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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이념으로 세운 최초의 제국[해외감동사연](上). 고조선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25/07/17 08:20:36 金 鍾國 조회 140
역사 교과서 속 고조선은 단군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한 나라로 소개된다.
유튜브에 소개된 ‘고조선 이야기’의 내용을 정리하였으며, 그 외 사진 자료는 대구향교 신문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를 연재했을 때 실었던 것 중에서 고조선과 관련된 자료를 인용하였다.

고조선은 단지 신화 속 존재일까, 아니면 실제 존재했던 고대 제국일까? 일부 역사학자들과 재야 사학자들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그들에 따르면 古朝鮮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세계 문명의 시작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9천 년 전에 세워진 ‘환국(桓國)’ 이 최초국가였으며, 이 환국에서 파생된 나라가 비로 고조선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환국⟶배달국⟶고조선으로 이어져 계보가 인류 최초의 역사라고 한다. 이 내용은 일반적으로 접하는 서구 중심의 역사관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보통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문명이 인류 최초의 고대문명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古朝鮮이라는 고대 제국이 있었다는 주장은 학계에 충격을 던진다. 이 주장의 근거는 《삼국유사》, 《환단고기》 같은 고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때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단군신화가 기록되어있다.
 
하늘의 신 환인(桓因)이 인간 세상을 다스릴 인물을 보내기로 하고, 그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 터를 잡고 신시(神市)라는 도시를 세운다. 그는 천부인(天符印)이라는 신성한 도구 세 가지를 가지고 와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이후 곰이 사람이 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이 태어난다. 단군은 아사달에 고조선을 세우고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주류학계는 이 이야기를 신화로 분류한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이 신화가 단지 상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주장한다. 특히 천부인(天符印)은 고대문명의 고도로 발달한 도구 혹은 지식체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라는 표현은 외계문명이나 초월적 존재와의 접촉설과도 연결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실제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평양, 강계, 압록강 일대에는 고조선과 관련된 유물과 고분이 다수 존재한다. 비파형 동검, 고인돌 문화, 토기류 등은 고조선이 단순한 전설이 아님을 시사한다. 또한, 한사군 설치 이전의 유적에서 발견된 문자나 상징체계는 독자적 문화권을 나타낸다. 한자(漢字)는 고조선에서 차용한 문자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한다. 중국의 고대 문헌인 《史記》, 《漢書》 등에도 고조선에 대한 언급이 존재한다. 이는 단군(檀君)의 존재가 완전히 허구는 아님을 방증하는 자료로 여겨진다. 또한, 고조선은 단순히 한반도 북부에만 존재했던 나라가 아니다. 기원전 수천 년에 걸쳐 만주, 연해주, 동북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도 있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이처럼 고조선의 존재를 둘러싼 증거와 해석은 다양하다. 단군신화를 단순한 민족의 전설로 볼 것인지, 고대 역사의 실마리로 볼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일부는 지워져 왔다는 점이다. 고조선에 대한 역사는 잊혔지만 결코 사라진 적은 없다. 이제는 그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다. 고조선은 정말 실재했던 제국이었는가? 그리고 그 답을 찾는 여정은 한민족(韓民族)의 정체성과 세게 속의 위치를 다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의 핵심은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 바로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구절이 있다.

弘益人間 理化 世界’
이 문장은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라, 국가운명의 철학이자 실천의 원칙이다. 기원전 2300년대 이류의 대부분이 정복과 약탈로 문명을 세웠던 시기였다. 그런데 古朝鮮은 이익이 아닌 ‘이로움’을 중심 가치로 삼았다. 당시 세계 대부분은 문명을 强者 中心, 혹은 노예제 기반이었다. 고대 이집트는 파라오를 신으로 섬겼다.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은 왕의 명령이 곧 법이었다. 그러나 고조선은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과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였다. 홍익인간은 왕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나라를 지향한 사상이다. 한 사람을 위한 천하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천하를 위한 한 사람을 말한다. 이는 훗날 민주주의적 개념과도 통한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놀라운 개념이다. 불교의 慈悲, 儒敎의 仁, 도교의 無爲보다도 앞선 사상이었다. 
심지어 기독교의 사랑보다도 수천 년을 앞서 인간의 사랑과 공익을 강조했다. 이념적으로 보나 시간상으로 보나 홍익인간은 세계 최초의 통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상이 실제 고조선 사회에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먼저 고조선은 ‘신정일지’체제를 가졌지만, 신의 이름으로 백성을 억압하지 않았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세운 것도 백성을 위한 뜻에서 비롯됐다. 삼사(風伯, 雨師, 雲師)를 두어 농사, 기후, 생태를 관리하게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백성의 삶을 물질적으로 윤택하게 하려는 행정적 체계였다. 또한 桓雄은 무려 3천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내려왔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닌 공동체 지도력 구조를 보여주는 상징적 설정이다.
군림이 아닌 협업, 지배가 아닌 조화의 통치였다는 것이다. 檀君 역시 정치뿐 아니라 윤리적 지도와 역할도 겸한 인물이었다.
弘益人間 정신은 왕권을 절대화하기보다 인간 모두에게 내재 된 가치로 강조되었다. 그래서 고조선은 전쟁보다 외교와 교역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강력한 무력을 가졌으나 이를 사용하기보다는 방어적으로 유지했다고 본다. 또한, 고조선 사회는 계급이 상대적으로 유연했으며, 자유민 중심의 공동체적 특성이 강했다. 그 배경에는 인간을 위한 통치, 인간 중심의 사상이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afc0005.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86pixel, 세로 247pixel 弘益人間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고조선 전체 체계의 중심축이었다. 그 정신은 이후 夫餘, 高句麗, 백제, 新羅에도 이어졌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업적도 단군의 뜻을 계승한 것이라 
전해진다. 인류가 잊고 있던 철학을 한국은 이미 9천 년 전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철학이 다시 세계로 퍼지고 있다. 고조선은 단순히 한반도 북부에 머물렀던 작은 부족 국가가 아니었다. 고조선은 대륙을 아우르던 광대한 문명권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단군조선이 단일 국가가 아닌, 다수 부족과 도시국가의 연합체였다는 해석에서 출발한다.
특히 만주 일대와 연해주,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에서 고조선의 흔적이 발견된다.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고인돌 등은 공통된 문화의 징표다. 이 문화 요소들은 지역을 달리해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중심 문명에서 주변으로 퍼진 확산 구조를 보여준다. 이 문화 요소들은 지역을 달리해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고조선이 문화적 중심지였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주장은 단군조선이 중국 동북지역까지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미이다. <史記>, <漢書> 등 중국 사서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은 자주 등장한다. 한사군이 등장하기 전 이미 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동북공정의 시도는 바로 이 점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은 고조선의 영향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한민족의 역사적 기원을 만주에서 미려 내려 한다.
하지만 공학적 발견은 이를 뒤집는다. 요하(遼河) 文明과 紅山 문화는 고조선 이전, 또는 초기와 겹치는 시기의 문명이다. 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옥기, 토기, 여신상 등은 한민족의 고대 신앙과 유사한 면이 많다. 특히 ‘공 토템, 태극 무늬, 삼족오 문양은 고조선과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이 문양들은 훗날 고구려와 신라, 심지어 고려의 문화까지 이어진다. 紅山文化는 단순한 지방 문명이 아니라 고조선의 전신일 수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고조선은 단지 문명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문화를 주변으로 퍼뜨리는 중심축이었다. 중앙아시아, 몽골, 티베트까지 퍼진 청동기 유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이 바로 고조선의 활동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티베트의 라싸 근처 유적지에서도 삼태극과 유사한 문양이 발견되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고조선의 영향력이 그만큼 뻗어 있었던 것일까?
또한,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출토된 고인돌 형태는 한반도 남부와 매우 유사하다. 몽골과 바이칼호수 인근에서도 비파형 동검 계열의 청동유물이 발견된다. 이 유물들은 동시대 중국 중원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 지역은 고조선 문화권 또는 영향권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의 동서 교역로는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문화 확산 경로였다. 이 경로를 통해 문자, 사상, 예술, 제도 등이 퍼졌을 수 있다.  다음에 下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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