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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5). 왜적(倭敵)이 평양성(平壤城)에 들어옴
23/06/17 07:31:15 金 鍾國 조회 1131
25. 왜적(倭敵)이 평양성(平壤城)에 들어옴
平壤陷. 車駕次于嘉山. 東宮奉廟社主 自博川入山郡.
初賊兵分駐江沙上 作十餘屯 結草爲幕 旣累日不得渡江 警備頗怠.
金命元等 自城上望見 以爲可乘夜掩襲. 抄擇精兵 使高彦伯等領之 從浮碧樓下綾羅島渡 潛以船渡軍.
初約三更擧事 失時刻 旣渡已昧爽矣. 見諸幕中 賊猶未起 遂前突第一陳 賊驚擾 我軍多射殺賊. 士兵任旭景 先登力戰 爲賊所害 奪賊馬三百餘匹.
俄而列屯賊 悉起大至 我軍退走還趨船 船上人見賊已迫後 中流不敢艤船 淹死者甚衆. 餘軍又從王城灘 亂流而渡.
賊始知水淺可涉. 是日暮 擧衆由灘以濟 我軍守灘者 不敢發一矢 皆散走. 賊旣渡 猶疑城中有備 遲回不前.
是夜 尹斗壽⋅金命元開城門 盡出城中人 沉軍器火炮于風月樓池水中. 斗壽等由普通門而出 至順安 賊無追躡者. 從事官金信元 獨出大同門 乘船順流向江西.
明日賊至城外 登牡丹峯 良久觀望 知城空無人 乃入城.
始車駕至平壤 廷議皆以糧餉爲憂 盡取列邑田稅 輸到平壤. 及城陷 幷本倉穀十餘萬石 皆爲賊所有.
時余狀報至博川 又巡察使李元翼 從事官李好閔 亦自平壤來 言賊渡江狀. 夜車駕及內殿 發向嘉山. 命世子奉廟社 別由他路 使之收召四方 以圖興復.
分臣僚從行 領議政崔興源 以命從世子 右議政俞泓 亦自請隨世子 上不答. 駕旣出 泓伏路邊辭去 內官屢啓 右相俞泓請辭 上終不答. 泓遂從東宮.
時尹斗壽在平壤未還 行在無大臣 惟鄭澈以舊相從. 駕至嘉山 已五鼓矣.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었다. 임금께서 가산(嘉山)으로 행차하시고, 동궁(東宮)께서 종묘사직[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박천(博川)으로부터 산골의 군(郡)으로 들어가셨다. 이보다 먼저 적병이 대동강(大同江)의 모래 위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적은 10여 개의 둔진(屯陣)을 만들고 풀을 엮어서 막을 치고 있었는데, 벌써 여러 날이 지났으나 강을 건널 수가 없었고 그 경비도 자못 태만하였다.
김명원(金命元)은 성 위로부터 이것을 바라보고 가히 밤을 타서 엄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날랜 군사를 뽑아서 고언백(髙彦伯) 등으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 하여 부벽루(浮碧樓) 밑 능라도나루[綾羅島渡]로부터 몰래 배로 군사를 건너게 하였다.

처음에 삼경(三更)*1)에 거사(擧事)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시간을 어겨서 다 건너가고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적의 여러 막사를 살펴보니 적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먼저 그 제1진을 돌격하니 적들이 놀라서 소란하여졌다. 우리 군사는 적을 많이 쏘아죽였다. 이때 사병(士兵) 임욱경(任旭景)은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써 싸웠으나 적도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 싸움에 적의 말 3백여 필을 빼앗았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 곳에 주둔하였던 적들이 다 일어나서 크게 달려들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서서 달아나 도로 배로 달려왔다. 그러나 배 위에 있던 사람은 적들이 이미 뒤에 육박하므로 중류(中流)에 있으면서 감히 물가로 가서 배를 대지 못하니, 물에 밀려 들어가서 죽은 사람이 많았고, 나머지 군사들은 또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어지럽게 강을 건너왔다.

이를 본 적들은 비로소 강물이 얕은 것을 알고, 이날 저물 때 많은 무리를 휘몰아 얕은 여울로부터 강을 건너왔다. 이때 우리 군사로서 여울을 지키던 사람들은 감히 화살 한 대도 쏘지 못하고 다 흩어져 달아났다. 倭敵들은 대동강을 건너와서도 오히려 성안에 수비대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머뭇거리면서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날 밤에 윤두수(尹斗壽)⋅김명원(金命元)은 성문을 열어서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나가게 하고, 군기(軍器)와 화포(火砲)를 풍월루(風月樓)의 연못 속에 침몰시켰다. 윤두수 등은 보통문(普通門)으로부터 나와 순안(順安)에 이르렀는데 적병은 뒤쫓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종사관(從事官) 김신원(金信元)은 혼자서 대동문(大同門)을 나와서 배를 타고 물흐름을 따라 강서(江西)로 향하였다.

그 다음날에 倭敵은 성 밖에 이르러 모란봉(牡丹峯)으로 올라가서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성이 비어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는, 곧 평양성으로 들어왔다. 먼저 임금께서 평양성에 이르니 조정의 의논은 다 식량을 근심하여 여러 고을의 전세(田稅)를 가져다가 평양으로 옮겨두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본래 창고에 있던 곡식 10만 석(石)과 함께 다 적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이때 나의 장계(狀啓)가 박천에 이르고, 또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과 그 종사관(從事官) 이호민(李好閔)*2)이 역시 평양으로부터 와서 적이 강을 건너온 상황을 말하였다. 그래서 밤에 임금과 내전(內殿 : 왕비)께서는 길을 떠나 가산(嘉山)으로 향하시고,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종묘사직[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다른 길을 경유하여 사방에 있는 군사를 거두어 모아 나라의 홍복(興復)을 도모하게 하였다.

이에 신료(臣僚)들을 나누어 수행하게 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최흥원(崔興源)이 어명을 받들고 세자(世子)를 수행하게 되었다. 우의정(右議政) 유홍(兪泓)도 또한 세자를 수행하겠다고 스스로 청하였으나 임금께서는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의 행차가 이미 나가니 유홍이 길가에 엎드려 하직하고 가려 하였다. 내관(內官 : 환관宦官)이 여러 번 우의정 유홍이 하직하기를 청한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은 끝내 대답하지 아니하셨다. 유홍이 드디어 동궁(東宮 : 世子)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 윤두수는 평양성에 있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행재소에는 대신(大臣)이 없었고, 오직 정철(鄭澈)이 옛 재상으로써 모셨다. 임금께서 가산(嘉山)에 이르니 이미 오경[五鼓]*3)이 되었다.

*1)삼경(三更) : 밤12시경.
*2)이호민(李好閔, 1553∼1634) : 조선조 宣祖 때의 공신(功臣).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宣祖 17년(1584) 별시 문과에 급제함. 임진왜란 때 임금을 의주(義州)까지 모시고,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明)나라 군사를 청하여 와 평양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이 컸다. 부제학(副提學)⋅예조판서(禮曹判書)⋅대제학(大提學)⋅좌찬성(左贊成) 등의 벼슬을 지냄. 저서에 ≪오봉집(五峯集)≫이 있다.
*3)오고(五鼓) : 오경. 곧 새벽 4시경. 새벽 3시∼새벽 5시 사이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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