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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齋 申采浩의 우리역사 바로잡기 ​4. 高句麗‧ 漢九年戰爭說(최종회)
23/07/21 07:35:50 金 鍾國 조회 879
4. 高句麗‧ 漢九年戰爭說
丹齋의 上古史意識體系에 의하면, <신수두> 時代인 檀君朝鮮은 중국의 支那戰國時代에 해당하고 三朝鮮分立時代를 거쳐 列國爭雄時代로 移行되는데, 그 시기가 대략 기원전200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기원전 200년대는 『신 朝鮮이 匈奴 冒頓에게 敗戰한 때』요, 東‧北扶餘의 분립이 이루어졌던 시기다. 列國爭雄時代에 분열하는 나라들은 『신朝鮮 판도에서 立國』한 나라로서 北扶餘와 兩 東扶餘 및 高句麗 등 四 國이었다. 丹齋는 列國爭雄時代를 對漢激戰時代라고 하였다. 즉BC 190년 전후해 수십 년 동안에 朝鮮에서는 東扶餘가 분립되고, 南北曷思‧南北沃沮의 兩 東扶餘가 분립되었으며, 東扶餘와 高句麗의 사이에는 알력이 전게되었을 뿐 아니라 朝鮮과 漢族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전개 되었는데, 이것이 漢과 高句麗사이의 九年戰爭이다.

이 九年戰爭은 丹齋가 붙인 이름이다. 이 싸움에 관한 總評을 丹齋는 이렇게 썼다. ‘드디어 東扶餘를 滄海郡으로 豫定하고 彭吳를 대군을 삼아 燕‧齊(今 直隸‧山東)의 병마와 狼餉(낭향)을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高句麗와 싸워, 南東扶餘와 南樂浪列國을 救援하다가, 高句麗의 대항이 의외로 강경하여, 9년간 혈전을 계속하여 漢의 敗戰이 번삭(煩數)함에 이 때 樂浪郡 혁파의 體面漁로써 兵을 거두고 戰事를 끝낸 것이다.‘ 丹齋는 9년 전쟁에 대해 追記하기를, 九年間 양국간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司馬遷은 《史記》에서 기록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孔丘의 春秋筆法을 들었다. 즉 漢 武帝의 패전을 수치로 여겨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또 하나는 對 漢 武帝 九年血戰의 高句麗側 主役으로 大武神王을 거론한 것인데, 丹齋는 그 근거의 하나로 《三國史記》卷14 大武神王27년(*기원 44년) 記事인 後漢 光 武帝와의 전쟁을 漢 武帝와의 싸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5. 高句麗 年代削減說
1) 丹齋 申采浩선생의 논거
위의 高句麗의 九年戰爭說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BC 37에 건국되었다고 하는 고구려가 BC 128년경에 설치된 뒤 폐지 되었다고 전해지는 滄海郡을 둘러싸고 漢 武帝와 九年間 血戰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선 時間的으로 보아 통설적인 고구려 건국 연대(BC 37년)에서 거의 90여 년 전의 사건이므로 양측의 年代가 조정되지 않는 한 우선 歷史的인 事件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丹齋는 對漢血戰의 高句麗側 主役이 大武神王(《三國史記》에 의하면 AD18~44년 在位)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종래의 통설에 따르면 滄浪郡 置廢事件인 이 高句麗 九年戰爭과 大武神王 관계는 약 150년~170여 년간의 시간적 차이가 나타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丹齋는 고구려 建國 初記의 연대를 비롯한 『列國의 연대가 삭감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고구려 연대가 삭감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들어 제시했다.
 
첫째, 고구려는 新羅 赫居世21년(기원 37년 건국)~신라 文武王8년(기원 668년)에 망하니 도합 705년 이라고 史家들이 적어왔다. 그러나 高句麗가 망할 때에 『不及9百年』이란 秘記가 유행한 바 秘記기 비록 妖書라 할지라도 그 시대에 그 秘記가 人心動搖의 導線이 되어 있은 즉, 이 때 《文武王 八年》에 高句麗 年祚가 八百 몇十년 이상이 됨이 명백하니, 本紀의 七百五年이 疑問이 된다.
둘째, 高句麗本記로 보면 廣開土王이 始祖 鄒牟王 十三世孫이 될 뿐이니, 廣開土王의 碑文이傳之十七世孫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句를 근거로 하면 廣開土王이 始祖 鄒牟王의 十三世孫이 아니라 十七世孫이니, 이같이 世代를 빠트린 本記인즉, 그 七百年이라고 말한 존속연수도 믿을 수 없다.

셋째, 本紀로 생각하면 高句麗 建國이 衛右渠가 滅亡한지 七十二年이지만, 《北史》 高麗傳에는 莫來가 왕이 되어 扶餘를 쳐 大破하여 이를 統屬하더니, 漢 武帝가 朝鮮을 멸하고 四郡을 설치할 때, 高句麗縣이라 한 바, 莫來는 《廣東釋史》에 <慕本>의 誤字인가 했으나, 莫來를 <무뢰>로 읽으며 <박雹>의 뜻이 <神>의 뜻이니 大朱留王의 이름이 <無恤>과 같을 뿐 더러 本紀에도 東扶餘를 정복한 자가 곧  大朱留王인즉 莫來는 慕本王이 아니라 大朱留王인 것이며, 莫來 곧 大朱留王이 東扶餘를 정복한 뒤에 漢 武帝가 四郡을 설치하였음은 즉, 高句麗 建國이 四郡設置약 100 몇十년 前이 될 것이다.

특히 첫 번째와 관련, 그 내용은 高句麗 멸망 후 唐의 侍御使 賈言忠이 高宗의 질문에 답하면서 高句麗秘記에 말하기를 ‘(且 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적년(勣年)八十矣) 9백년이 되기 전에 80 대장이 이를 멸망시킨다 하였는데, 高씨는 漢으로부터 나라를 세운지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이세적의 나이가 8십 세입니다.’라고 《三國史記》 권22 寶藏王 27년 春正月條에 나와 있다. 9百年은 아니지만 8백년이 넘는 高句麗의 歷史를 인정해야 함에도 金富軾 자신이 지은 《三國史記》에 적혀있음에도 歷年을 705년으로 단축시켜 놓았을까. 역사에 해박한 丹齋의 판단이 옳다고 본다.

또한 朝鮮後期 실학자들은 《北史》 高句麗傳의 『漢武帝元封四年滅朝鮮置玄菟郡 以高句麗縣以屬之』 등의 자료에 근거하여 高句麗가 漢 武帝 以前에도 존재하였는데, 이를 前高句麗로 한다면, BC 37년에 주몽이 세운 高句麗는 後高句麗인 셈이고, 따라서 兩高句麗가 존재했으며 , 高句麗가 玄菟에 소속된 시기까지만 소급해 올라간다 하더라도 70년을 더 복원할 수 있으므로 「年將八百」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高句麗 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라는 글귀 등을 참고한다면 고구려의 존재는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不及九百年說」 또한 근거가 전혀 없는 秘記만으로 단언할 수 없었던 것이다.

丹齋가 중국 亡命 時에도 《東史綱目》만은 항상 지니고 學問的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사료된다. 丹齋는 뒷날 삭감된 고구려의 연대가 一百二十年은 된다고 보았다. 결국 高句麗의 歷年은 825년이 된다. 그러니 「不及九百年說」은 근거가 충분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겠다.
그러나 新羅人이 삭감한 연대는 약 120년 잡고 中國史 中國年代年條와 대조하면 甲申은 漢文帝 後元•元年에 해당하며, 瑠璃王 元年壬寅은 漢 武帝 建武 2년(BC 139)에 해당하며, 大武神王元年 戊寅은 漢 武帝 太初 3년(BC 103)에 해당하며, 慕本王 元年 戊申은 漢 宣帝 本始 3년(BC 71)에 해당한다.

丹齋는 高句麗 등에 대한 연대 삭감이 통일 후에 新羅에 의해 감행된 것으로 보고, 新羅가 이렇게 한 것은 이는 古代 建國의 성후로 國家의 지위를 다루는 風氣가 있음으로, 신라가 그 건국이 高句麗 百濟보다 뒤짐을 부끄럽게 여겨 두 나라를 멸한 뒤에 기록상으로 세대와 年祚를 모두 新羅以後로 만들었다고 그 이유를 丹齋는 설명했다. 그리하여 高句麗 연조를 백 몇 십 년이나 삭감시키고 보니, 新羅와 恩怨이 없는 東扶餘•北扶餘는 물론 百濟‧伽倻‧沃沮 등의 나라들의 연대까지 삭감되었다고 丹齋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기존의 통설적인 韓國史 이해 體系에 수정을 요하는 점에 대해서만 몇 가지를 李萬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첫째, 高句麗 建國初期 年祚를 삭감시키고 나아가 당시의 전반적인 韓國史 編年 調整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丹齋는 海慕漱의 아들이라 고 하면서, 기원전 200년경 東北扶餘가 분립하던 때에 朱蒙이 출생했을 것이며, 衛滿과 同時代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朝鮮上古史》에서 漢 武帝의 衛滿朝鮮침공을 高句麗‧百濟의 건국 후에 서술했음도 이 때문이다.
둘째, 高句麗 建國이 百 數 十年 이상 앞당겨짐으로 BC 2C경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의 展開過程이 通說과는 달리 설명되어지고 있다. 丹齋의 주장에 따르면, 高句麗는 漢 武帝 침공 이전에 건국되었고, 한 武帝의 滄浪郡 설치 戰役은 곧 高句麗의 九年戰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때 征服君主 漢 武帝를 상대하여 九年間의 혈투 끝에 승리한 주역이 大武神王이라는 것이다. 결국 고구려의 삭감연대 修正은 漢 武帝에 필적하는 民族英雄 大朱留 (大武神王)을 탄생시킨 것이다.
 

2) 현대 在野史學者의 고구려 기원의 입증
♦ 우리역사 바로알가의 신용우 교수는 북한의 손영종 이론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⓵ 고구려 건국연대가 기원전 277년이라면 고구려는 진⸳한의 동쪽이 아니라 연⸳진⸳한의 동쪽이라고 해야 함
⓶ 손영종은 945년을 유국 900년 설과 합당하다고 했지만 945년을 900년이라 하지 않음
 
♦ 고구려 건국연대의 재설정
⓵ 삭감된 5명의 왕 중 하나는 태조대왕과 얽힌 국조왕 ⟶ 초기 고구려왕의 세습은 夫子, 兄弟뿐 아니라 대무신왕에서 형제인 민중왕(閔中王)에게 갔다가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에게 갔고, 太祖大王은 모본王의 먼 친척인 재사의 아들로 이어지는 왕 계보로 장자 세습이 지켜지지 않았음으로, 5세손이라는 의미는 무의미하고 5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⓶ 유리왕부터 태조대왕까지 5명의 재위연수 165년+37년=202년. 가장 가까운 갑신년(甲申年)은 기원전 217년이다.
 
♦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217년
*고구려 건국연대가 217년이 합당한 이유
⓵ 고구려가 秦(BC 221 ~ BC 206) • 漢(BC 206 ~ AD 220)의 동쪽에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⓶ 유국 900년 설과의 일치: 보장왕이 당나라에 항복한 668년까지는 885년, 보장왕이 요동주 도독, 조선왕으로 불리다가 죽은 682년까지는 899년 →손영종의 설대로 기원전 277년이라면 항복할 때까지는 945년, 죽은 해까지는 959년 → 이것을 900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⓷ 고구려 건국연대가 217년 이라는 것을 뒷받침 하는 이론
丹齋 申采浩는 『朝鮮上古史』에서 “고구려 건국은 건국 원년으로부터 1백 몇 십 년을 소급하여 기원전 190년 전후 수 십 년 동안 동부여, 북부여, 고구려가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열국도 같은 시기로 잡아서 列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서술했다. 丹齋가 밝힌 기원전 190년 전후에서 가장 가까운 甲申年은 기원전 217년이다.
신용우 교수는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진취적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17을 확고하게 제시했다.
 
나가며
丹齋 申采浩선생의 해박한 우리 고대사를 읽고 너무도 감격하여 우리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서를 탐독하고 정리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낙랑, 진번, 임둔, 현도‘하며 한사군을 외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한데, 日帝에 오염되고 물든 관변사학자들이 대를 이어서 잘 못된 역사를 오늘도 이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한탄스러운가? 한사군의 설치 지역만 해도 기원전 108년에 漢武帝가 지금도 북경을 가려면 비행기로 1시간이 소요되는데 조랑말 타고 평양까지 와서 樂浪郡을 설치 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이도 丹齋와 같은 해안을 가지고 후손들에게 잘 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주는 예지가 있었기에 다행이고, 재야 史學徒의 反證이 있었기에 더욱 안심이 된다. 그러나 이는 잠시의 생각이고 하루 빨리 우리 국사교과서가 개정이 속히 이루어져서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미래의 세대를 키워져야 한다고 본다. 한편 中國은 우리 국사교과서를 역 이용하여 洪山文化와 大文口文化 등은 東夷의 문화이며 古朝鮮, 夫餘, 高句麗 역사의 흔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것으로 치부하여 夫餘나 高句麗가 그들이 지배한 지방정권이라 억지를 부리며, 그들 조상들이 기록해 놓은 歷史書를 팽개치고 없는 역사를 만들어 많은 자국민들을 속이고 세계만방에 허위를 선전하기에 광분하니 이것이 될 말인가? 中國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英國 史學界와 러시아 史學者들이 반발해도 막무가내식이니 우리가 빨리 우리역사를 바로잡을 때이다. 『漢書』, 『後漢暑』 등 자기네 조상들이 써 놓은 史實을 이재 와서 ’눈 가리고 아웅‘한다면 그런 창피가 어디 있겠는가?
모쪼록 이렇게 잘못되었던 역사를 儒生諸位께서도 바른 인식을 가져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참고도서: 申采浩思想과 民族獨立運動(申采浩선생殉國50週年追慕論集), 조선상고사(신채호저 김종성 역), 조선상고문화사(신채호저 박기봉옮김),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심백강), 四庫全書 사료로 보는 한사군과 낙랑(심백강), 三國史記(김종성), 三國遺事(최 호), 한국 고대사신론(윤내현), 고구려건국기원설(신용우 우리역사바로알기),
작업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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