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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館 創立記
24/01/27 10:10:24 金 鍾國 조회 183
다음 글은 成伣의 '慵齋叢話'에서 인용한 글인데 성균관이 창립될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보고서가 아니라 수필로 적은 글이라 아주 실감있고, 그 당시의 풍경을 잘 유추할 수 있어 실었습니다. 제현께서도 함께 느꼈으면 합니다. 成均館  創立記라 제목을 달아 보았 습니다.

成均館은 敎訓을 傳掌하는 곳이다. 국가에서 養賢庫(성균관 유생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관아)을 설치하고 성균관의 관원으로서 겸직하게 하였으며, 항상 유생 2백 명을 기른다.
上黨府院君 韓明澮의 啓奏로 尊經閣을 세우고 經書의 서적을 많이 刊印하여 간직하였으며, 廣川君 李克增의 啓奏로 典祀廳을 건축하고, 또한 나의 계주로 享官廳을 세웠다. 그 뒤에 聖殿과 東西廡와 식당을 개축하고 또 베 五백여필과 쌀 三벡여 섬을 하사하였으며, 또 學田을 하사하여 館中의 수용비에 대비하게 했다.

李克增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입어 많은 쌀과 베의 하사 받았습니다‘. 비옵건대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조정의 문사와 여러 유생들을 모아 斯文의 聖事(儒敎라는 뜻)로 삼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成廟가 윤허하였다. 이에 명륜당에서 大會를 여니 음식이 매우 정결하였다. 承旨가 宣醞(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과 御廚의 진미를 가져오는 것이 잇달아서 끊이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는 성균관에 거동하여 至聖先師 즉 孔子를 제사하고 물러 나와 下輦臺의 帳殿에 납시니 文臣 宰相들은 殿內에 들어가 모시고, 당하관인 문신들은 뜰에 나누어 앉았다. 八道의 유생들은 서울에 구름같이 모인 자가 무려 만여 명이었다. 상하가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새로 지은 악장을 연주하면서 모시고 먹었다. 각 官司가 나누어 맡아서 음식을 마련하였으며 임금이 자주 內臣을 보내어 督察하였다. 사람들이 다 취하고 배부르게 먹었다. 이런 성사는 예전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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