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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27). 임금이 의주(義州)에 이르고 명(明)나라 구원병을 오게 함
23/06/23 08:46:02 金 鍾國 조회 1062
 
27. 임금이 의주(義州)에 이르고 명(明)나라 구원병을 오게 함
車駕至義州.
天將參將戴某 遊擊將軍史懦 各領一枝兵向平壤 至林畔驛 聞平壤已陷 亦還駐義州. 天朝賜犒軍*7)銀二萬兩 唐官領到義州.
先是 遼東聞我國有賊變 卽奏聞 而朝議多異同 甚或疑我爲賊向導 獨兵部尙書石星 銳意救援.
時我使申點 在玉河館 尙書呼至庭 出遼東報變文書示之 點卽號慟 與一行 朝夕大臨 先請援兵.
尙書奏發二枝兵 往衞國王 及請賜銀.
點回至通州 而告急使鄭崑壽繼至 尙書引入火房 親問事狀 或至流涕云.
至是連遣使至遼東 吿急請援 且乞內附. 蓋賊已陷平壤 則勢如建瓴 意謂朝夕當至鴨江 事之危急如此 故至欲內附.
幸賊旣入平壤 斂跡城中 延至數月 雖順安⋅永柔去平壤咫尺 而猶不來犯
以此人心稍定 收拾餘燼 導迎天兵 終致恢復之功 此實天也 非人力所及也.

임금께서 의주(義州)*1)에 이르렀다.
명(明)나라 장수 참장(參將)*2) 대모(戴某)와 유격장군(遊擊將軍) 사유(史儒)가 각각 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 향하다가 임반역(林畔驛)에 이르러 평양성(平壤城)이 벌써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의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明나라 조정에서는 군사들에게 주는 은(銀) 2만 냥을 내주어 明나라 관원이 가지고 의주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먼저 요동(遼東)에서는 우리나라에 倭敵의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의논이 한결같지 않아서 심지어는 우리가 倭敵의 향도(嚮導)가 되었다고 의심하기도 하였는데, 유독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3)만은 우리나라의 구원을 열심으로 주장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사신으로 가 있던 신점(申點)이 옥하관(玉河館)에 묵고 있다가 석성(石星)의 부름을 듣고서 그 뜰에 이르렀더니, 요동 에서 보내온 倭敵 변고의 보고 문서를 내어 보이므로, 신점은 즉시 통곡을 하면서 그 일행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국상을 당해 통곡하는 것처럼 울며 먼저 구원병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병부상서 석성은, 이를 임금[神宗]에게 알려 두 부대를 내어보내며 가서 임금을 호위하게 하고, 그 경비로 은(銀)을 하사할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신점(申點)이 통주(通州)로 돌아왔을 때에 우리 고급사(吿急使) 정곤수(鄭崑壽)*4)가 뒤이어 이르렀다. 병부상서 석성은 그를 화방(火房)*5)으로 인도하여 들여 친히 상황을 물으면서 혹은 눈물을 홀렸다고도 한다. 이때 연달아 파견한 사신이 요동에 이르러 위급함을 알리며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청하고, 또 내부(內附 : 와서 귀부歸附*6)하다.)할 것을 빌었다.

이는 대개 倭敵이 벌써 평양성을 함락시켰다면 그 형세가 물동이를 지붕에서 쏟는 것처럼 세차서[건령(建瓴) : 동이 령 : 병(양옆에 손잡이가 달린 질그릇. 동이)의 물을 옥상(屋上)에서 쏟음. 세력이 강함] 아침이나 저녁으로 꼭 압록강(鴨綠江)까지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 되어, 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은 까닭으로 내부(內附)하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倭敵은 이미 평양성에 들어와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는, 몇날이 되도록 늘어붙어서 비록 순안(順安)⋅영유(永柔)가 평양에서 떨어지기가 지척 사이 고을인데도 오히려 침범하지 않았다. 이로 해서 인심이 차츰차츰 안정되고 남은 군사를 거두어 모으는 한편으로 明나라 구원병을 맞아들여 마침내는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실로 하늘의 도움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미칠 바 아니었다.

*1)의주(義州) : 평안북도 서북단에 있는 지명. 임진왜란 때 宣祖가 여기에 피란하여 버틴 곳이다.
*2)참장(參將) : 명대(明代)의 관명(官名)으로, 부총병(副總兵) 다음 자리의 무관(武官)이다.
*3)석성(石星) : 명(明)나라 神宗 때 사람. 임진왜란 때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보내는 데 적극적으로 힘썼다. 그러나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日本과 강화하려다 실패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파면되고 마침내 옥사함.

*4)정곤수(鄭崑壽, 1538∼1602) : 조선조 宣祖 때의 명신.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경음(慶陰)⋅조은(朝隱).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충익忠翼.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목사⋅강원도관찰사⋅우승지⋅병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와서 판돈령부사가 되고, 이어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저서는 『백곡집柏谷集』이 있다. *5)화방(火房) : 안방. *6)귀부(歸附) : 스스로 와서 복종함. 귀복(歸伏)함. *7)호군(犒軍) : 호궤(犒饋) : 군사(軍士)들을 위로(慰勞)하여 음식물을 베품. 호군(犒軍). 犒 : 호궤할 호. 음식을 보내어 군사를 위로하다. 饋 : 먹일 궤. 음식을 대접하다. 음식이나 물건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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