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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6. 진주성(晉州城) 포루(砲樓)의 역사(役事) 문제./ 7. 왜적(倭敵)을 막아낼 방도를 강구함
23/11/07 10:21:09 金 鍾國 조회 366
6. 진주성(晉州城) 포루(砲樓)의 역사(役事) 문제.
余在安州時 友人金士純 爲慶尙右監司 有書云「欲修治晉州 爲死守計.」
先是賊嘗一犯晉州 不勝而退.
余答士純云「賊早晩必來 報來則必用大勢 守比舊差難 惟當建砲樓以待之 可無患.」遂於書中 詳言其制.
癸巳六月 余聞賊復攻晉州 謂辛從事慶晉曰「晉事甚危 幸而有砲樓 則猶可支 不然難守矣.」
旣而下陜川 聞晉已陷.
丹城縣監趙君宗道 亦士純友也. 爲余言「前年與士純 同在晉州 士純見余書 踊躍稱奇 卽與幕下士友數人 巡城因其地形 以爲當設於八處 督令伐木 浮江而下. 州民憚其役 乃曰「前無砲樓 猶守卻賊 今何用勞人?」士純不聽 材已具始役有日 適士純病不起 其事遂寢云.」相與一痛而罷.
嗚呼! 士純之不幸 卽一城千萬人之不幸也 斯固數也 非人力之所能容.

내가 안주(安州)에 있을 때 우인(友人) 김사순(金士純 : 金誠一)*1)이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었는데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진주성(晉州城)을 잘 수리하여 죽기를 기하고 지킬 계교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倭敵은 일찍이 한 번 진주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물러갔었다. 나는 김사순에게 답서를 보내 이르기를, <倭敵은 조만간에 반드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倭敵이 지난 해의 원한을 갚으려고 쳐들어 온다면 반드시 많은 군사를 사용할 것이니, 성을 지키는 일이 옛날과 비교하여 좀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포루(砲樓)를 세워 이에 대비하여야만 가히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는 서신 속에 그 제도를 상세하게 말하였다.

계사년(1593) 6월에 나는 倭敵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에게 일러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일이 매우 위태로운데 다행히 포루(砲樓)가 있으면 그래도 지탱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얼마 있
다가 합천(陝川)으로 내려갔다가 진주성이 벌써 함락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단성현감(丹城縣監) 조종도군(趙宗道君) 또한 김사순의 벗인데 나에게 말하기를, "지난 해에 김사순과 함께 진주성에 머물러 있을 때 김사순이 내 서신을 보고 좋아 날뛰면서 기이한 계교라고 칭찬하면서 즉시 그 막하(幕下)에 있는 벗 몇 사람과 성(城)을 돌아보고, 그 형세에 따라 꼭 여덟 곳에 포루를 설치할 것을 생각하고는, 나무를 베어 강물에 띄워 내려 보내게 하였더니, 고을 백성들이 그 역사를 꺼리며 말하기를, "전에는 포루(砲樓)가 없어도 오히려 성을 지키고 倭敵을 물리쳤는데, 지금은 애써 사람을 수고롭게 들볶습니까?" 하였으나, 김사순은 듣지 않고 포루를 만들 재목을 이미 갖추고 역사를 시작한지 얼마가 지났는데, 마침 김사순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그 일은 드디어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하므로, 서로 함께 이것을 아주 애석하게 여기면서 헤어졌다. 아아! 김사순[士純]의 불행함은, 곧 한 성[진주성] 천만 사람의 불행이었다. 이것은 진실로 운수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능히 용납될 것이 아니었다.

*1)김사순(金士純) : 김성일(金誠一)의 字.
 
7. 왜적(倭敵)을 막아낼 방도를 강구함.
壬辰四月 賊連陷內郡 我軍望風潰散 無敢交鋒者.
備邊司諸臣 日聚闕下 講備禦之策 而無以爲計.
或建議曰「賊善用槍刀 我無堅甲可禦 故不能敵. 當以厚鐵爲滿身甲 長不見物 被入賊陣 則賊無隙可刺 而我可勝矣.」衆曰「然.」於是 大聚工匠 晝夜打造.
余獨以爲不可曰「與賊闘 雲合鳥散 貴於捷疾. 旣被滿身厚甲 其重不可勝 身且不能運 何望殺贼?」數日 知其難用 遂罷.
又臺諫請見大臣言計 其中一人 盛氣斥大臣無謀 座上問有何策. 對曰「何不於漢江邊 多設高棚 使賊不得上 而俯射之耶?」
或曰「賊之鐵丸 亦不得上耶?」其人無語而退. 聞者傳以爲笑.
嗚呼!兵無常勢 戰無常法 臨機制變 進退合散 出奇無窮 只在於將而已.
然則千言萬計皆無用 惟在於得一將才 而鼂錯所陣三策 尤係切耍 闕一不可. 其餘紛紛者何補焉?
大抵國家擇將於無事之日 任將於有事之際 擇之貴精 任之貴專.
當時慶尙道水將 則朴泓⋅元均 陸將 則李珏⋅曹大坤 已非才選.
及其變生 巡邊使⋅防禦使⋅助防將等 皆自朝廷受命而來. 各持專斷之權 自行號令 進退由意 而不相統屬 正犯輿尸之戒 事何由得濟? 且所養非所用 所用非所養 將卒不相知.
皆兵家大忌 奈何前車旣覆 後不知改 至今尙循此 塗轍如此 而望其無事者 特幸耳.
言之 其說甚長 非可一二盡.
嗚呼危哉!

임진년(1592) 4월에 왜적(倭敵)은 연달아 육지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니, 우리 군사는 그 위풍만 바라보고도 그만 무너지고 흘어져버려서 감히 맞싸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비변사(備邊司)의 여러 신하들은 날마다 대궐에 모여서 倭敵을 막아낼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아무런 계책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건의(建議)하여 말하기를, "倭敵은 창칼[槍刀]을 잘 쓰는데, 우리는 굳건한 갑옷으로 막아낼 만한 것이 없 는 까닭으로 능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두꺼운 쇠를 가지고 온몸을 둘러 쌀 갑옷을 만들어 머리까지 그 형체가 보이지 않도록 하며 , 이것을 입고 倭敵의 진중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倭敵들은 가히 찌를 만한 틈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가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그렇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공장(工匠)을 많이 모아서 밤낮으로 철갑옷을 만들었다. 나는 홀로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倭敵과 싸울 때는 구름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흩어지기도 하여 아주 빠른 동작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온몸을 둘러싼 두꺼운 철갑을 입는다면 그 무게를 이겨 낼 수도 없고 몸도 또한 잘 움직일수도 없을 터이니, 어떻게 倭敵을 죽이기를 바라겠는가?" 하였더니, 며칠 후에 그것이 쓰기 어렵겠음을 알고 드디어는 그만두었다. 또 대간(臺諫)은 대신을 청하여 만나보고 계책을 말하였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성을 내면서 대신들의 계책이 없음을 지탄하였다.

그래서 좌상(座上)께서 "무슨 계책이 있는가?"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한강(漢江)가에 높은 누각을 많이 설치하고 적으로 하여금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고는, 높은 데서 적을 굽어보고 활을 쏘도록 만들지 않습니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倭敵의 총알[鐵丸]도 역시 올라올 수 없다던가?" 하니, 그 사람은 말없이 물러가 버렸는데,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서로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아! 군사는 일정한 형세가 없고, 전투는 일정한 법이 없는 것으로, 때에 따라 사변에 알맞은 전법을 마련하여 나아가고 물러서고 모이고 흩어지며 기묘한 계교를 내어 쓰는 것이 다함이 없어야 하겠는데, 이는 다만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의 능력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본다면 천 마디의 말이나 만 가지의 계교가 다 소용이 없고, 오직 한 사람의 뛰어난 장수를 얻는 데 있겠고, 그리고 조조(鼂錯)의 진술한 바 세 가지 계책[첫째로 지형(地形)을 얻는 것, 둘째로 군사들이 명령을 잘 복종하고 잘 익히는 것, 셋째로 병기가 날카로운 것]은 더욱 절실이 요망되는 것이므로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 나머지 어지러운 것들이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저 국가에서는 좋은 장수를 사변이 없을 때에 뽑아 두었다가 그런 장수를 사변이 있을 때에 임명하여야 될 것으로, 이를 뽑는 데는 정밀함을 귀중히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경상도(慶尙道) 수군장군[水將]은 박홍(朴泓)과 원균(元均)이고, 육군장수[陸將]는 이각(李珏)과 조대곤(曹大坤) 이었는데, 이들은 벌써 장수감으로 뽑힌 사람이 아니었다.

그 변란(變亂 :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순변사(巡邊使)와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 등이 모두 조정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내려  왔었는데, 각각 마음대로 결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저마다 호령을 내리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을 뜻대로 행하여 통솔이 되지 않아 서 바로 '전쟁에 패하면 수레에 시체를 싣는다.'는 경계를 범하였으니, 일이 어찌 구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또 자기가 양성한 군사를 자기가 쓰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쓰는 군사를 자기가 양성하지 않았으므로 장병들이 서로 알지도 못하였다. 이는 다 군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크게 꺼리는 것이라 어찌하여 앞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서 고칠 줄을 알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도록 이런 잘못을 따르고,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사고가 없을 것을 바라는 것은 특히 요행을 바랄 따름이라 하겠다. 이것을 말한다면 그 말만 매우 길어지고 이를 한두 말로는 다할 수가 없다.  아아! 위태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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