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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3). 명(明)나라 사자가 오고, 평양성(平壤城) 수비 문제가 논란됨.
23/06/10 15:07:58 金 鍾國 조회 1087
23. 명(明)나라 사자가 오고, 평양성(平壤城) 수비 문제가 논란됨.
遼東都司 使鎭撫*10)林世祿 來探倭情. 上接見于大同館 余自五月罷 六月初一日收叙 是日承命接待唐將.
時遼東聞倭犯 我國 未久 又聞都城不守 車駕西遷. 旣又聞倭兵 已至平壤 甚疑之 以爲倭變雖急 不應猝遽如此 或云 我國爲倭先導
世祿之來 余與之同上練光亭 望察形勢 有一倭從江東林木間 乍見乍隱 已而二三倭繼出 或坐或立 意態安閒 若行路休息之狀
余指示世祿曰「此倭候也.」世祿倚柱而望 殊有不信之色曰「倭兵何其少也?」余曰倭巧詐 雖大兵在後而先來偵探者 不過數輩. 若見其少而忽之 則必陷於賊術矣. 世祿唯唯 亟求回咨馳去.
命左相尹斗壽 率都元帥金命元 巡察使李元翼等 守平壤.
數日前 城中人聞車駕欲出避 各自逃散 閭里幾空. 上命世子 出大同館門 集城中父老 諭以堅守之意. 父老進前曰「但聞東宮之令 民心不信 必得聖上親諭 乃可.」
明日 上不得已御館門 令承旨曉諭如昨 父老數十人 拜伏痛哭 承命而退 遂各分出招呼 悉追老弱男 婦子弟之竄伏山谷者入城 城中皆滿.
及賊見形於大同江邊 宰臣盧稷等 奉廟社位版 幷護宮人先出.
於是城中吏民作亂 挺刃橫路縱擊之 墜廟社主路中 指從行宰臣大罵曰「汝 等平日 偸食國祿 今乃誤國欺民 乃爾耶?」
余自練光亭赴行宮 路上見婦女幼稚 皆怒髮上指 相與號呼曰「旣欲棄城 何故紿我輩入城 獨使魚肉於賊手耶?」
至宮門 亂民塞街 皆袒臂持兵杖 遇人輒擊 粉嚣雜沓 不可禁.
諸宰在門內朝堂者 皆失色起立於庭中.
余恐亂民入宮門 出立門外階上 見其中有年長多髥者 以手招之 其人卽至 乃土官也.
余諭之曰「汝輩欲竭力守城 不願車駕出城 爲國之忠則至矣. 但因此作亂 至於驚擾宮門 事甚可駭. 且朝廷方啓請堅守 上已許之 汝輩何事乃爾? 觀汝貌樣 乃有識人 須以此意 曉諭衆人而退 不爾則汝輩將陷重罪 不可赦也.」
其人卽棄杖斂手*11)曰「小民聞欲棄城 不勝憤氣 妄動如此 今聞此言 小人雖迷劣 胸中卽豁然矣.」遂揮其衆而散.
蓋前此朝臣 聞賊兵將近 皆請出避. 兩司⋅弘文館 連日伏閤力請 寅城府院君鄭澈 尤主避出之議.
余曰「今日事勢與前在京城時有異 京城則軍民崩潰 雖欲守之 未由也. 此城前阻江水 而民心頗固 且近中原地方 若堅守數日 天兵必來救 猶可藉*12)以卻*13)賊 不然 從此至義州 更無可據之地 勢必至於亡國.」
左相尹斗壽同余意. 余又請鄭澈曰「平時每意公慷慨不避難易 不圖今日之議如此也.」
尹相詠文山詩曰「我欲借劎斬侫臣.」寅城大怒 奮袂而起.
平壤人亦聞余爲守議 故是日聞余言 頗順從而退.
夕召監司宋言愼 責以不能鎭定亂民. 言愼摘發其倡首者三人 斬於大同門內 餘皆散去.
時已定出城 而不知所適 朝臣多言北道地僻路險 可以避兵.
蓋是時 賊兵已犯咸鏡道 而道路不通 且無報變者 故朝廷不知也.
於是 以同知李希得 曾爲永興府使 有惠政得民心 以爲咸鏡道巡檢使 兵曹佐郞金義元爲從事官 往北道 而內殿及宮嬪以下先出向北.
臣固爭曰「車駕西狩 本欲倚仗天兵 以圖興復耳. 今旣請兵于天朝 而顧深入北道 中間賊兵限隔 天朝聲問亦無可通之路 況望恢復乎? 且賊散出諸道 安知北道必無賊兵 若不幸旣入其處 而賊兵? 隨至 則他無去路 只有北虜而已 何處可依? 其爲危迫 不亦甚乎? 今朝臣家屬 多避亂于北道 故各顧私計 皆言向北便. 臣有老母 亦聞東出避亂 雖不知在處 而必流入於江原⋅咸鏡之間 臣亦以私計言之 則豈無向北之情哉? 只以國家大計 不與人臣同 故敢此懇陣耳. 因嗚咽*14)流涕*15). 上惻然曰「卿母安在? 予之故矣.」
旣退 知事韓準 又燭請對 力言向北之便. 於是中殿遂向咸鏡道.
時賊至大同江 已三日矣.
余輩在練光亭 望見越邊 有一倭以木末縣小紙 挿江沙上. 令火砲匠金生麗 悼小舟往取之. 倭不帶兵器 與生麗握手拊背 極欵狎 附書以送.
書至 尹相欲不開見 余曰「開見何妨?」開示則書面云「上朝鮮國禮曹判書李公閣下」蓋與李德馨書 而平調信⋅玄蘇所裁也. 大槩欲見德馨議講解.
德馨以扁舟會平調信⋅玄蘇于江中 相勞問如平日.
玄蘇言「日本欲借道朝貢中原 而朝鮮不許 故事至此 今亦借一條路 使日本達中原則無事矣.」
德馨責以負約 且令退兵後議講解. 調信等 語頗不遜 遂各罷去
夕賊數千 結陣於江東岸上.

요동도사(遼東都司)*1)가 진무(鎭撫) 임세록(林世祿)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로 와서 倭敵의 정세를 탐지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명(明)나라 사자(使者)를 대동관(大同館)에서 접견하였다. 나는 5월에 관직을 파면당하였다가 6월 1일에야 다시 복직되고, 이날 바로 당장(唐將)을 접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요동(遼東)에서는 倭敵이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다는 말을 들은지 얼마 아니되어 또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서쪽지방으로 피란하였다고 들리더니, 또 倭兵이 이미 평양(平壤)에 이르렀다고 들리므로 몹시 이를 의심하여 倭敵의 변고가 비록 급하다 하더라도 이토록 빠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倭敵의 앞잡이가 되었다."고도 말하였다.
임세록이 오자 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연광정(練光亭)으로 올라가서 그 형세를 살펴보니, 한 倭敵이 대동강(大同江)의 동쪽 숲 사이로부터 잠깐 나타났다가 숨더니 조금 뒤에는 2, 3명의 倭敵이 계속 나와서 앉고, 혹은 서며 그 태도가 태연하고 한가로워 마치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쉬고 있는 모양과 같았다.

나는 임세록에게 그것을 가리켜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는 倭敵의 척후입니다." 하니, 임세록은 기둥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이를 믿지 않는 기색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倭敵의 군사라면 왜 저렇게 적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倭敵은 교묘하고 간사하여 비록 대군[大兵]이 뒤에 있더라도 먼저 와서 정탐하는 자는 몇 놈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적은 것을 보고 이를 소홀히 여기다가는 반드시 倭敵의 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세록은 "그렇겠습니다." 하면서 급히 회답하는 자문(咨文)*2)을 요구하여 가지고 달려갔다.
조정에서는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에게 명령하여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명하여 평양(平壤)을 지키게 하였다.

며칠 전에 성 안 사람들이 임금께서 평양성(平壤城)을 나와 피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저마다 도망하여 흩어져 마을이 거의 비어 버리게 되었다. 임금께서는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대동관문(大同館門)으로 나와서 성 안의 부로(父老)를 모아놓고 평양성을 굳게 지키겠다는 뜻을 타이르게 하였더니, 부로들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다만 동궁(東宮)*3)의 명령만 듣고서는 백성들의 마음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오니, 반드시 성상(聖上)*4)께서 친히 타이르는 말씀을 들어야만 되겠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날 임금께서는 할 수 없이 대동관문으로 나가시어 승지(承旨)로 하여금 전날 동궁이 말한 것처럼 타이르니, 부로들 수십 명은 엎드려 절하고 통곡하면서 명령을 받들고 물러가 드디어 각기 길을 나누어 나가서 늙은이, 어린이와 남자, 여자와 자제들로서 산골짝에 숨어 있던 사람을 찾아 불러내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니 성 안에 백성들이 가득 찼다.

그런데 倭敵이 대동강변에 나타나자, 재신(宰臣) 노직(盧稷)*5) 등은 묘사(廟社)*6)의 위판(位版)을 받들고 아울러 궁인(宮人)을 호위하며 먼저 성을 나왔다. 이에 성 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그 길을 막고 함부로 쳐서 묘사의 신주[主]를 땅에 떨어뜨리고 따라가던 재신들을 지목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평일에 나라의 녹[國祿]만 훔쳐먹다가 이제 와서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들을 속임이 이 같으냐?" 하였다. 나는 연광정(練光亭)으로부터 임금이 계시는 행궁(行宮)으로 달려가면서 길 위에 있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다 성난 얼굴로 머리털을 곤두세워 가지고 서로 함께 소리 질러 외치기를, "성을 버리고 가시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유독 우리들만 적의 손에 넣어 어육(魚肉)을 만들게 하시려는 겁니까?" 하였다.
궁문(宮門)에 이르니, 난민(亂民)들이 거리를 꽉 막았는데 모두들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무기와 몽둥이를 가지고 사람을 만나면 막 치며 시끄럽게 어지럽혔으나 금할 수가 없었다.

여러 재신들도, 성문 안의 조당(朝堂)에 있던 사람들도 다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여 뜰 안에 일어서 있었다. 나는 난민들이 궁문 안으로 몰려 들어올까 염려하여 궁문 밖의 섬돌 위에 나와 서 있다가, 그중에 나이 좀 먹고 수염이 많은 사람을 보고 손짓을 하여 그를 부르니, 그 사람은 곧 앞으로 나왔는데, 그는 곧 지방관리였다. 나는 그를 타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고 임금께서 성을 나가기를 원하지 않게 하려고 하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지극하구나. 다만 이 일로 인하여 난을 일으키고, 더구나 궁성문까지를 놀라고 요란하게 만들었으니 심히 놀라운 일이다. 또 조정에서 마침 굳게 지킬 것을 계청(啓請)하여 임금께서 이미 이를 허락하셨는데, 너희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을 떠느냐? 너의 모양을 보니, 곧 유식한 사람 같다. 모름지기 이 뜻을 여러 사람들에게 잘 타일러서 물러가도록 만들어라. 그러지 않는다면 너회들은 장차 중한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그 사람은 곧 몽둥이를 버리고 손을 모아 빌며 말하기를, "소인은 성을 버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분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이와 같은 망령된 짓을 하였사온데, 지금 그 말씀을 듣자오니, 소인은 비록 우매하고 용렬하오나 가슴속에 맺힌 원한이 시원히 열리나이다." 하면서, 드디어 그 무리를 지휘하여 가지고 흩어졌다.

대개 이보다 먼저 조정의 신하들이 적병이 곧 가까워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나가 피란하기를 청하였는데, 양사(兩司 : 司憲府⋅司諫院)와 홍문관(弘文館)*7)은 날마다 대궐문 앞에 엎드려 힘써 피란하기를 청하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더욱 피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오늘의 사세는 먼저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군대와 백성들이 함께 무너져 버렸으므로, 비록 이를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 평양성은 앞에는 강물이 가로막혔고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이 자못 굳건 하며, 또 중원지방(中原地方)에 가까워 만약 며칠 동안만 굳게 지킨다면 明나라 군사가 반드시 와서 구원할 것이오니, 이를 힘입어서 倭敵을 물리칠 수 있겠사오나, 그렇지 못하면 여기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는 다시 의지할 만한 성이 없사오니, 그렇게 된다면 형세는 반드 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도 나의 의견과 같았다. 나는 또 정철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평시에 나는 늘 공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강개 해서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회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는데, 오늘의 논의가 이와 같은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상(尹相 : 尹斗壽)이 문산(文山)*8)의 시(詩)인 '내가 칼을 빌어가지고 아첨하는 신하를 베어 버린다면[我欲借劎斬侫臣]'을 읊으니, 인성(寅城 : 鄭撤)은 크게 노하여 옷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가버렸다. 평양(平壤) 사람들도 또한 내가 성을 지키자는 의견을 내세웠다는 말을 들었던 까닭으로, 이날 내 말을 듣고 자못 순종하면서 물러간 것이다. 저녁에 감사(監司) 송언신(宋言愼)을 불러서 능히 난민을 진정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였더니, 송언신이 그 앞장을 선 세 사람을 결박하여 대동문(大同門) 안에서 목을 베어 죽이니, 그 나머지는 다 흩어져 가버렸다.

그때 이미 임금께서는 성을 나가기로 결정하였으나 갈 곳을 알지 못하였고, 조신(朝臣)들은 많이들 "북도(北道 : 함경북도)는 지역이 궁벽 하고 길이 험하여 가히 난리를 피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대개 이때 적병은 벌써 함경도를 침범하여 도로가 통하지 못하였고, 또 변고를 보고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으로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이에 있어서 동지(同知) 이희득(李希得)을, 그가 일찍이 영흥부사(永興府使)로서 어진 정사를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고 해서 함경도순검사(咸鏡道巡檢使)로 삼고, 병조좌랑(兵曹佐郞) 김의원(金義元)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북도로 가게 하고, 내전(內殿) 및 궁빈(宮嬪) 이하의 사람들을 먼저 내보내어 북으로 향하게 하였다. 나는 굳게 이를 간쟁하여 말하기를 ,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란하신 것은 본래 明나라 군사의 구원을 입어 홍복(興復)을 도모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미 구원병을 明나라에 청하여 놓고도 도리어 북도로 깊이 들어 간다면 중간에서 적병이 길을 가로막아 明나라의 소식도 역시 통할 길이 없을 것인데, 더구나 나라의 회복을 바라오리이까? 또 倭敵들이 여러 도(道)로 흩어져 나갔는데, 어찌 북도에는 반드시 적병 이 없을 줄 알겠습니까? 만약 그곳으로 들어가셨다가 불행하게도 적병이 뒤따라 이른다면 달리 갈 길도 없고, 다만 북쪽 오랑캐로 가는 길 밖에 없사오니, 어느 곳에 의지하겠습니까? 그 위태롭고 급박함이 역시 심하지 않습니까? 지금 조신(朝臣)의 가속(家屬)들이 많이들 북도에 피란하고 있는 까닭으로 각각 사사로운 계교를 생각하여 다 북도로 향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에게도 늙은 어머니가 있사옵는데 역시 동쪽 방면으로 피란을 나왔다고 듣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그 계시는 곳은 알지 못하오나, 그러나 반드시 강원도(江原道)나 함경도(咸鏡道) 사이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오니 신도 역시 사사로운 계교로써 말한다면, 어찌 북쪽으로 향할 마음이 없사오리이까? 다만 국가를 위하여 큰 계교가 남들과 신의 뜻이 동일하지 않은 까닭으로 감히 간곡하에 진술하는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흐느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임금께서 측은하게 여기시며 말씀하시기를, "경의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는지, 나의 탓이로구나!" 하셨다.

내가 물러나온 뒤에 지사(知事) 한준(韓準)이 또 홀로 임금께 뵙기를 청하고 힘써 북도로 향하는 것이 옳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중전(중中殿)*9)께서 드디어 함경도를 향하여 떠나셨다. 이때 倭敵은 대동강(大同江)에 이른 지가 벌써 3일이나 되었다. 우리들이 연광정(練光亭)에 있으면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한 倭敵이 나무 끝에 작은 종이를 달아매어 강가의 모래 위에 꽂고 가므로 화포장(火砲匠) 김생려(金生麗)로 하여금 작은 배를 타고 가서 이를 가져오게 하였더니, 倭敵은 무기도 휴대하지 아니하고 김생려와 손을 잡고 등을 두드리며 극히 친절하게 굴면서 서신[書]을 붙여 보냈다. 그 서신이 이르러도 윤상(尹相)은 열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말하기를, "열어 본들 무엇이 해로우리오?" 하고 열어보았더니, 그 서면에 <조선국(朝鮮國) 예조판서(禮曹判書) 이공각하(李公閣下)에게 올립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이덕형(李德馨)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평조신(平調信)과 현소(玄蘇)가 마련하여 보낸 것이었고, 그 내용은 대개 이덕형을 보고 강화를 의논 하고자하는 것이었다.

이덕형은 조각배를 타고 가서 平調信과 玄蘇를 대동강 가운데서 만났는데, 서로 위로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평일과 같았다.
이때 玄蘇는 말하기를, "일본(日本)이 길을 빌어 中國에 조공(朝貢)을 하고자 하는데, 조선(朝鮮)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까닭으로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한 가닥의 길을 빌려 주셔서 日本으로 하여금 中國에 통할 수 있게 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은 전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을 책망하고, 또 군사를 물러가게 한 뒤에 강화를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그런데 조신(調信)의 말이 자못 공손하지 않으므로 각기 회담을 피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이날 저녁 때 倭敵 수천 명이 몰려와서 대동강 동쪽 언덕 위에 진을 쳤다.

*1)요동도사(遼東都司) : 명(明)나라 요동성(遼東省)의 군정을 맡아 다스리는 관직.
*2)자문(咨文) : ①청대(淸代)에 동급 관청 사이에 주고받던 공문서. ②조선 때, 中國과 주고받던 공식적인 외교 문서.
*3)동궁(柬宮) : 왕세자(王世子) 궁전의 별칭. 곧 왕세자를 말함.

*4)성상(聖上) : 현재 자기 나라 임금의 존칭.
*5)노직(盧稷, 1545∼1618) : 조선조 중기의 문신. 자는 사형(士馨),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宣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正院注書)를 거쳐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하였고, 뒤에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6)묘사(廟社) :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말한다.

*7)홍문관(弘文館) : 조선조 때 삼사(三司)의 하나. 궁중의 경서(經書) 및 사적(史籍)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8)문산(文山) : 中國 송(宋)나라 때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 南宋, 1236∼1283)의 호.
*9)중전(中殿) : 왕후(王后)의 존칭. 중궁전(中宮殿)의 약칭. 중궁(中宮)이라고도 함.

*10)진무(鎭撫) : 난리를 평정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민심을 진정시켜 위무함. 鎭 : ①진압할 진. ②지킬 진. ③메울 전. 억눌러서 조용하게 하다. 진정하다. 撫 : 어루만질 무. 사랑하다. 달래다. 위로하다.
*11)염수(斂手) : 손을 오므림. 두려워하고 삼감.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잡고 서 있음. ①지명 렴. ②렴(斂) : 거둘 렴. 흩어져 있는 것을 모으다. 오므리다. 염하다. 시체에 옷올 입히는 일이 소렴(小斂). 관(棺)에 시체를 넣는 일이 대렴(大斂)이다. 장사 지내다.
*12)자(藉) : 깔개 자. 제사 지낼 때의 깔개. 빌리다. 의존하다. 古字 耤. 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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