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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
23/11/30 19:39:14 金 鍾國 조회 273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
고구려의 건국자는 동명성왕 혹은 고주몽으로 알고 있는데, 추모왕은 다른 사람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글을 쓰고 만든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분을 추모왕이라고 적고 있다.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부여의 말이며, 추모왕의 별명과도 같은 말이다.

동명성왕은 후대의 존칭이며, 본래는 부여의 위대한 영웅 동명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동명왕과 추모왕은 다른 인물이다. 동명왕은 부여의 북쪽에 있었던 고리국에서 태어나 부여를 건국한 사람이다. 서기 60년경에 쓰여진 『논형』이란 책에는 부여의 건국 시조로서 동명왕이 분명하게 보인다. 동명왕의 탄생 이야기는 추모왕의 것과 그 이야기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물론 두 이야기의 원형은 동명왕 이야기다.

고구려 사람들이 추모왕을 존경하다 보니 부여의 영웅 동명왕의 이야기를 채용하여 추모왕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부여를 능가할 국력을 갖게 되면서 고구려측의 이야기가 주로 전해지다 보니 부여의 동명왕은 잊혀지고 나중에는 동명왕이 곧 추모왕이라고 착각하여 『삼국사기』에서 ‘추모왕〓동명성왕’이라고 잘못 기록했던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동명왕이란 칭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임금인 동명성왕이라고 불러 그에 대한 최고의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추모의 출생지는 부여다. 물론 충남 부여는 아니다. 당시 부여는 만주 남부를 가로지르는 길림합달령과 동류송화강 사이에 있는 지금의 길림, 장춘, 농안을 중심으로 사방 2천 리나 되는 나라로 오랜 역사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
고구려의 건국자는 동명성왕 혹은 고주몽으로 알고 있는데, 추모왕은 다른 사람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글을 쓰고 만든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분을 추모왕이라고 적고 있다.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부여의 말이며, 추모왕의 별명과도 같은 말이다.

동명성왕은 후대의 존칭이며, 본래는 부여의 위대한 영웅 동명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동명왕과 추모왕은 다른 인물이다. 동명왕은 부여의 북쪽에 있었던 고리국에서 태어나 부여를 건국한 사람이다. 서기 60년경에 쓰여진 『논형』이란 책에는 부여의 건국 시조로서 동명왕이 분명하게 보인다. 동명왕의 탄생 이야기는 추모왕의 것과 그 이야기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물론 두 이야기의 원형은 동동명왕 이야기다.

고구려 사람들이 추모왕을 존경하다 보니 부여의 영웅 동명왕의 이야기를 채용하여 추모왕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부여를 능가할 국력을 갖게 되면서 고구려측의 이야기가 주로 전해지다 보니 부여의 동명왕은 잊혀지고 나중에는 동명왕이 곧 추모왕이라고 착각하여 『삼국사기』에서 ‘추모왕〓동명성왕’이라고 잘못 기록했던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동명왕이란 칭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임금인 동명성왕이라고 불러 그에 대한 최고의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추모의 출생지는 부여다. 물론 충남 부여는 아니다. 당시 부여는 만주 남부를 가로지르는 길림합달령과 동류송화강 사이에 있는 지금의 길림, 장춘, 농안을 중심으로 사방 2천 리나 되는 나라로 오랜 역사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림입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동방지역 최강자는 부여였으며, 고구려는 소국에 불과했다.
추모의 어머니는 유화부인임이 분명하지만 아버지는 불확실하다. 대개 해모수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며 기록에 따라서는 단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아마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추모가 부여의 왕인 금와왕의 궁궐에서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결국 유화부인은 금와왕의 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추모를 금와왕의 아들로 보기도 어렵다. 추모는 비록 부여의 왕자들과 함께 자랐지만, 금와왕이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왕자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부여는 유목국가의 특성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다. 유목국가에서는 왕위 계승에 있어서 장남보다는 능력 있는 아들이 우선 선발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첩의 아들은 왕위 계승 문제에서는 철저히 소외된다. 유목사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재혼이 가능한 사회지만, 정실부인에 대해서는 확고한 지위와 권한이 보장되고 여성의 발언권도 강한 특성이 있다. 따라서 부여국에서 추모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추모는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고 재주가 많아 당시 부여에서 영웅, 훌륭한 전사를 뜻하는 영예로운 칭호인 주몽이란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실력 있는 추모, 하지만 왕이 될 수 없는 추모. 이럴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재주와 실력을 썩히며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는 것이다.

추모는 새로운 모험에 도전했다. 그것은 부여를 탈출해서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벤처창업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의 도전정신이 곧 대제국 고구려의 시작을 가져온 것이다.
부여를 탈출한 이야기
이제 추모왕의 어린 시절과 그가 어떻게 부여를 탈출했는지를 살펴보자.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 이규보의 작품인 『동명왕편』 등에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추모는 외모가 영특하고 힘이 세었으며,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났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숙한 면이 많았다. 부여의 금와왕에게는 대소왕자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있었는데, 추모는 이들과 사냥도 다니면서 함께 성장하였다.

부여 사람들에게 사냥은 매우 중요한 스포츠이자 생업이었다. 또한 평소에 전쟁을 준비하는 훈련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특히 귀족 자제들에게 사냥은 전쟁 지도자의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으로, 사내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사냥터에서 자신의 기량을 연마해야 했다. 사냥은 그저 혼자 활을 들고 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몰이꾼을 대동하고 짐승을 한 곳에 몰아넣고 결정적인 순간에 화살을 날려야 한다. 사냥은 곧 군사훈련이었다. 사냥실력은 젊은이들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어느 날 대소왕자를 비롯한 부여의 일곱 왕자들은 그들을 따르는 무리 40여 명과 함께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물론 추모도 사냥을 나갔지만, 대소왕자처럼 몰이꾼을 대동할 처지는 아니었다. 대소는 가장 많은 짐승을 잡아 왕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사냥의 결과는 대소의 기대와는 반대로 혼자 사냥한 추모가 최고였다. 대소왕자 일행은 사슴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추모는 홀로 많은 사슴을 잡았던 것이다. 대소는 장차 부여의 왕이 될 태자였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준 추모에 대해서 시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이 우리의 사냥감을 모두 잡아가다니, 녀석을 그냥 둘 수 없다.”

평소에도 질투심을 느꼈지만, 이날의 사냥결과는 대소뿐만 아니라 다른 왕자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수모였다. 질투심에 대소왕자 등은 추모를 잡아서 나무에 묶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서 궁궐로 돌아왔다.

그런데 더욱 대소를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사냥터에서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라고 나무에 묶어 놓았던 추모가 놀랍게도 나무를 뿌리째 뽑아 등에 지고 궁궐로 돌아온 것이다. 대소는 추모의 이런 힘과 재주가 장차 자신의 장래를 위협할 것임을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소는 아버지인 금와왕을 찾아갔다.

“대왕마마, 추모를 죽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놈은 힘이 귀신 같은 장사이고, 재주도 비상하여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뒷날 부여국 왕의 자리도 빼앗을까 두렵습니다. 부디 추모를 죽이거나 쫓아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금와왕은 자신이 좋아하는 유화부인을 의식하고 있었고, 또한 재주 있는 추모를 아꼈기 때문에 쉽게 대소의 말을 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위 계승권 문제로 대소와 추모간의 알력이 생긴다면 그것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불행한 일이 된다는 것을 금와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대소 형제가 아닌 추모가 왕이 된다면 어찌될 것인가. 그렇다면 조상대대로 이어져 온 부여의 왕실이 다른 부족장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도 했다. 부여의 왕실이 내세울 수 있는 신성한 혈통을 훼손시키고 추모를 왕위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금와왕은 고심 끝에 추모로 하여금 말의 먹이를 주는 하찮은 일을 하도록 시키면서 그가 나라에 우환이 될 인물인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추모는 대소가 밉고, 금와왕의 처사에도 속으로 크게 화가 났다.

추모는 어머니를 만나서 그동안 왕자들이 자신을 따돌렸던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 대소를 비롯한 왕자들이 저를 못살게 굴고, 금와왕마저 저에게 말의 먹이나 주는 일을 시키시니 제가 부여에서 뜻을 펼치며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냉대를 받으면서 살 수는 없으니 차라리 부여를 떠나고 싶습니다. 남쪽에는 큰 나라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나라를 세워 뜻을 이룰까 합니다. 다만 어머님 걱정이 되어서 그 동안 함부로 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그래 너의 뛰어난 재주가 부여에서 쓰이지 못하고 질투를 받는다면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나는 걱정하지 말아라. 큰 뜻을 펼치려면 좋은 말도 있어야 하고 너를 도와줄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남모르게 준비를 해두었다가 때가 되면 떠나거라.”

추모는 이후 은밀히 부여를 떠날 준비를 했다. 마침내 오이, 마리, 협부 등의 벗들과 함께 부여를 떠나 새로운 땅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자 평소 그를 두려워하던 부여의 왕자들은 군사를 보내 뒤쫓았다. 추모가 엄체수에 이르렀을 때 앞에는 강물이 가로막히고, 뒤에서는 부여의 군사들이 추격해 왔다.

『동명왕편』은 이 대목에서 추모가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지금 피난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은 이 외로운 사람을 살리어 속히 배와 다리를 마련하소서”라고 말하고 활로 물을 치니, 자라들이 떠올라 와서 다리를 이루었다고 했다. 추모는 이리하여 건널 수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쫓는 군사가 이르렀으나 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했다.

이 내용은 추모가 엄체수에 이르러 유화부인의 가문, 즉 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하백 집단의 도움을 받아 부여의 군사들을 따돌리고 남으로 도망칠 수 있던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좀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추모 일행은 단지 추모와 오이 등 몇 사람이 아니라, 부여에서 소외 받은 상당히 많은 집단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을 이끌고 추모는 남으로 내려오면서 자신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은 모둔곡에서 만난 재사, 묵거, 무골 세 사람이었다.

이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중요한 일을 하게 되는 개국공신들이다. 추모는 이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때 추모의 나이는 22세였고, 기원전 37년이라고 적고 있다.
졸본부여를 장악하라
추모가 도착한 졸본천 주변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명왕편」에서는 추모가 어떻게 졸본부여를 처리하고 고구려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추모는 어떻게 졸본 지역에서 왕이 되어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을까?

현재 졸본 지역에 남아 있는 무덤들은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부터 내려오는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인 적석총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만주 중북부에서 번성했던 부여국의 무덤은 토광묘라는 흙무덤이다. 만일 추모가 부여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졸본 지역 사람들을 굴복시키고서 나라를 세웠다면, 응당 무덤의 형식도 부여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무덤을 만드는 것은 대개 자기 조상들의 형식을 따르는 상당히 보수적인 문화이기 때문에 한 지역에서 무덤의 변화는 곧 세력의 교체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졸본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추모왕이 졸본 지역을 자신의 무리들을 이용해서 무력으로 정벌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졸본 지역에 융합되어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추모가 졸본 지역에서 만난 운명의 여인 소서노를 떠올려 보자.

소서노는 졸본 지역의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로 우태와 결혼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우태가 일찍 죽어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키우며 과부로 살았다. 그러다가 소서노는 부여에서 쫓겨온 추모와 만나 재혼을 했다. 추모는 부여에서 예씨부인과 이미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졸본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재물이 많은 소서노의 도움이 필요했다. 추모는 소서노의 내조와 재물덕에 쉽게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다른 기록에는 소서노가 졸본 지역을 다스린 졸본부여의 공주라고도 한다.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는데, 추모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사위로 삼았다. 졸본부여의 왕이 돌아가자 추모가 그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추모는 이처럼 외래인으로서 졸본 지역의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이 정당한 왕위에 올랐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자신이 물의 신인 하백의 외손이며, 하늘의 주제자인 천제의 아들, 혹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추모는 왕이 된 후,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했다. 하지만 새로 궁궐을 짓지 못하고 비류수 강가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처했다. 처음부터 대단한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졸본 지역은 그 범위가 넓지 못했고, 주변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주변국과의 경쟁이 필요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벤처창업가 추모왕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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