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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2. 괴이(怪異)한 일들
23/10/31 14:51:00 金 鍾國 조회 421
​2. 괴이(怪異)한 일들.
杜詩「長安城頭頭白烏 夜飛延秋門上呼 又向人家啄大屋 屋底達官走避胡.」蓋記異也.
壬辰四月十七日 賊報至 朝野遑遑. 忽有怪鳥鳴於後苑 飛在空中 或近或遠 只一鳥而聲滿城中 人無不聞 終日達夜 其鳴不暫停.
如此十餘日 車駕山狩 賊入城 宮闕廟社 公私廬舍一空 嗚呼! 其亦怪甚矣.
又五月 余隨駕至平壤 寓於金乃進家 乃進語余曰「年前有豺屢入城中 大同江水赤 東邊濁甚 西邊淸 今果有此變.」
時賊未至平壤 余聞此語 默然不答 而心不喜 未幾平壤又陷. 蓋豺乃野獸 不合入城市 如春秋記鸜鵒來巢 六鷁退飛 多麋有蜮之類. 鮮有無其應者 天之示人顯矣 聖人之垂戒深矣 可不懼哉? 可不愼哉?
又壬辰春夏間 歲星守尾箕 尾箕乃燕分 而自古言 我國與燕同分 時賊兵日逼 人心洶懼 不知所出.
一日下敎曰「福星方在我國 賊不足畏.」蓋聖意欲假此 以鎭人心故也.
然是後都城雖失 而卒能恢復舊物 旋軫故都. 賊酋秀吉 又不能終逞凶逆而自斃 斯豈偶然哉? 蓋莫非天也.
두보(杜甫)의 시[杜詩]*1)에,

長安城頭頭白烏(장안성두두백오) : 장안성(長安城)*2) 위의 머리 하얀 까마귀는
夜飛延秋門上呼(야비연추문상호) : 밤이면 연추문(延秋門)에 날아와 울고
又向人家啄大屋(우향인가탁대옥) : 또 인가로 다니며 큰 집의 지붕을 쪼아대니
星底達官走避胡(성저달관주피호) : 지붕 밑 고관(高官)들은 오랑캐를 피하여 달아나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괴이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임진년[宣祖,25年,1592] 4월 17일에 왜적(倭敵)이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이르자 조정과 민간에서는 황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갑자기 괴이한 새가 대궐의 후원에서 울다가 공중으로 날아 올라 혹은 가까워졌다 혹은 멀어졌다 하며, 단 한 마리 새 울음소리가 성 안에 가득 차서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밤낮으로 그 울음소리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와 같이 새가 운지 10일 후에 임금께서 피란길을 떠나셨고, 倭敵이 도성으로 들어와서 궁궐(宮闕)과 종묘, 사직[廟社]과 관청과 민간의 집들이 다 텅텅 비게 되었으니, 아아, 그 역시 매우 괴이한 일이라 하겠다.

또 5월에 내가 임금님을 모시고 평양(平壤)에 이르러 김내진(金乃進)의 집에 우거하였는데, 김내진이 나에게 말하기를, "연전(年前)에 승냥이[豺]가 여러 번 성 안으로 들어오고 대동강(大同江) 물이 붉고 동쪽 강변은 몹시 흐리고 서쪽 강변은 맑았었는데, 지금 과연 이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이때 倭敵은 아직 평양(平壤)에 이르지 않았는데,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좋지 않게 여겼더니, 얼마 아니하여 평양성(平壤城)이 또 함락되었다. 대개 승냥이는 곧 들짐승이라 성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이는 마치 ≪춘추(春秋)≫*3)에 '구욕새[鸜鵒]가 와서 깃들이자 여섯 마리 익새[鷁]가 날아가 버리고, 많은 순록[麋]에 물여우[蜮]가 있었다.'는 것처럼 그 반응이 없는 것이 드무니, 하늘이 인간에게 계시한 것이 현저하며 성인(聖人)이 경계한 것이 깊으니, 가히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또 임진년(1592)의 봄⋅여름 사이에 세성(歲星)*4)이 미성[尾]⋅기성[箕]을 지켰는데, 미성[尾]⋅기성[箕]은 곧 연(燕)나라 분야(分野)라서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燕나라가 같은 분야라고 말하였다. 이때 倭敵의 군사가 날로 가까워지므로 인심은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루는 임금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복별[福星]이 방금 우리나라에 있으니 倭敵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임금께서 이런 말을 빌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 뒤에 도성(都城)은 비록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마침내는 능히 옛것대로 회복하여 옛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倭敵의 우두머리인 풍신수길[秀吉]도 또 마침내는 흉악하고 반역적인 계획을 다 부리지 못하고 저절로 죽어 버렸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이는 대개 하늘의 뜻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1)두시(杜詩) : 당(唐)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 唐, 712∼770)의 시.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 그의 시는 웅혼침통(雄渾沈痛)하고, 충후(忠厚)의 정서가 풍부함.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이 있음.
*2)장안성(長安城) : 당(唐)나라 때 서울.
*3)≪춘추(春秋)≫ : 춘추시대(春秋時代)에 공자(孔子, 孔丘, 魯, 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지은 노(魯)나라의 역사서.
*4)세성(歲星) : 오성(五星)의 하나. 곧 목
 
3. 왜적(倭敵)의 간사하고 교묘한 꾀.
倭最奸巧 其用兵 殆無一事不出於詐術. 然以壬辰之事觀之 可謂工於都城 而拙於平壤也.
我國昇平百年 民不知兵 猝聞兵至 倉皇顚倒 遠近靡然 皆失魂魄.
倭乘破竹之勢 旬曰之間 徑造都城 使智不及謀 勇不及斷 人心崩潰 莫可收拾. 此兵家善謀 而賊之巧計 故曰工也.
於是 乃自恃常勝之威 而不顧其後 散出諸道 任其狂肆.
兵分則勢不得不弱 千里連營 曠日持久 所謂强弩之末 不能穿魯縞 而張叔夜所謂女眞不知兵 豈有孤軍深入 而能善其歸者 殆近之矣.
是以 天兵以四萬攻破平壤 平壤旣破 則其在諸道者 亦皆奪氣 雖京城猶據 而大勢已縮 我民之在四方者 處處要擊 賊首尾不能相救 終不得不遁 故曰拙於平壤也.
嗚呼!賊之失計 我之幸也.
誠使我國 有一將將數萬兵 相時用奇 擊斷長蛇 分其要脊 行之於平壤之敗 則其大帥 可坐致也 發之於京城以南 則將使隻輪不返矣.
如此然後 賊心驚膽破 數十百年間 不敢正視於我 而無復後慮矣.
當時我方積衰 力不能辦此 天朝諸將 又不知出此 使賊從容去來 略無懲畏 要索萬端.
於是 出於下策 欲以封貢羈麋之 可勝歎哉 可勝惜哉.
至今思之 令人扼腕.

왜적(倭敵)은 가장 간사하고 교묘하여 그 군사를 쓰는 법이 거의 한 가지 일도 남을 속이는 꾀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임진년(1592)의 일로써 본다면, 가히 서울[都城]에서는 교묘한 꾀를 썼으나 평양(平壤)에서는 졸렬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이 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倭敵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엎어지고 넘어지며,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바람에 쓰러지듯 다 넋[魂魄]을 잃고 말았다.

倭敵은 파죽지세(破竹之勢)*1)로 열홀 동안에 바로 서울까지 들이닥쳐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하여금 전략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였고, 용감한 사람으로 하여금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인심은 무너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은 병가(兵家)*2)의 좋은 꾀며 倭敵의 교묘한 계책이었다. 그러므로 서울을 빼앗는 데는 교묘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 倭敵은 스스로 항상 이긴다는 기세를 믿고서 그 뒷일은 돌아보지 않고 여러 도(道)로 흩어져 나아가 그들 마음대로 미쳐서 날뛰었다.

군사가 나누어지면 세력이 약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인 데, 천리에 진영을 연이어 쳐놓고 오랫동안 날짜를 끌고 버티었으니, 이른바 굳센 화살도 멀리 나가고 보면 끝에 가서는 노(魯)나라에서 나는 엷은 깁[魯縞]*3)도 뚫을 수 없다는 것이며, 장숙야(張叔夜)*4)의 이른바 "여진(女眞)*5)은 군사를 쓸 줄 모르는데, 어찌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왔다가 능히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거의 근사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로써 명(明)나라 군사는 4만 명으로 평양성(平壤城)을 쳐부쉈고, 평양성이 부서지자 그 여러 도에 퍼져있던 倭敵들은 역시 다 기운이 빠져서, 비록 서울은 아직도 그들이 점거하고 있었으나 대세는 벌써 위축되었다.

이럴 때 우리 백성들로서 사방에 퍼져 있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공격하니 倭敵들은 수미(首尾)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는 도망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평양성에서는 전략이 졸렬하였다는 것이다. 아아! 倭敵이 잘못한 계교는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진실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한 사람의 장수라도 있어서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시기를 보아 특별한 계교를 썼더라면 그 뱀 처럼 늘어선 것을 쳐서 끊어 놓아 그 요긴한 등성이를 나눠 놓았을 것이고, 이를 평양성이 패전할 때에 썼더라면 적의 그 우두머리 장수를 힘들이지 않고 잡았을 것이고, 이를 서울 이남에서 썼더라면 倭敵의 한 수레도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된 뒤에야 倭敵들의 마음은 놀라고 간담이 부서져서 수십 년 수백 년 동안이라도 감히 우리를 바로 보지도 못하고 다시는 뒷 염려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는 너무 쇠약하여 힘이 능히 이를 처리할 수 없었으며, 明나라 여러 장수들도 또한 이런 계책을 내 쓸 줄 알지 못하여 倭敵으로 하여금 조용히 가고 오게 해서 거의 경계하거나 두려움이 없이 온갖 일을 온갖 수단 방법으로 요구하게 하였다.
이때에 倭敵에게 대처하는 전략은 하책(下策)에서 나와서 봉작(封爵)과 조공[封貢]으로써 그들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니, 가히 탄식할 일이며 가히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에 이르러 이를 생각하여 보아도 사람으로 하여금 팔을 거머쥐고 분개하게 한다.

*1)파죽지세(破竹之勢) : 세력이 강하여 모든 적을 억누르고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
*2)병가(兵家) : 군사학(軍事學)을 연구하는 사람,또는 그런 학파(學派)를 말함.
*3)엷은 깁[노호(魯縞)] : 노(魯)나라에서 생산되던 흰 비단 이름.
*4)장숙야(張叔夜) : 송(宋)나라 휘종(徽宗, 北宋, 제8대 황제, 재위, 1082∼1100-1125∼1135) 때 사람. 자는 계중(稽仲), 시호는 충문(忠文). 금(金)나라와 싸워 휘종이 적에게 잡혀갈 때 따라가다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5)여진(女眞) : 만주(滿洲) 동부에 살던 통구스 계통의 한 족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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