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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齋 申采浩의 우리역사 바로잡기(1)
23/07/15 10:59:01 金 鍾國 조회 990
丹齋 申采浩의 우리역사 바로잡기(1)

                                                                                                                      愼齋 金 鍾國
들어가며.
나는 丹齋 申采浩 선생의 朝鮮上古史(1998년 10월30일 간행본)를 1999년 현직을 떠나면서 학교 앞 서점에서 구입했었다. 歷史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世界史라 함은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朝鮮史하면 朝鮮民族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紀錄이라고 책 첫 머리에 천명하신 글을 읽고는 크게 느낀바 있어 우리 역사를 알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歷史에 관련된 도서를 기회 있을 때마다 구입했다. 丹齋가 역사뿐 아니라 獨立運動에 저극 참여하여 <朝鮮革命宣言>에서 民衆直接革命論을 主唱하며 독립운동에 적극 헌신하다 1929년 국제위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1936년 여순 감옥에서 殉國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해에 현대적 해설과 주석으로 새롭게 꾸민 朝鮮上古史가 김종성이 옮겨 쓴 책과 ‘朝鮮上古文化史’를 새로 박기봉이 옮겨 쓴 책을 구했다. 여기서는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은 차치하고 歷史學者로서 고구려의 역사가 적어도 일백 수십 년은 잘려 나갔음을 천명한 사실이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 입증되었기에 본고에서 밝혀드리고자 한다.
 
1. 현재 사용되는 국사 교과서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1922년 12월 총독부는 훈령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1925년 6월에 명칭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어 日皇勅令 21호로 승격시키고 독립관청으로 만들었다. 일본인 사학자 今西龍을 朝鮮史 왜곡의 실질 책임자로 하고, 4백만 환(현 시가 약 1천억 원)을 받은 李完用과 2백만 환을 받은 朴泳孝, 權重顯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편수위원으로 매국노 李完用의 조카 李丙燾를 비롯해서 申奭鎬, 李能和, 崔南善, 魚允迪 등이 참여하여 일본의 의도에 따라 朝鮮古代史를 잘나내고, 뒤틀고, 사실관계를 뒤집어 朝鮮人들의 뇌리에 自虐심리와 열등의식을 심어줄 <거짓 朝鮮史>를 편수하였다.
필자는 이런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국사교과서가 지금도 오류를 걷어내지 못하고 漢四郡의 설치가 북한 평양주변에 설치되었다고 강단에서 교육하고 있어 재야사학자들의 반증을 소개하여 우리역사 바로알기에 일조하려 하는 것이다.
 
2, 古代史의 領域問題
丹齋의 歷史認識은 三國이후보다는 그 이전의 上古史를 강조하며, 이 시기를 한민족의 成長, 發展에 불가결한 시기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 때의 역사무대를 또한 重視하지 않을 수 없었다. 丹齋가 인식한 古代史의 영역을 추적하게 되면, 北으로 北滿洲‧黑龍江 유역에까지, 西南으로는 遼西‧渤海灣‧直隸省(현재의 난징시 주변)‧山東‧山西 및 淮水‧長江 유역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檀君‧夫餘族 의 支那植民論이라 할 수 있고, 百濟의 海外經略도 알아보자.
1) 檀君‧扶餘族의 支那植民論
丹齋는 《周書》와 《史記》를 근거로 하여 弗離支國을 거론한다. 단재의 설명에 따르면, (BC5~6세기에 弗離支라는 자가 朝鮮의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直隸‧山西‧山東 등의 省을 정복하고 大縣 부근에 자기의 이름을 딴 <弗離支國>을 세웠다. 그가 山東을 정복한 뒤에는 朝鮮의 검은 원숭이(狖), 담비(貂), 여우(狐),삯(狸), 등 털옷(毛裘)와 무늬비단(錦緞) 등 직물을 수출하여 渤海를 중심으로 商業이 진흥했다는 것이다.

丹齋가 일찍이 그의 《朝鮮上古文化史》에서 山東半島와 淮‧江 유역의 東夷族의 활동상황과 이와 관련하여 徐偃王(서언왕, 古代 中國에 나라를 세웠다는 우리나라 사람. BC 30세기에 중국 양자강 북쪽 江蘇省 근방 넓은 지역에 大徐帝國 세움(周나라 穆王 때)의 치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丹齋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東夷族들을 夫餘族이라 하고, 이들의 山東‧山西‧連薊(연계) 등지에서 植民活動을 전개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서언왕은 漢族의 鐵器文化의 급속한 발전에 대응하지 못했음인지 周‧楚 연합군에 밀려 멸망하였고 淮河와 楊子江 지역의 東夷族 또한 漢族에 점차 동화되었다.
한편 현재 사학자 沈伯綱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고조선의 국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武經總要』 「전집 권16하」 <北番地理>에 "燕京(지금 北京)에서 中京을 가는 도중에 朝鮮河를 지나서 古北口애 도달한다" 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朝鮮河는 古北口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潮河는 古北口 서쪽에 있고, 난하(灤河)는 古北口 동쪽에 있다. 이는 潮河가 朝鮮河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史記』 「朝鮮列傳」에서 浿水는 燕-朝鮮, 漢-朝鮮의 국경선이라 했다. 衛滿은 서쪽에서 浿水를 건너 朝鮮에 왔고, 涉何는 浿水를 건너 朝鮮에 왔다가 中國으로 도망쳤다. 이는 浿水가 中國과 朝鮮 양국 사이의 國境線이긴 하지만 朝鮮에 속하는 朝鮮河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朝鮮河=潮河=浿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한 지도에서 보듯이 노룡현에 있는 朝鮮城은 弊城으로 지금도 남아있으니, 潮河와 朝鮮城이 곧 고조선의 영토이며 중국과의 국경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丹齋가 말하는 朝鮮의 경계와 근접하는 것으로 필자는 사료된다.(잃어버린 上古史 되찾은 古朝鮮, 沈伯綱 著에서 인용) 또 여기서 李丙燾 國史에서 대동강을 浿水라 인식하여 北韓의 平壤周邊에 漢四郡의 하나인 樂浪郡이 설치되었다고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런 맹랑한 발상으로 낙랑군을 정했으니 통탄할 일이다. 또 平壤이라는 지명이 北京과 접하는 지역에도 두 곳이나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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