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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完 10. 심유경(沈惟敬)에 관한 이런 일 저런 일.
23/11/19 10:00:31 金 鍾國 조회 327
10. 심유경(沈惟敬)에 관한 이런 일 저런 일.
沈惟敬 自平壤出入賊中 不無勞苦. 然以講和爲名 故不爲我國所喜.
最後賊留釜山 久不渡海 李册使逃還. 中朝就差惟敬充副使 與楊使入倭國 終不得要領而回. 行長⋅淸正等 還屯海上.
於是 中國與我國 論譏4藉藉 皆歸咎沈惟敬 甚者或言惟敬與賊 同謀有叛形.
我國僧人松雲 入西生浦 見淸正 還言賊欲犯大明 所言絶悖 卽具奏天朝 聞者益怒.
惟敬知禍至 憂懼不知所出 乃貽書金命元 敍其終始以自辨 其書曰
「日月倏*5)馳 往事如昨 噫*6) 昔倭寇貴境 直抵平壤 目中已無八道矣.
老朽噬命哨探倭情 相機撫馭 得與足下 曁李體察 相會于擾攘之中.
目擊平壤迤西一帶 居民流離愁苦 如坐針氈 朝不謨夕之狀 殊可痛心.
足下身歷其事 不待老朽之喋喋者. 老朽檄召行長 相會乾伏山 約束不令西侵 聽命罔敢踰越者數月 延及大兵之至 而致平壤之克
設或彼時 老朽不來 倭乘祖公之敗 而走義州 未可知也. 平壤一道 居民不被其荼*7)毒者 貴國之幸莫大矣. 旣而倭將行長 退守王京. 總兵秀家付將三成⋅長盛等三十餘將 合兵連營 控險阨要 牢不可破.
碧蹄戰後 尤難進取 彼時判書李德馨者 謁見老朽於開城 將謂賊勢旣張 大兵且退 王京必無可望矣. 涕泣語老朽云「王京根本之地 得之可以號召諸道 乃今事勢至此 將奈之何?」
老朽云「徒復王京 若無漢江以南 諸道事勢 亦難展布.」德馨云「苟得王京 實出望外. 漢江以南 小邦君臣 自能尺寸支撑不難也.」
老朽云「我試與爾國圖之 務得王京 幷復漢江以南諸道 乃還王子陪臣 方爲全局.」德馨涕泣叩頭感激云「果得如此. 老爺再造小邦 功德不淺鮮矣.」
俄而 老朽舟次漢江 王子臨海君等 自淸正營 遣人奔語老朽云「倘得歸國 漢江以南 不拘何地 任意與之.」老朽不從.
且與倭將誓云「肯還還之 不肯還隨爾殺之 其他不必言也.」
王子孫貴國儲君 老朽敢不知重 當此之時 寧言殺之 而不肯許他事.
及至釜山 損資盡禮 多方曲意于王子 前倨慢而後恭敬. 時有緩急 事有輕重 不得已也.
數言之下 王京倭退矣. 沿途營栅遺糧 不可勝計矣. 漢江以南諸道盡得矣. 王子陪臣歸國矣.
終以一封羈縻*8) 諸酋斂手於釜山窮海之地. 候命三年 不敢妄動 續以封事議成 老朽奉命調戢.
王京復會足下暨李德馨輩云「今往封矣 倭或退矣 貴邦善後之計何如?」德馨應聲云「善後之事 小邦君臣責任也. 老爺不須掛意.」
老朽初聽其言 未嘗不奇其大有力量 大有識見 偉然一柱石也. 及今覈其事實 似覺文章功業 不相符合 老朽不能不爲李判書惜.
且如釜山竹島諸營 未聞卽撤 老朽責也. 而機張⋅西生諸處 倭兵盡渡 營栅盡焚 交割地方官 俱有甘結矣.
何乃淸正一來 不聞一戰 不折一矢 地方官抽身讓之何也?
旣言漢江以南 自能尺寸支撑 而何至已得復失若此乎?
又言善後之事 小邦責任 何不聞大計? 止有號泣闕下之一策乎?
法云「强弱不當 衆寡不敵.」老朽亦非責難于貴國諸當事.
但云「緩則治其本 急則治其標.」鍊兵修守 相時撫馭 貴國當事諸賢 亦不可寘之不問耳.
渡海以來 老朽四會貴國王 彼此問對之言 出于胸臆 合于時宜 毫無假借 毫無虛謬 國王之心 老朽之心彼此洞鑑明矣.
老朽誠謂東事至此 可無他慮. 不期貴國謀臣策士 機智百端 間事迭出 內以危言 激怒于天朝 外以弱卒 桃釁于日本.
至于松雲一番說話 則又出禮法之外 其曰「前驅伐大明.」曰「割八道 國王親自渡海歸服.」頃刻之間 二三其說 但知此言可使國王動念矣. 可激天朝發兵矣. 獨不念貴國止有八道 若盡許之 又許國王親自渡海歸服 則貴國之宗社臣民 皆爲日本矣. 又可取于二王子耶?
老朽以爲三尺之童 決不失言至此. 淸正雖橫 亦不放肆至此.
又不念我堂堂天朝 統馭外藩 自有大體 一恩一威 亦自有時. 必不肯以數百載相傳之屬國 置之度外 亦不肯縱不奉約束之逆賊 擄我藩籬 理勢然也.
老朽極不省事 至于內外親踈之別 逆順向背之情 亦人人之所易曉者 矧茲欽承勅命 調戢此事 成敗休戚 關係非輕 敢以貴國之事 蔑焉不加意耶? 又敢以日本之橫 隱然而不報耶?
足下深于大體 詳于國事 用是走書 幸足下亮我素衷 卽爲上達國王 倂使當事群僚 槩*9)知所以.
旣云仰我天朝 以爲萬全之圖 還當聽命處分 以冀無疆之福 毋徒過計 月勞而日拙也 至囑不盡.」
觀此書 王京以前 則鑿鑿可懲矣 釜山以後 未免支辭隱語
然功罪自不相揜 後之論惟敬者 當以此爲斷案 故著之云.
沈惟敬 遊說士也. 平壤戰後 再入賊中 此人之所難 卒能以口舌代甲兵 驅出衆賊 復此數千里.
末梢一事參差 不免大禍. 哀哉.
蓋平行長 最信惟敬 其在京城時 惟敬密言於行長曰「汝輩久留此不退 天朝更發大兵 已從西海來 出忠淸道 斷汝歸路. 此時 雖欲去不可得 我自平壤 與汝情熟 故不忍不言耳.」
於是行長懼 遂出城 此事 沈惟敬自言於金右相命元 而金相爲余言之如此.

심유경(沈惟敬)은 평양(平壤)으로부터 왜적(倭敵)의 진중으로 출입하느라고 노고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화(講和)를 명목으로 한 까닭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최후에 倭敵이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랫동안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이책사(李册使 : 李宗誠)가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明나라 조정에서는 沈惟敬을 부사(副使)로 삼아 양사(楊使 : 楊方亭)와 함께 倭國으로 들여보냈으나 마침내 좋은 보람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이에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淸正] 등이 도로 들어와서 해상에 주둔하였다. 이에
 中國[明나라]과 우리나라에서는 의논이 자자하게 일어나서 잘못을 모두 沈惟敬에게 돌렸고, 또한 심한 사람은 말하기를, "沈惟敬이 倭敵과 공모하여 배반하려는 형편이었다."고 까지 하였다.

우리나라의 중[僧] 송운(松雲)*1)이 서생포(西生浦)에 들어가서 가등청정(加籐淸正)을 만나보고 돌아와 말하기를, "倭敵이 명나라[大明]를 침범하려 하고, 그 말하는 것이 아주 사리에 어긋나니, 즉시 사유를 갖추어 明나라 조정에 아뢰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은 더욱 노여워하였다. 沈惟敬은 화가 미칠 것을 알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곧 김명원(金命元)에게 글을 보내 그 일의 시종(始終 :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을 서술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세월이 빨리 흘러 지나간 일들이 어제 일 같습니다. 아아! 지난날에 倭敵이 귀국의 지경을 침구하여 바로 평양(平壤)까지 이르렀으니, 그 안중에는 벌써 팔도(八道)*2)에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倭敵의 실정을 정탐하고 서로 기회를 보아 제어하며, 족하(足下 : 귀하貴下)[金命元]와 이체찰사(李 體察使 : 李元翼)를 어지러운 나라 속에서 서로 만났는데, 평양성(平壤城) 서쪽 지방 일대의 백성들이 유리(流離 : 이리저리 떠돌며 다님)하여 괴롭게 지내며 마치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아침에 저녁일을 도모하지 못할 형편에 처하여 있는 것을 목격하고 특히 마음 아프게 여겼습니 다. 족하(足下 : 金命元)도 몸소 그러한 일들을 겪었으니 나의 여러 말을 기다릴 것이 없겠습니다. 나는 小西行長을 격문으로 불러서 건복산(乾伏山)에서 만나 서쪽을 침범하지 말 것을 약속하였는데, 倭敵은 명령을 듣고 감히 어기지 못한지 몇 달을 지난 뒤에 대병(大兵)이 이르게 되고, 평양의 승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설혹 그때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倭敵은 조공(祖公 : 祖承訓)이 패전한 기회를 타가지고 의주(義州)까지 달려갔을지도 가히 알 수 없었으니 평양 한 도(道)의 백성들이 그 심한 해독을 입지 않은 것은 귀국(貴國)의 다행함이 막대한 것입니다. 얼마 뒤에 倭敵의 장수 小西行長이 서 울로 물러가서 지키고, 총병(總兵) 수가(秀家)가 거느린 장수 삼성(三成 : 石田 三成)⋅장성(長盛 : 黑田 長政) 등 30여 명의 장수들이 군사를 모으고 진영을 연결하여 험준한 곳을 지키므로 굳건하여 쳐부술 수가 없었습니다. 벽제관(碧蹄館) 싸움 뒤에는 더욱 나아가서 승리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때 판서(判書) 이덕형(李德馨)이라는 사람이 나를 개성(開城)에서 찾아보았는데, 그는 "장차 倭敵의 세력이 강성 하게 떨치 는데, 대병(大兵)이 또 물러간다면 서울은 반드시 수복할 가망이 없습니다." 하고, 울면서 나에게 이르기를, "서울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이를 수복하여야 여러 도를 호령하여 소집할 수 있는데, 지금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다만 서울을 수복하고 만약 한강(漢江) 이남을 수복하지 못한다면, 여러 도의 형세도 또한 뜻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 하니, 이덕형(李德馨)은 말하기를, "진실로 서울을 수복하는 것만도 실은 소망에 지나치는 일입니다. 한강 이남은 우리나라의 군신들이 스스로 조금씩 수복하여 지탱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그대 나라와 도모하여 힘써 서울을 수복하고, 아울러 한강 이남의 여러 도를 회복하고서, 이어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돌아오게 하여 바야흐로 나라를 온전하게 만들어 보리다."하니 , 이덕형은 눈물을 홀리고 머리를 조아리어 감격하여 말하기를, "과연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면, 노야(老爺)는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는 것으로 그 공덕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나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갔는데,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 등이 加籐淸正의 병영으로부터 사람을 파견하여 달려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혹시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떤 곳이든 거리끼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이를 주겠습니다."히였으나 , 나는 그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倭敵의 장수와 맹세하기를, "돌려보내겠거든 돌려보내고,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면 너희들 뜻 대로 죽 이든지 마음대로 하라. 그 밖의 일은 꼭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왕자는 귀국의 왕세자(王世子)인데, 난들 감히 소중한 줄 알 지 못하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차라리 죽이려면 죽이라고 말했지 다른 말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산(釜山)에 와서는 재물을 허비하고 예를 다하여 여러 방면으로 왕자에게 예를 극진히 하였는데, 전에 거만하다가 뒤에 공경해진 것은 때에 완급함이 있고, 일에 경중이 있어 부득이 한 짓이라고 여겨집니다. 몇 마디 말 끝에 서울에서 倭敵이 물러갔는데 연도의 영책(營栅)과 남기고 간 군량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한강 이남 여러 도(道)는 다 수복하였고, 왕자와 배신도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한 통의 서신으로써 적군을 견제시켜 倭敵의 우두머리들은 손발이 부산(釜山)의 막다른 바닷가에 묶인 채 명령을 기다린지 3년 동안 감히 망령되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계속하여 봉공(封貢)하는 일의 의논이 결정되어 나는 명령을 받들어 타결하러 倭國으로 가게 되었습 니다.

그때 서울에서 다시 족하(귀하 : 金命元)와 이덕형 등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지금 倭國에 가서 봉공을 하겠는데, 倭敵이 혹시 물러가면 귀국 이 뒷일을 잘 처리하는 계교는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이덕형은 그 말에 응하여 말하기를, "뒷일을 잘 처리하는 일은 우리나라 군신들이 맡을 책임이니, 노야(老爺)는 꼭 괘념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 큰 역량이 있고 큰 식견이 있어 위대한 인물임을 기특하게 여겼는데, 지금에 이르러 그때 사실을 조사하여 본즉, 그 문장(文章)과 공업(功業)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것 같으 므로 나는 판서 이덕형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부산(釜山)⋅죽도(竹島)의 여러 병영이 곧 철거되지 않은 것은 나의 책임이나 기장(機張)⋅서생포(西生浦) 등 여러 곳에서는 倭敵들이 다 건너가고, 병영 울타리[營柵]도 다 불타버리고, 지방관(地方官)에게 땅을 돌려 주도록 하는 감결(甘結)*3)이 모두 있었다고 합니다.

어째서 加籐淸正이 한 번 건너와서 한 번 싸웠다는 말도 들리지 않고, 한 개의 화살을 꺾지도 않았는데도 지방관이 몸을 빼어 땅을 양보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미 한강 이남은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수복하여 지탱해 갈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미 수복하여 놓은 것도 이와 같이 잃어버리는 데 이르게 하는 것입니까? 또 뒷일을 잘 처리한다는 일은 우리나라의 책임이라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큰 계교 를 들려 주지 아니하고 다만 궐하(闕下 : 明나라 조정)에 다가가서 울부짖는 한가지 계책뿐입니까? 병법에 이르기를, "힘의 약한자는 강한자 에 당하지 못하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에게 대적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어려운 일을 귀국의 여러 당사자들에게 책임지우 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말하자면, "사태가 완만할 때는 그 근본을 다스리고, 급박할 때는 그 당면 문제를 다스린다."고 하였으니, 군사를 훈련하여 잘 지키고, 때를 보아서 적을 제어해야 하는데도 귀국의 당사자 여러분들도 역시 이를 그대로 놓아두고 그 책임을 묻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다
를 건너온 이래로 나는 네 번이나 귀국의 임금을 만나서 피차간에 묻고 대답하는 말이 가슴속에서 기탄없이 나왔고, 또 때에 적합하여 조금 도 거짓이나 꾸밈이 없었고 조금도 헛된 것이나 잘못됨이 없었습니다. 임금의 마음과 이 사람의 마음이 피차간에 환하게 트이고 분명하였 습니다.

나는 진실로 "동국(東國 : 조선)의 일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히 다른 염려는 없을 것이다."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도 귀국의 모 신(謨臣)과 책사(策士)는 온갖 기지를 써서 이간하는 사건을 번갈아 만들어 안으로는 위험한 말로써 明나라 조정을 격노하게 만들었고, 밖 으로는 약한 군사로써 日本에 대해 싸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송운(松雲)의 한 마디 설화에 이르러서도 또 예법(禮法) 밖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너희를 앞세워 군사를 몰고 가서 明나라를 치려 한다."라고도 말하고, "팔도(八道)를 갈라주고, 임금이 친히 바다를 건너와 항복하려 한다."라고도 말하는 등 잠깐 동안에 두세 가지 그런 말을 하였는데, 이는 다만 이 말이 임금으로 하여금 생각을 내어 움직이게 하고, 明나라 조정을 격동시켜 구원병을 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만을 알뿐, 귀국은 다만 팔도(八道)가 있을 뿐인데, 만약 이를 다 주기로 허락하고, 또 임 금이 친히 바다를 건너가 항복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귀국의 종묘사직[宗社]과 백성들도 다 日本의 것이 되는데, 또 어찌 두 왕자를 돌려올 지 이를 생각하지 않으오리까?

나는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결코 실언(失言)이 이에 이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가등청정[淸正]은 비록 횡포하더라도 또한 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 당당한 明나라 조정이 외번(外藩 : 국경 밖의 자기 나라 속지屬地. 제왕緒王⋅제후諸侯의 봉국封國)을 통솔⋅제어하는데 스스로 큰 체통이 있으므로, 한 번 은혜를 베풀고 한 번 위엄을 부리는 것도 역시 자연 때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수백 년 동안 서로 전하여 오던 속국(屬國)을 도외시하여 관계를 그냥 내버려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약속을 받들지 않는 역적[日本]을 놓아서 우리의 번국(藩國 : 朝鮮)을 노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 당연한 도리라 하겠습니다.

나는 극히 일을 살피지는 못하였으나, 내외(內外) 친소(親疎 : 친함과 버성김(벌어져 틈이 있다. 사귀어 지내는 사이가 탐탁하지 않다)의 분별과 역순(逆順), 향배(向背 : 좇음과 등짐. 복종과 배반)의 인정에 이르러서는 역시 사람마다 쉽게 깨닫는 것인데, 하물며 황제의 칙명(勅命)을 받들고 이 일을 조정함에 있어서 그 성패(成敗)와 휴척(休戚 : 평안함과 근심 걱정)에 관계가 가볍지 않은지라, 감히 귀국의 일을 업신여기거나 뜻담아 두지 않으리이까? 또 감히 日本의 횡포를 숨겨두고 알려주지 않으리이까? 족하(足下 : 金命元)는 큰 체통을 이해하는 데 깊으시고, 나라의 정사를 다스리는 데 자세하시므로 이 글을 보내는 것이오니, 행여 족하가 내 평소의 충심을 잘 살펴서 곧 이러한 사정을 임금에게 아뢰고, 아울러 당사 관료들로 하여금 그 까닭을 대략이라도 알도록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미 이르기를, "우리 明나라 조정을 우러러 아주 온전한 계획을 도모하며, 마땅히 처분함을 들어서 다함이 없는 행복을 바란다."고 하였 으니, 다만 잘못된 계교로써 늘 수고하고 졸렬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하면서 뜻을 다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 글을 본다면
, 서울을 수복한 이전의 사실은 말이 조리에 맞아서 가히 앞뒤가 분명하게 맞아 들어가지만, 부산(釜山) 이후의 사실들은 섞갈린 말과 숨기 는 말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과 죄는 저절로 서로 가려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뒷날에 沈惟敬을 논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 글로써 단안을 삼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기록하여 두는 것이다.

심유경(沈惟敬)은 유세(遊說)하는 선비였다. 평양성(平壤城) 싸움 뒤에 두 번이나 적진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어렵게 여기는 것인데, 그는 마침내 능히 말로써 군사를 대신하여 많은 倭敵을 쫓아내고, 이 수천 리의 땅을 수복하였던 것이다. 그는 맨 끝에 한 가지 일이 어긋나서 큰 화(禍 : 사형)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대개 평행장(平行長 : 小西行長)은 沈惟敬을 가장 신임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에 沈惟敬은 비밀히 小西行長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오래도록 여기[서울]에 머물러 물러가지 않아서 明나라 조정에서는 다시 대군을 일으켜 이미 서해(西海)를 통해서 들어왔으니 충청도로 나와서 너희들이 돌아갈 길목을 끊어 놓을 것이다. 이때는 비록 가려고 해도 뜻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평양성(平壤城)에서부터 너와 정이 들어 친숙한 까닭으로 말하여 주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했다. 이에 小西行長은 두려워하여 드디어 서울을 떠나가 버렸다. 이 일은 심유경(沈惟敬)이 스스로 우정승[右相] 김명원(金命元)에게 말한 것이 고, 또한 김정승[金相 : 金命元]이 나에게 그 사실을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1)송운(松雲, 1544∼1610) : 조선조 宣祖 때의 고승(高僧). 속성은 풍천 임씨(豊川任氏),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사명당(泗溟堂),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법명은 유정(惟政). 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뒤에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을 따라 明나라 구원병과 더불어 倭敵을 쳐 평양성(平壤城)을 수복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함께 의령(宜寧)에 내려가 전공을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丁酉再亂 때에도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전공을 세웠으며, 또 日本으로 건너가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 명을 돌려오는 등 애국적인 활약이 컸다. 저서에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과 ≪사명집(泗溟集)≫이 있다.

*2)팔도(八道) : 조선조 때의 지방행정구역. 국초(國初 : 太宗 때)에 전국을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로 나눴는데, 그 말엽(末葉 : 古終 때, 1896)에 13도로 개편하였다.
*3)감결(甘結) : 조선 때,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에 보내던 공문.
*4)기(譏) : 나무랄 기. 꾸짖다. 간하다. 충고하다. 원망하다. 싫어하다. 나무람. 조사하다. 살피다. 간체 讥.
*5)숙(倏) : 倏의 속자. 갑자기 숙. 문득. 매우 짧은 시간. 개가 재빨리 내닫는 모양. 빛. 빛나다. 본자 儵 속자 倐.

*6)희(噫) : 아! 감탄. 탄식. 한탄 등의 소리.
*7)도(荼) : 씀바귀 도. 차다. 도독(荼毒) : ➀고통. 해악(害惡). ②고통을 줌. 학대함. 荼는 씀바귀. 毒은 해독(害毒)을 주는 것.
*8)기미(羈縻) : 잡아 맴. 자유를 구속하고 억압함. 羈 굴레 기. 재갈. 잡아매다. 縻 고삐 미.
*9)개(槩) : 평미레 개. 慨와 동자. 평목(平木) : 곡식을 담을 때 위를 밀어 고르게 하는 방망이. 누르다. 억압하다. 저울. 달다. 대개. 대강. 씻다. 느끼다. 절개. 절조. 경치. 동자 槪. 동자 杚. 속자 概. 간체 概.
 ***그동안 징비록을 읽어주신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원문은 朋友인  萬峰 丁 敏榮이  수집하여 작성한
    것을 자유게시판에 싣게되었습니다.  愼齋  金 鍾國  拜上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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