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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31). 조호익(曹好益)의 충의(忠義), 32. 전주(全州) 방어전과 정담(鄭湛) 등의 용전(勇戰)
23/07/05 10:19:28 金 鍾國 조회 1045
 
31. 조호익(曹好益)의 충의(忠義)
前義禁府都事曺好益 募兵江東討賊. 好益昌原人 有志行 爲人所誣 全家徙江東 貧困 敎授生徒以得食*3) 幾二十餘年 厲操益堅.
車駕至平壤 赦其罪 召拜義禁府都事 及平壤被圍 好益往江東募兵 欲救平壤 旣而平壤陷 軍民皆潰 好益還赴行在.
余遇於良策驛 語之曰「天兵將至 子毋往義州 可還江東 仍行召募 與天兵會平壤 以助軍勢.」好益從之.
余遂狀啓其由 爲起兵文移授好益 且助以軍器.
好益去聚兵 得數百人 出陣祥原 邀賊多斬獲.
好益書生 不閑弓馬 徒以忠義 激厲士心. 冬至日 率其士卒 望行在四拜 終夜痛哭 一軍爲之流涕.

전(前)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1) 조호익曺好益*2)이 군사를 강동(江東 :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에서 모아 倭敵을 토벌 하였다. 조호익은 창원(昌原) 사람으로 지조와 덕행이 있었는데, 남의 무고를 당하여 온 가족이 강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집안이 빈곤하여 생도를 가르쳐서 밥을 얻어 먹은 지가 거의 20년이나 되었어도 그 지조는 더욱 굳건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평양(平壤)에 이르자 그의 죄를 용서하고 불러 의금부도사로 임명하였다. 평양성(平壤城)이 倭敵에게 포위를 당하자 조호익은 강동(江東)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조금 뒤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군사와 백성들이 다 무너지자, 조호익은 돌아서 행재소[行在]로 갔다.

나는 그를 양책역(良策驛)에서 만나 그에게 말하기를, "명(明)나라 구원병이 곧 올 것이니, 자네는 의주(義州)로 가지 말고 강동으로 돌아가서 그대로 군사를 모집하여 가지고, 明나라 군사와 평양에서 모여서 군세(軍勢)를 돕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하자, 조호익은 그 의견을 따랐다. 나는 드디어 그 사유를 적어 장계(狀啓)를 올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공문을 만들어 조호익 에게 주고 또 군기(軍器)를 도와주었다. 조호익은 그 길로 가서 군사를 모은 것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는 상원(祥原)에 나와서 진을 치고 倭敵을 맞아 많이 베어 죽였다.

조호익은 서생(書生)으로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는 무예에는 익숙하지 못하였으나 다만 충성과 의리[忠義]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하였다. 그는 동짓날[冬至日]에 그 군사를 거느리고 멀리 행재소(行在所)를 바라보고 네 번 절하고는 밤새도록 통곡하니, 모든 군사들이 다 눈물을 홀렸다.
*1)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의금부(義禁府)는 조선조 때의 관청으로 왕명을 받들어 죄수를 추국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그 관원으로 판사(判事, 종1품), 지사(知事, 정2품), 동지사(同知事, 종2품)의 당상관(堂上官)을 합하여 4명을 두어 다른 관원으로 하여금 겸임시키고, 경력(經歷, 종4품)⋅도사(都事, 종5품)를 합하여 10명, 그밖에 나장(羅將) 232명을 두었다.

*2)조호익(曺好益, 1545∼1609)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상원(祥原)에서 倭敵을 많이 참획(斬獲)함. 뒤에 안주목사(安州牧使)⋅성천목사(成川牧使)를 지냈다. 시호는 정간(貞簡)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저서에 ≪지산집(芝山集)≫⋅≪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역상추설(易象推說)≫⋅≪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門答)≫⋅≪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석해(周易釋解)≫⋅≪제서질의(諸書質疑)≫가 있다.
*3)식(食) : ①밥식. ②밥사. ③사람 이름 이. ≪漢書≫ 역이기(酈食基, 秦, ?∼기원전 204)
 
32. 전주(全州) 방어전과 정담(鄭湛) 등의 용전(勇戰)
賊兵犯全羅道 金堤郡守鄭湛 海南縣監邊應井 力戰死之.
時賊從慶尙右道 入全州界 湛⋅應井等 禦之於熊嶺 爲木姗橫斷山路 督將士終日大戰 射殺賊兵無算. 賊欲退 會日暮矢盡 賊更進攻之 二人俱死 軍遂潰.
明日賊至全州 官吏欲走 州人前典籍李廷鸞 入城 倡吏民固守.
時賊精銳 多死於熊嶺氣已索. 監司李洸 又設疑兵於城外 畫則多張旗幟 夜則列炬滿山. 賊到城下 環視數周 不敢攻而去.
悉聚熊嶺 戰死者屍 埋路邊作數大塚 立木其上 書曰 <弔朝鮮國忠肝義膽.>
蓋嘉其力戰也. 由是 全羅一道獨全.

왜적(倭敵)의 군사들이 전라도(全羅道)를 침범하자, 김제군수(金提郡守) 정담(鄭湛)*1)과 해남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2)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때 倭敵은 경상우도(慶尙右道)로부터 전주(全州) 지경으로 들어오므로, 정담[湛]⋅변응정[應井] 등이 이를 웅령(熊嶺)*3)에서 막았는데, 목책(木栅)을 만들어 산길을 가로질러 끊어놓고서 장병들을 독려하여 종일토록 크게 싸워 적병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쏘아 죽였다. 倭敵들이 물러가려 할 무렵에 마침 날이 저물고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 倭敵들이 다시 나와 치므로 두 사람[湛⋅應井]은 이를 막다가 함께 전사하고 드디어는 군사들이 무너졌다.

그 다음날 倭敵이 전주(全州)에 이르니 관리들이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고을사람으로 전에 전적(典籍) 벼슬을 지낸 이정란(李廷鸞)*4)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아전과 백성들을 일으켜 굳게 지켰다.  이때 倭敵의 정예부대가 웅령(熊嶺)에서 많이 죽었으므로 그 기세가 이미 흩어져 버렸고,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광(李洸)이 또 의병(疑兵)을 성 밖에 베풀고, 낮에는 깃발을 많이 벌여 세우고, 밤이면 횃불을 온 산에 가득히 벌여놓으니 倭敵은 성 밑에 와서 몇 번 돌아다니며 살피다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

倭敵은 돌아가다가 웅령에 이르러 전사한 사람의 시체를 모두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나무를 그 무덤 위에 세우고 쓰기를 <조선국(朝鮮國)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조상[吊]한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들[鄭湛⋅邊應井)] 등이 힘써 싸운 것을 칭찬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라도(全羅道) 한 도(道)만은 유독 보전되었다.
*1)정담(鄭湛, ?∼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의병장(義兵將). 자는 징경(澄卿), 본관은 초계(草溪),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의병(義兵)을 모아 거느리고 웅령(熊嶺)에서 倭敵을 쳐부수다가 전사함.

*2)변응정(邊應井, 1557∼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무관(武官). 자는 문숙(文淑), 시호는 충장(忠壯).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정담(鄭湛)과 함께 웅령(熊嶺)에서 倭敵을 쳐부수다가 전사함.
*3)웅령(熊嶺) : 전라도 전주(全州)와 금산(錦山) 사이에 있는 고개. 웅치(熊峙).
*4)이정란(李廷鸞, 1529∼1600) : 자는 문보(文父),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조선조 宣祖 때 무관(武官). 무과에 급제하여 해남현감(海南縣監)⋅도사(都事)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전주(全州)에서 의병을 모아 전주를 지키는 데 공을 세워 태상시첨정(太常寺僉正)이 되고,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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