. 동도부터 둘러보시지“요, 독도가 점점 가까워지자 저는 평생 자료로 봤던 그 섬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는 순간이라는 생각에 긴장했습니다. 동도에 착륙했다. 짠 바다 냄새와 함께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독도에 발을 딛는 순간 저는 숨이 막혔다.
한국 해양경찰 초병이 정중하게 경례를 했고,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초병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지난 며칠 동안 본 자료들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512년 신라 기록, 1454년 세종실록, 1877년 일본 태정관 지령,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이걸 내가 왜 이제야 제대로 보고 있을까?” 저는 태극기 앞에서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40년간 믿어온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에서 보여준 자료들은 진실 일부에 불과했구나 싶었다. 독도 등대 근처를 걸으며 저는 생각에 잠겼다. 1900년에 이미 한국이 칙령으로 관할권을 명했다면 1905년 우리 편입은 뭐였던 거지? 무주지가 아니었던 거 아닌가? “발 밑에 바위를 바라보며 저는 혼란스러웠다. 이 바위들이 1400년 전부터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니, 동행한 독도관리사무소 박 직원이 설명해 주었다.
 
이 등대는 1954년에 설치된 것이라 한다. 그때부터 계속 한국인이 이 섬을 관리하고 있다. 등대 직도 상주하고 해양경찰도 24시간 경비를 서고 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1954년이면 한국전쟁 직후네요. 그때도 이 섬을 지키고 있었구나! “
”여기서 金성도 어민 부부가 살고 계시다. 3대째 이 근처에서 고기잡이하시는 분들이다. “어제 영상으로 보았던 그 어민이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실감이 났다. “여기가 정말 우리 삶의 터전입니다” 할아버지자 어릴 때부터 이 바위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위에 앉아 생각했다.
 
“512년 신라 때부터 이 섬을 알고 있었다는 기록들, 1454년 세종실록의 정확한 위치 설명, 1667년 일본 은즈시청합기에서 일본 경계를 오키섬으로 한정한 것. 한국이 훨씬 오래전부터 이 섬을 자신들의 영토로 여겼구나” 독도의 서도를 바라보며 저는 눈물이 났다. 40년간 확신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정말 잘 못 알고 있었던 거구나, 한국의 주장이 이렇게 탄탄한 근거가 있었다니. 그럼 1905년 편입은 정말 불법이었던 거야?” 등대지기 김 아저씨가 다가와서 물었다. 일본에서 오신 분이시지요? “괜찮으세요?” 저는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제 평생의 신념이 이 작은 섬에서 완전히 부서져 버렸거든요. “ 이 섬에서 3대째 살고 있다던 그 어민 분 말씀이 계속 떠오르네요” 그 어민의 진솔한 표정, 한국군 초병들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리고 이 섬 곳곳에 스며있는 한국의 역사, 모든 것이 모두 자연스러웠다. 돌아가는 헬기를 기다리며 저는 독도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이 섬은 정말 한국 땅이구나. 내가 40년간 착각하고 있었어.
1877년 우리 대정관에서도 일본과 관계없다고 했는데,“
 
태극기가 여전히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헬기 안에서 저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행했던 한국 외교부 관계자가 ”괜찮으세요? “라고 물었지만 저는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제 평생의 신념이 그 작은 섬에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울릉도로 돌아가는 길, 저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분노도 아니고 억울함도 아니었다. 제가 너무 무지했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40년간 잘못 믿고 살았다니” 바다를 바라보며 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모든 걸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 서울에서 하루 더 머물며 한국 학자들과 만난 후 일본으로 돌아온 저는 곧바로 연구실로 향했다. 3일간의 한국 방문이 제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논문 초안 “독도 불법점거 구조 분석”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한국 국회 강연장에 선 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마이크를 잡았다. 수백 명의 한국 의원들과 관계자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일본 외교관이 한국 국회에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말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존경하는 의원님들께” 저는 깊게 숨을 쉬고 말을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에서 독도 문제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오늘 이 자라에 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청중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떤 이는 의아한 표정이었고, 어떤 이는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저는 40년간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외할아버지로부터들은 이야기, 외무성에서 경험, 그리고 제가 본 자료들, 

엄연한 우리 땅을 일본의 것인양  자국민들을 속이며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가르쳐,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거짓을 심어주는 일본 심보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다카하시 유타로 교수가 잘못을 바로잡는 국회 발표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옮긴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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