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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8). 명(明)나라 구원병 5천 명이 먼저 달려옴
23/06/26 16:56:36 金 鍾國 조회 1043
28. 명(明)나라 구원병 5천 명이 먼저 달려옴.
七月 遼東副總兵祖承訓 率兵五千來援 報先至. 時余病痔苦甚 臥不能起 上令左相 出治沿道軍食. 余使從事辛慶晉 啓曰「行在時任大臣 只有斗壽一人 不可出 臣已受接待唐將之命 雖病 猶可自力一行.」上許之.
初七日 力疾詣行宮拜辭 蒙引對 匍匐以入 啓曰「一路自所串以南 至定州⋅嘉山 則五千兵經過時 一二日食可辦 安州⋅肅川⋅順安三邑 蕩無所儲 天兵過此 宜先持三日糧 以備安州以南之食 若兵至平壤 卽日收復 則城中粟多 可以接濟 雖圍成累日 平壤西三縣穀 亦可竭力輸到軍前 不至闕乏 此等曲折 請令在此諸臣 與唐將相議 濶狹相濟 便宜施行.」上曰「然.」
旣出 內賜熊膽臘藥 內醫院僕龍雲者 送余于城門外五里痛哭 余登箭門嶺 哭聲猶聞.
夕至所串驛 吏卒逃散 不見形影 使軍官往搜村落間 得數人而至.
余勉諭曰「國家平日撫養汝輩 用在今日 何忍逃避? 且天兵方至 國事正急 此乃汝輩效勞立功之秋也.」因出空册子一卷 先書來見者姓名 示之曰「後日當以此 等第功勞 啓聞論賞 其不在此錄者 事定一一査覈行罰 不可免也.」
旣而來者相續 皆曰「小人因事暫出 豈敢避役? 願書名于册.」
余知人心可合 旣移文各處 使例置考功册 書功勞多少 以憑轉報施行.
於是聞令者爭出 搬運柴草 架造房屋 排設釜鼎 數日之間 凡事稍集.
余以爲亂離之民 不可用急 但至誠曉諭 未嘗鞭撻一人.
進至定州 洪宗祿盡起龜城人 輸運馬豆及小米 到定州⋅嘉山者 已二千餘石矣.
余猶以安州以後爲憂. 適忠淸道牙山倉稅米全一千二百石 載船將向行在 到泊於定州立嵒.
余喜甚 卽馳啓曰「遠穀適至如期 似是天贊中興之運 請幷取以補軍餉.」
令守門將姜士雄馳去立嵒 分運二百石定州 二百石嘉山 八百石於安州. 安州則以近賊 姑令停船水中以待之.
宣沙浦僉使張佑成 造大定江浮橋 老江僉使閔繼中 造晴川江浮橋擬渡天兵. 余前往安州調度.
時賊入平壤 久不出. 巡察使李元翼 與兵使李薲 駐順安 都元帥金命元在肅川 余在安州.

7월에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도우려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이때 나는 치질(痔疾)병으로 괴로움이 심하여 자리에 누워 일어날 수 없었으므로, 임금께서는 좌상(左相 : 尹斗壽)으로 하여금 나가서 연도 군사들(구원병)의 식량을 보살피라고(준비하라고) 하셨다. 나는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으로 하여금 임금에게 아뢰기를, "행재소[行在]에 시임대신(時任大臣)으로 다만 윤두수 한 사람만이 남 아 있을 뿐이므로 그가 나가서는 안 되겠나이다. 신이 이미 명(明)나라 장수를 접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아오 니, 비록 병이 들었다 해도 그래도 자신이 억지로라도 한번 가볼까 여기나이다." 하니, 임금께서 이를 허락 허락하셨다.

7월 7일에 병을 무릅쓰고[역질(力疾)*1] 행궁(行宮)으로 가서 임금에게 절하고 하직하니, 임금께서 불러 보시므 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서 아뢰기를, "明나라 군사가 지나가는 길인 소곶(所串) 남쪽으로부터 정주(定州)⋅가산(嘉山)까지는 5천 명의 군사가 지나갈 동안에 하루 이틀 먹을 식량은 준비되겠사오나, 안주(安州)⋅숙천(肅川)⋅순안(順安)의 세 고을은 양식을 저장한 것이 없사오니, 明나라 군사가 여기를 지날 때는 마땅히 먼저 3일 동안 먹을 식량은 가지고 안주(安州) 이남에서 먹을 식량으로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만약 구원병이 평양(平壤)에 이르러서 그날로 수복한다면, 성 안에는 좁쌀이 많으므로 식량을 보급할 수 있겠사오며, 비록 성을 포위하고 여러 날이 된다고 하더라도 평양의 서쪽 세 고을[강서(江西)⋅용강(龍岡)⋅함종(咸從)] 곡식을 또한 힘을 다하여 옮겨다 군대가 있는 곳에 공급할 수 있어 군량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청컨대, 이곳에 있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明나라 장수와 서로 의논하여 융통성있게 계획하시고 편리한 대로 시행하옵소서." 하니,임금께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앞을 물러 나오니, 임금께서 는 안에 분부하여 웅담(熊膽)과 납약(臘藥)*2)을 내어 주시고, 내의원(內醫院)*3)의 노복(奴僕 : 하인) 용운(龍雲)이라는 사람은 나를 성문 밖 5리까지 전송하면서 통곡하여, 내가 전문령(箭門嶺)에 오르도록 울음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저녁 때 소곶역(所串驛)에 이르니, 아전과 군사들이 다 도망하여 흩어져서 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군관을 시켜 가서 촌락을 수색하게 하였더니 몇 사람을 데리고 왔다.

나는 힘써 타일러 말하기를, "나라에서 평소 너희들을 어루만져 기르는 것은 오늘 같은 날에 쓰려는 때문인데, 어떻게 차마 도망하여 피한다는 말이냐?  또 明나라 구원병이 바야흐로 이르러 나랏일이 정말로 급하니, 이때야말로 곧 너희들이 수고로움을 다하여 공을 세울 때다." 하고는 인하여, 공책자(空册子) 한 권을 꺼내어 먼저 와서 보이는 사람의 성명을 써서 보이며 말하기를, "뒷날 마땅히 이것으로써 그 공로를 등급 매겨 임금 에게 알려 상줄 것을 의논하고, 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하나 조사하여 벌을 줄 것이니, 한 사람 도 그 죄를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랬더니 조금 뒤에 사람들이 잇따라 와서 다 말하기를, "소인들이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었습니다. 어찌 감히 할 일을 피하오리까? 원컨대, 저희들 이름을 책에 써넣어 주소서." 하였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수습할 수 있음을 알고, 곧 공문을 각처로 보내 이 같은 예로 고공책(考功册)*4)을 비치하여 놓고 공로의 많고 적은 것을 써 두었다가 보고하는 데 참고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있어서 명령을 들은 사람들은 다투어 나와서 땔나무와 말 먹일 풀을 운반하여 집을 짓기도 하고,가마솥을 걸어놓기도 하여 며칠 동안에 모든 일이 차츰 이루어져 나갔다.

이때에 나는 난리를 만난 백성들은 다급하게 부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만 정성을 다하여 잘 타이르 고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않았다. 그 길로 나아가 정주(定州)에 이르니, 홍종록(洪宗祿)이 구성(龜城) 사람들을 다 일으켜 가지고 말 먹일 콩과 좁쌀을 운반하여 정주(定州)⋅가산(嘉山)에 도착시킨 것이 2천여 석(石)이나 되었다.
나는 오히려 구원병이 안주(安州)에 온 뒷일을 근심하였는데, 마침 충청도(忠淸道) 아산(牙山) 창고에 있는 세미(稅米) 1천 2백 석(石)을 배에 싣고 장차 행재소[行在]로 향하려 하다가 정주의 입암(立巖)에 이르러 정박하고 있었다.

나는 매우 기뻐하며 곧 행재소로 달려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먼곳에 있는 곡식이 마치 약속한 듯이 이르렀 사오니, 이는 하늘이 중훙(中興)의 운수를 돕는 것 같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가져다가 군량을 보충하게 하시옵 소서." 하였다. 이어 수문장(守門將) 강사웅(姜士雄)을 시켜 입암(立巖)으로 달려가게 하여 2백 석을 정주(定州)로, 2백 석을 가산(嘉山)으로, 8백 석을 안주(安州)로 나누어 옮기게 하였는데, 안주는 倭敵이 있는 곳과 가까우 므로 아직은 배를 물속에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 선사포첨사(宣沙浦僉使) 장우성(張佑成)은 대정강(大定江)의 부교(浮橋)*5)를 만들고, 노강첨사(老江僉使) 민계중(閔繼仲)은 청천강(晴川江) 부교를 만들어 明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있게 준비하게 하고, 나는 먼저 안주 로 가서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이때 倭敵은 평양성으로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는데,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은 병사 이빈(李薲)과 함께 순안(順安)에 주둔하고,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숙천(肅川)에 있었고, 나는 안주(安州)에 있었다.

*1)역질(力疾) : 힘을 다하여 병든 몸을 견딘다는 뜻.
*2)납약(臘藥) : 섣날[납월(臘月)]에 내의원(內醫院)에서 만든 소합원(蘇合元)⋅안신원(安神元)⋅청심원(淸心元) 같은 약.
*3)내의원(內醫院) : 조선조 때 임금이 복용하는 약을 만드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
*4)고공책(考功册) : 공로를 기록하여 논공(論功)의 자료로 만드는 책.
*5)부교(浮橋) : 강물에 띄워놓고 왕래하게 만든 다리. 배다리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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