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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하피첩(霞帔帖)』
23/11/26 09:33:20 金 鍾國 조회 308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하피첩(霞帔帖)』
 
『몸져누운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 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病妻寄敝裙, 千里托心素, 歲久紅己褪, 悵然念衰暮,
裁成小書帖, 聊寫戒子句, 庶幾念二親, 終身鐫肺腑)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간지 10년째 되던 해,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유배지로 보내왔다. 천리 밖에서 귀양살이 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보낸 것이다.
 
고왔던 다홍치마는 오랜 세월 탓에 빛이 바래 어느새 '노을 빛'으로 변해 있었다. 다산은 이 치마를 자르고 종이를 덧대 소책자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을 적었다. 이것이 『하피첩(霞帔帖)』이다 ‘노을빛 치마로 만든 소책자’ 라는 뜻이다.
 
다산은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치마 천 조각을 보관해 뒀다. 유배를 떠날 때 8살이던 막내딸이 혼례를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다산은 부인 홍씨가 보낸 치마 자투리를 꺼내 벽걸이 그림으로 맞춤할 정도로 잘랐다. 매화 가지에 꽃을 그리고, 두 마리의 멧새도 그려 넣었다.
 
“펄펄 나는 멧새 한 쌍이 내 뜰 매화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 향기 짙으니 기꺼이 찾아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처럼 즐겁게 지내려무나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열리겠구나”
 
딸이 시집을 가서 새처럼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라는 기원을 담았다. 자신이 죄인 신세가 되어 자식들마져 폐족이 되었다. 시리고 아픈 아버지의 심경으로 딸에게 해주는 애틋한 당부일 것이다.
 
2005년 수원에서 폐지를 줍던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된 고서적이 이듬해 TV "진품 명품" 프로그램에 나타났다. 감정위원들은 깜짝 놀랐다. 문헌에는 남아 있지만 실체를 보지 못했던 정약용의 『하피첩』이었기 때문이다. 감정가 1억 원을 매겼다.
 
문화재청은 문화재로서의 그 가치를 인정해 보물 1683-2호로 지정했다. 개인 수집가에게 갔던 『하피첩』이 서울 옥션의 고서적 경매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파산한 저축은행이 갖고 있던 보물 고서적 중의 한 점이었다. 낙찰가 7억 5000만원, 『하피첩』의 새로운 주인은 국립 민속박물관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으로, 한국 철학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유학자 겸 정치가였지만, 실학자로서 법과 형사재판, 그리고 법의학에도 높은 식견이 있었으며 지리학과 의학 언어학 건축한 등에도 해박한 견해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만능 프로페셔널리스트’였다. 유배당했을 때 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비롯하여 무려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28세에 과거(대과)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한 정약용은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경기도 암행어사 등의 직책을 맡아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정조의 수원성 축조 설계에도 참여했다.

정약용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었던 것은 당시 서학으로 알려진 천주교를 믿고 전파시킨 형제들과 친인척들 때문이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다산은 서학에 관한 책을 읽었을 것이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약용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그는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형제들과 가족들은 참수 당하고 정약용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하피첩』은 불우한 천재와 그 가족의 참담한 비극적 삶에서도 훼손되지 않은 애절한 사랑의 기록이다. 『하피첩』에 얽힌 파란만장한 사연은 한 가족 뿐만 아니라 민족 수난이 얼룩으로 남겨진 흔적이라 하겠다.

다산은 1818년 9월 유배가 풀려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부인 홍씨와는 마흔에 헤어진 후 환갑을 눈앞에 둔 노인이 돼서야 다시 만났다. 고향집에서 다산은 자신이 쓴 저술을 마무리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결혼 60주년인 회혼식(1836년 2월22일)을 며칠 앞두고 다산은 부인과 함께 살아 온 파란만장한 60년을 되돌아보는 '회근시'를 썼다.
 
“육십 년 풍상의 세월 눈 돌릴 사이에 흘러,
짙은 복사꽃 화사한 봄빛이 신혼과도 같구나.
살아 이산하고 죽어 이별함은 늙음을 재촉했지만,
슬픔은 짧고 기쁨 많았기에 군은에 감격한다네.
이 밤에 목란사는 가락이 더욱 좋고,
그 옛날의 하피첩엔 먹 자국이 남았구나”
 
둘이 함께한 60년 세월의 꽃은 역시 '하피첩'이었다. 다산은 회혼일 아침에 75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부인 홍씨는 2년 뒤 다산을 따라갔다. 마재 집 뒤의 언덕에 묻힌 다산과 합장됐다.
 
다산 정약용은, ‘멸문의 화’를 당한 폐족으로, 참혹한 수모의 삶을 살면서도, 본인 스스로와 가족 그리고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엄숙하게 실천한 장엄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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