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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8. 임진강(臨津江)에 부교(浮橋)를 가설함/ 9. 훈련도독(訓練都督)을 설치함.
23/11/13 16:53:54 金 鍾國 조회 326
8. 임진강(臨津江)에 부교(浮橋)를 가설함.
癸巳正月 天兵發平壤 余在軍前先行 時臨津氷泮不可渡. 提督連遣人 督造浮橋.
余至金郊驛 見黃海道守令 率吏民候餉大軍者滿野.
余召牛峰縣令李希愿 問所率邑人幾何? 曰「近數百.」
余分付曰「爾速領邑人 登山採葛 明日會於臨津江口 不可失期.」
希愿去 翌日 余宿開城府 又明日曉 馳至德津堂 見江氷猶未盡解 冰上流澌半身許 下流舟艦不得上.
京畿巡察使權徵⋅水使李蘋 長湍府使韓德遠 及倡義秋義軍千餘人 集江面. 皆束手無計.
余令呼牛峰人 納葛綯爲巨索 大數圍 長可橫江.
江南北岸 各立兩柱相對 其內偃*3)置一橫木 引巨索十五條 鋪過江面 兩頭結橫木 江面旣濶遠 索半沈水不能起. 衆曰「徒費人力.」
余令千餘人 各持短杠二三尺 穿葛索極力回轉數周 互相撑起 排比如櫛. 於是 衆索緊束 高起穿窿 儼然成橋樣. 刈細柳鋪其上 厚覆以草 而加之土.
唐軍見之大喜 皆揚鞭馳馬而過 炮車軍器 皆從此渡.
旣而渡者益多 絞索頗緩近水 大軍由淺灘以渡 而無責焉.
余念其時 倉卒備葛不多 更倍之得三十條 則加緊無緩矣.
後見南北史 齊兵攻梁主巋 巋與周總管陸騰拒之 周人於峽口南岸 築安蜀城 橫引大索於江上. 編葦爲橋 以渡軍糧 正是此法.
余自謂偶思得之. 不知古人已行 爲之一笑. 因記其事 以爲他日應猝之助云.

계사년[宣祖 26年, 1593] 정월에 명(明)나라 군사가 평양(平壤)을 출발하므로 나는 그 군사보다 앞서서 떠났다. 이때 임진강(臨津江)에는 얼음이 풀려서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제독(提督 : 李如松)이 연달아 사람을 파견하여 부교(浮橋)를 만들라고 독촉하였다. 내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황해도(黃海道) 수령(守令)이 아전(衙前)과 백성을 거느리고 대군(大軍 : 明나라 군사)에게 식사를 대접하느라고 들판에 가득 찬 것을 보았다. 나는 우봉현령(牛峰縣令) 이희원(李希愿)을 불러 "거느리고 있는 고을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물으니, 그는 "수백 명에 가깝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에게 분부하기를, "그대는 빨리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가서 칡덩굴을 뜯어 가지고 내일 나와 임진강 어귀에서 만나도록 하되, 때를 어겨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이희원[希愿]은 곧 물러갔다. 이튿날 나는 개성부(開城府)에서 자고, 또 그 다음날 새벽에 말을 달려 임진강 북쪽 나루터의 덕진당(德津堂)에 이르렀는데, 보니 강의 얼음이 아직 다 풀리지 않았고, 성에*1)[유시(流澌) : 얼음이 녹아서 흐름]가 반 길쯤이나 흐르고 있어서 하류의 배가 올라올 수 없었다. 이때 경기도순찰사(京畿道巡察使) 권징(權徵)⋅수사(水使) 이빈(李蘋)⋅장단부사(長湍府使) 한덕원(韓德遠)과 창의추의군(倡義秋義軍) 천여 명이 강가에 모였으나 다 어찌할 계교가 없었다. 나는 우봉현(牛峰縣) 사람을 부르도록 영(令)을 내려 칡으로 새끼를 꼬아 들이게 하여 큰 밧줄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두어 아름이나 되고 길이는 강물을 건너 놓을 만하였다.

이에 강의 남쪽과 북쪽의 언 땅에 각각 두 개의 기둥을 세워 서로 마주보게 하고, 그 안에 하나의 가름대 나무를 뉘어 놓고 큰 새끼 밧줄 열 다섯 가닥을 땋아 강물 위에 늘여서 양쪽 머리를 가름대나무에 동여매었는데, 강면이 넓고 멀어서 새끼밧줄이 반쯤 물에 잠겨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쓸데없이 인력만 소비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천여 명으로 하여금 각각 2, 3척쯤 되는 짧은 막대기를 가지고 칡새끼줄을 뚫어 꿴 다음 힘을 다하여 몇 바퀴를 돌리고 서서 버티어 일으키게 하였더니 마치 빗살처럼 알맞게 늘여졌다. 이에 많은 밧줄로 잘 엮어 묶은 다음 높이 일궈세우니 구부정한 활처럼 공중에 놓여 엄연한 다리 모양이 되었다. 다음에 가는 버드나무를 베어 그 위에 깔고 풀을 두껍게 덮고 흙을 깔아 다져 놓았다.

이렇게 다리가 이룩되자 明나라 군사는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다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지나가고 포거(砲車)와 군기(軍器)도 다 여기를 지나 건너갔다. 조금 뒤에 건너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자 엮어 묶은 새끼줄이 자못 늘어져서 물에 가까워졌는데, 대군은 얕은 여울을 따라 건넜으므로 나무랄 것이 없었다. 나는 생각해 보니, 그때 갑작스레 칡을 준비한 것이 많지 않았으나, 다시 그 배쯤 구하여 30가닥쯤 만들었다면 새끼밧줄이 더 잘 엮어져서 늘어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뒤에 남북사(南北史)를 보니, 제(齊)나라 군사가 양(梁)나라 임금[梁主] 귀(巋)*2)를 치니, 그는 주(周)나라 총관[周總管] 육등(陸騰)과 함께 이를 막았는데, 周나라 사람들은 협구(峽口)의 남쪽 언덕에 안촉 성(安蜀城)을 쌓고서 가로 큰 새끼줄을 강 위에 당겨 매고 갈대를 엮어 다리를 만들고 군량을 건너 옮겼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범이 었다.

나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우연히 생각하여 이 법을 깨달았으나, 옛날 사람이 이미 행하고 있던 일을 알지 못하였구나." 하면서 한번 웃었다. 인하여 그 일을 기록하였는데, 다른 날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긴다.
*1)성엣장 :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얼음덩이. 유빙(流氷). 준말로 '성에'라 함.
*2)귀(巋) : 험준할 귀. 높고 가파른 모양. 홀로 우뚝 서 있는 모양. 여기서는 양(梁)나라 임금 귀(巋)를 일컬음.
*3)언(偃) : 쓰러질 언. 한쪽으로 기울어지다. 쉬다. 숨기다. 괴로워하다. 편안하다. 방죽. 보洑.
 
9. 훈련도독(訓練都督)을 설치함.
癸巳夏 余病臥漢城墨寺洞 一日 天將駱尙志 訪余于臥次 問病甚勤.
因言「朝鮮方微弱 而賊猶在境上 練兵禦敵 最爲急務 宜乘此天兵未回 學習練兵法 以一敎十 以十敎百 則數年間 皆成精鍊之卒 可以守國.」
余感其言 卽馳啟于行在. 因使所帶禁軍韓士立 招募京中 得七十餘人. 往駱公處請敎 駱撥帳下曉陣法張六三等十人爲敎師 日夜鍊習槍劍筤筅等技.
旣而余下南方 其事旋廢. 上見狀啓 下備邊司 令別設都監訓鍊 以尹相斗壽 領其事.
其年九月 余自南召赴行在 迎駕於海州 扈從還都 至延安 更命余大領都監寺.
時都城飢甚 余請發龍山倉唐粟米一千石 日給人二升 應募者四集.
都監堂上趙儆 以穀小不能給 欲設法限節. 置一巨石 令願募者 先擧石試力 又令招越土墻丈許 能者許入 不能者拒之. 人飢困無氣 中格者十一二 或在都監門外 求試不得 顚仆而死.
未久 得數百千人 入把摠哨官 分部領之. 又欲敎鳥銃 而無火藥.
有軍器寺匠人大豐孫者 以入賊陳 多煮火藥與賊 囚江華將殺之.
余特貸其死 令煮焰焇贖罪 其人感懼 爲之盡力 一日所煮幾十斤. 逐日分諸各部 晝夜習放 第其能否而賞罰之 月餘能中飛鳥. 數月後 與降倭及南方之善鳥銃者 相較無不及 而或過之.
余上箚請「措置軍糧 益募兵滿一萬 置五營 營各隸二千 每年半留城中敎鍊 半出城外 擇閒曠肥饒地 屯田積粟 輪還遞代 則數年之後 兵食之源厚 而根本固矣.」
上下其議 兵曹不卽擧行 卒無見效.

계사년(1593) 여름에 나는 병으로 서울[漢城] 묵사동(墨寺洞)에 누워 있었는데, 하루는 명(明)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가 내 누워 있는 곳을 방문하고 문병함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지금 미약한데 왜적(倭敵)은 아직도 지경(地境) 안에 있 으니, 군사를 훈련하여 적을 막는 일이 가장 급선무가 될 것 같습니다. 마땅히 明나라 군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이때를 타서 군사를 훈련 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서 한 사람으로 열 사람을 가르치고, 열 사람으로 백 사람을 가르친다면 몇 해 동안에 다 잘 훈련된 군사가 되어 가히 나라를 지킬 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에 감동되어 곧 이 사실을 행재소(行在所)에 빨리 아뢰고, 인하여 데리고 있던 금군(禁軍) 한사립(韓士立)으로 하여금 서울 안에 있는 군사를 불러 모아 70여 명을 얻어 낙공(駱公 : 駱尙志)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군사훈련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駱尙志는 막하(幕下) 사람으로서 진법(陣法)을 잘 아는 장육삼(張六三) 등 10명을 뽑아 교사(敎師)로 삼아 밤낮으로 창검(槍劎)*1) 낭선(筤筅)*2) 등의 기술을 연습시켰다. 얼마 뒤에 내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자 그 일도 이내 그만두고 말았는데, 임금께서는 내 장계(狀啓)를 보시고 비변사(備邊司)에 분부하시어 따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하도록 명령하시고, 정승 윤두수(尹斗壽)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해(1593) 9월에 나는 남쪽으로부터 행재소로 불려갔다가, 임금을 해주(海州)에서 맞이하여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연안(延安)에 이르러 다시 나에게 훈련도감(訓鍊都監)*3)의 일을 대신 맡아 다스리라고 분부하셨다. 이때 서울[都城]에는 기근이 심하였으므로 나는 용산창고[龍山倉]에 있는 중국 좁쌀[唐栗米] 1천 석(石)을 내줄 것을 청하여 날마다 군사 한 사람에게 두 되[升]씩을 주었는데,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도감당상(都監堂上)*4) 조경(趙儆)은 곡식이 적어서 다 받아 줄 수 없었으므로, 법을 만들어 이를 조절하려고 하여 큰 돌 하나를 놓아두고 군사에 응모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그 돌을 들게 하여 힘을 시험하고, 또 한 길쯤 되는 담장을 뛰어넘어 보게 하여 할 수 있는 사람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할 수 없는 사람은 거절하니, 사람들이 굶주리고 피곤하여 기운이 없으므로 합격하는 사람이 10명에 한두 명 꼴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도감문(都監門) 밖에서 시험을 보려다가 뜻대로 안 되어 쓰러져 죽기까지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군사 수천 수백 명을 얻어서 파총(把總)*5)⋅초관(哨官)*6)을 세우고 부서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또 조총(鳥銃) 쓰는 법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화약(火藥)이 없었다. 이때 군기시(軍器寺)에 장인(匠人) 대풍손(大豐孫)이라는 자가 있었는데,그는 적진으로 들어가서 많은 화약을 만들어 倭敵에게 주었으므로 강화도(江華島)에 가두어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나는 특별히 그 죽음을 면하게 하여 주면서 대신 염초(焰焇)를 많이 구워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사람은 감격하고 두려워하여 이를 만드는 데 힘을 다해 하루에 구워내는 분량이 몇 십 근이나 되었으므로 각 부서에 나눠주어 밤낮으로 총 쏘는 기술을 익히게 하고, 그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가려서 이를 상 주고 벌 주고 하였더니, 한달 남짓하여 능히 날아가는 새를 맞히었고, 몇 달 뒤에는 항복한 倭敵 및 남쪽 지방의 조총 잘 쏘는 사람과 서로 비교하여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사람은 그보다 낫기도 하였다.

나는 임금에게 차자(箚子)*7)를 올려 청하기를, "군량을 조처하면서 더욱 군사를 모집하시어 1만 명이 차면 다섯 군영[五營]을 설치하여 영(營)마다 각각 2천 명을 예속시키고, 해마다 그 반은 성 안에 머물러 두어 군법을 훈련시키고, 그 반은 성 밖에 내놓아 넓고 기름진 땅을 골라서 둔전(屯田)*8)을 갈아 곡식을 저장하게 하시되, 이를 번갈아 대체한다면 몇 해 뒤에는 군사 식량의 근원이 튼튼하여지고 나라의 근본도 굳건하여질 것입니다."라고 청하였다. 임금께서는 그 의논을 조정에 내려보냈으나 병조(兵曹)는 이를 곧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1)창검(槍劎) : 창과 칼. 곧 보병(步兵)의 무기.
*2)낭선(筤筅) : 창의 일종으로, 가지가 붙은 대나무 자루로 된 창.
*3)훈련도감(訓鍊都監) : 선조 26년(1593)에 창설된 기구. 도성(都城) 수비를 맡았다. 명(明)나라 척계광(戚繼光, 明, 1528∼1588)의 저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의 군병훈련술을 본떠서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을 훈련 양성했다.
*4)도감(都監) : 나라에 큰일이 있올 때 그 일을 맡아보게 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 당상(堂上) : 조선조 때 관계(官階), 곧 당상관(堂上官) 동반(東班 : 文官)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과 서반(西班 : 武官) 정3품 이상의 장군을 말함.

*5)파총(把總) : 각 군영(軍營)의 종4품 무관 벼슬.
*6)초관(哨官) : 각 군영(軍營)에서 군대 1초(哨)를 거느리는 위관(尉官). 종9품. 1초(哨)는 1백 명 정도임.
*7)차자(箚子) : 지난날,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을 이르던 말.
*8)둔전(屯田) : 조선조 때 전답을 군졸⋅평민들에게 개간시켜 거기서 나오는 수확물을 지방관청의 경비 또는 군량과 국가 경비에 쓰도록 마련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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