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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19. 최후(最後)의 결전(決戰)./ 20. 이순신(李舜臣)의 인품(人品).
23/10/22 11:54:01 金 鍾國 조회 439
19. 최후(最後)의 결전(決戰).
十月 劉提督再攻順天賊營 統制使李舜臣 以舟師大敗其救兵於海中 舜臣死之.
賊將平行長 棄城而遁 釜山⋅蔚山⋅河東沿海賊屯悉退.
時行長築城于順天芮橋堅守 劉綎以大兵進攻不利 還順天 旣而復進攻之.
李舜臣與唐將陳璘 扼海口以逼之. 行長求援於泗川賊沈安頓吾 頓吾從水路來援. 舜臣進擊大破之 焚賊船二百餘艘 殺獲無算.
追至南海界. 舜臣親犯矢石力戰 有飛丸中其胸出背後 左右扶入帳中. 舜臣曰「戰方急 愼勿言我死.」言訖而絶.
舜臣兄子莞 素有膽量 秘其死 以舜臣令督戰益急 軍中不知也. 陳璘所乘舟爲賊所圍 莞望見揮其兵求之.
賊散去 璘使人于舜臣 謝求己 始聞其死 從椅上自投於地曰「吾意老爺生來求我 何故亡耶?」拊膺大慟 一軍皆哭 聲震海中.
行長乘舟師追跡過其營 自後逸去.
先是七月 倭酋平秀吉已死 故沿海賊屯悉退.
我軍與唐軍 聞舜臣死 連營慟哭 如哭私親. 柩行所至 人民處處設祭 挽車而哭曰「公實生我 今公棄我 何之?」道路擁塞 車不得進 行路之人 無不揮涕.
贈議政府右議政.
邢軍門謂當立祠海上 以獎忠魂 事竟不行.
於是 海邊之人 相率 爲祠 號曰愍忠 以時致祭. 商賈漁船往來過其下者 人人祭之云.

10월에 유제독(劉提督 : 유정劉綎)이 다시 두 차례 순천(順天)에 있는 왜적(倭敵)의 병영(兵營)을 공격하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倭敵의 구원병을 바다 가운데서 크게 쳐부쉈는데, 이순신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 倭敵의 장수 평행장(平行長 : 小西行長)은 성(城)을 버리고 도망하였고, 부산(釜山)⋅울산(蔚山)⋅하동(河東)의 연해 안에 둔쳤던 倭敵들도 모두 자기 나라로 물러가 버렸다. 이때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성(城)을 순천(順天)의 예교(芮橋)에 쌓고 굳게 지켰는데, 유정(劉綎)은 대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순천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뒤에 다시 나아가 이를 공격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은 明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함께 바다의 어귀를 눌러잡고 가까이 쳐들어가니, 倭敵의 장수 小西行長은 사천(泗川)에 있는 倭敵의 장수 심안돈오(沈安頓吾)에게 구원을 요구하니, 沈安頓吾는 군사를 거느리고 수로(水路)로부터 와서 구원하였는데, 이순신은 나아가 공격하여 倭敵의 배 2백여 척을 불태우고, 倭敵을 죽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때 아군은 도망하는 倭敵을 남해(南海)의 지경[노량(露梁)]까지 추격하였다. 이순신은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날아오는 총알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빠져나 갔다. 이에 좌우에 모시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순신은 말하기를,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내가 죽은 것을 말하지 말라." 하는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형의 아들 이완(李莞)은 평소에 담력과 도량이 있는 사람이라, 그는 숙부 이순신의 죽음을 숨기고는 이순신의 명령으로써 그의 영기(令旗)를 들고 싸움을 독려함이 더욱 급하니 군중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럴 때 진린(陳轔)이 탄 배가 倭敵에게 포위를 당하니, 이완은 이를 바라보고는 그 군사를 지휘하여 그를 구원하였다. 倭敵들이 흩어져 달아난 뒤에 진린은 사람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자기를 구원하여 준 것을 사례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그가 전사한 것을 알고 앉아 있던 의자 위로부터 펄썩 땅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노야(老爺 : 李舜臣)가 와서 나를 구하여 준 줄로 여겼는데, 어쩌다가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하고는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전 군사들이 다 통곡하여 그 울음소리가 바다 가운데 진동하였다.

倭敵의 장수 小西行長은 우리 수군이 추적하여 그 병영을 지나가는 때를 틈타서 뒤로부터 빠져 나와 달아나고 말았다. 이보다 먼저 7월에 倭敵의 우두머리인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바다 연변에 진을 치고 있던 倭敵들은 모두 물러가 버렸다. 우리 군사와 明나라 군사들은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연달아 모든 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자신의 어버이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슬퍼하였고, 그의 영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은 곳곳에서 제사를 베풀고는 영구차를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공(公)께서는 실로 우리를 살려놓으시더니, 지금 우리를 버려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며 길을 막아서 영구차가 지나갈 수가 없었고,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을 추증(追贈)하였다. 이때 형군문(邢軍門 : 형개邢玠)은 "마땅히 그 사당(祠堂)을 바닷가에 세워서 그 충혼(忠魂)을 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 일은 마침내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있어서 바닷가의 사람들이 서로 모여 사당을 짓고 민충사(愍忠祠)라 부르며 때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장사하는 사람들과 어선(漁船)들이 왕래할 때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20. 이순신(李舜臣)의 인품(人品).
李舜臣字汝諧 德水人.
其先曰邊 官至判府事 有直名. 曾祖曰琚 事成宗 燕山在東宮 琚爲講官 以嚴見憚 嘗爲掌令 彈劾不避 百僚憚之 有虎掌令之稱 祖百祿 以門蔭仕. 父貞 不仕.
舜臣少時 英爽不羈 與群兒戲 削木爲弓矢 遊里閭中 遇不如意者 欲射其目 長老或憚之 不敢過門.
及長善射 從武擧發身. 李氏世業儒 至舜臣始得武科 補權知訓鍊院奉事.
兵曹判書金貴榮 有孼女 欲與舜臣爲妾 舜臣不肯. 人問之 舜臣曰「吾初出仕路 豈敢托迹權門媒進耶?」
兵曹正郎徐益 有所親在訓鍊院 欲越次薦報. 舜臣以院中掌務官 執不可. 益牌招舜臣 詣庭下詰之. 舜臣辭色不變 直辨無撓. 益大怒盛氣臨之. 舜臣從容酬答 終不少沮. 益本多氣傲人 雖同僚亦憚之 難與爭辨. 是日下吏在階下 皆相顧吐舌曰「此官敢與本曹抗 獨不顧前路耶?」
日暮 益愧屈令去 識者以此往往知舜臣焉.
方在獄時 事不可測 有獄吏密語舜臣兄子芬 有賄則可免.
舜臣聞之 怒芬曰「死則死耳 安可違道求生?」其有操執如此.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中有膽氣 忘身徇國 乃其素所蓄積也.
兄羲臣⋅堯臣 皆先死 舜臣撫其遺孤如己子. 凡嫁娶必先兄子 而後及己子.
有才無命 百不一施而死 嗚呼惜哉!

이순신(李舜臣)의 자(字)는 여해(汝諧)이고,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그의 선조에 이변[邊]이라는 이는 벼슬이 판부사(判府事)*1)에 이르렀는데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증조(曾祖)인 이거[琚]는 성종(成宗)*2)을 섬겼는데, 연산(燕山)*3)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 그는 강관(講官)이 되어 엄격하므로 그(燕山) 꺼림을 당하였다. 그가 일찍이 장령(掌令)*4)이 되었을 때에 탄핵(彈劾)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으니 만조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랑이 장령[虎掌令]이라는 별명이 붙었 다. 할아버지인 이백록[百祿]은 가문의 덕으로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인 이정[貞]은 벼슬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어렸을 때 영특하고 활달하였다. 그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가지고 거리에서 놀았는데, 그 마음을 거스르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혹은 그를 꺼려 감히 그의 집 문 앞을 함부로 지나가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자라서는 활을 잘 쏘았으므로 무과(武科)*5)를 거쳐서 출세하였다. 이씨(李氏)의 조상은 대대로 유교를 숭상하여 문관을 지냈는데, 이순신에 이르러서 비로소 무과(武科)에 올라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6)에 보직되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 김귀영(金貴榮)은 자기의 딸[얼녀孼(서자얼)女 : 첩에게서 난 딸. 서녀(庶女) : 첩의 몸에서 난 딸.]이 있었는데,그를 이순신의 첩으로 만들려 하였으나 이순신은 승낙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순신은 말하기를, "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을 나왔는데, 어찌 감히 권세가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승진할 것을 도모하겠는가?" 하였다. 병조정랑(兵曹正郞) 서익(徐益)이 자기와 친한 사람이 훈련원(訓練院)에 있었는데, 그 차례를 뛰어 넘어 추천하여 보고하려고 하였다. 이순신은 훈련원장무관(訓鍊院掌務官 : 掌務官)으로서 그 불가함을 고집하니, 서익은 이순신을 패초(牌招)*7)하여 뜰 아래 세워놓고 이를 힐책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말씨와 낯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바르게 설명하며 굽히지 않으니, 서익은 크게 노하여 기승을 부리며 임하였으나,이순신은 조용히 응수하여 끝내 굽히지 않았다. 서익은 본래 오기가 많아 남을 업신여기므로 비록 동료들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를 꺼렸 으므로 그와 말다툼하기를 꺼리는 터였는데, 이날 하리(下吏)들이 섬돌 아래 있다가 모두 서로 돌아보고 혀를 내두르면서 말하기를, "이관원(이순신)이 감히 본조(本曹 : 병조兵曹) 정랑(正郎)과 항쟁을 하니, 그는 유달리 앞길을 생각지 않는 것인가?" 하였다. 날이 저물
어서야 서익은 겸연쩍게 굽혀지면서 기가 꺾여 이순신을 돌아가게 하였다. 식자(識者)들은 이 일로 해서 차츰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

이순신이 막 옥에 갇혔을 때는 일이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 옥리(獄吏)가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8)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뇌물을 쓰면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이순신이 이 말을 듣고 이분에게 노하여 말하기를, "죽으면 죽을 따름이지, 어찌 바른 도리를 어기고 삶을 구하겠느냐?" 하였다. 그가 지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아하여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한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축적한 때문이었다.

그의 형님 이희신[羲臣]과 이요신[堯臣]은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 놓은 자녀들을 자기의 아들 딸처럼 어루만져 길렀 으며, 무릇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자기 아들 딸을 보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運數 : 인간의 힘을 초월한 천운天運과 기수氣數=운수. 운명)가 없어서, 백 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하다.
*1)판부사(判府事)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약칭. 중추부(中樞府)의 종1품 벼슬.
*2)성종(成宗) : 조선조 제9대 임금. 재위 1457∼1469-1494).

*3)연산(燕山) : 조선조 제10대 임금. 곧 연산군(燕山君). 재위 1476∼1494-1506).
*4)장령(掌令) : 조선조 때 사헌부(司憲府)에 속한 관직으로 종4품 벼슬. 정원 2명.
*5)무과(武科) : 옛날 나라에서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곧 국가고시로, 무과는 조선조 제3대 太宗 8년(1408)에 설치하여 처음에는 용호방(龍虎榜)이라 이름했음.

*6)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 : 훈련원(訓鍊院)은 조선조 때 관청으로, 군사의 시재(試才)⋅무예의 연습⋅병서(兵書)와 전진(戰陣)의 강습 등을 맡아보던 곳. 봉사(奉事)는 여기에 속한 종8품 벼슬. '권지權知'는 지금의 시보(試補 : 어떤 관직에 정식으로 임명되기 전에 그 일에 실제로 종사하여 사무를 익히는 일, 또는 그 직)와 같은 뜻.
*7)패초(牌招) : 신분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서신을 보내 부르는 것.
*8)이분(李芬) : 이순신의 조카로, 통제사(統制使)가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하자, 그 명령에 따라 발상(發喪)하지 않고 그 임을 대행하여 倭敵을 격퇴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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